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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괴체 : "Dan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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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5-21 16:00:58

 

By Mario Götze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란 축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어떠한 큰 어려움도 겪은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아주 어린 나이에 나는 내 꿈을 이뤄냈다. 
 나는 17세에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노란 벽(Die Gelbe Wand) 앞에 섰고,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중 두 명의 밑에서 뛰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것은 22살 때의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너무 나도 어렸고, 그때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 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때까지 내가 이뤄낸 것을 나는 그렇게 감사해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아프게 되자, 모든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서 부터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좋은 기억에서 부터 시작하자. 클롭과의 기억에서 부터.
 그는 나의 첫 감독이었으며, 17살의 나에게 믿음을 주면서 데뷔의 기회를 준 사람이었다. 그가 리버풀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 즐겁다. 그는 미디어 앞에 서는 것에 타고난 사람이다. 그는 정말로 진정성 있는 사람이며,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가 터치라인에 서 있을 때의 모습만을 볼 뿐이다. 거기 서있을 때의 클롭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다. 

 17~18살의 내가 훈련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때, 그는 나에게 겁을 주곤 했다.. 갑자기 달려와서는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나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식으로.
 나에게 독일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말했을 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면서 "좀 더 열정을 보이라고! 모든걸 다 쏟아부으란 말야! ㅅㅣ발(F***)! 어서!!!" 같이 말했다. 

 훈련이 끝나면 그는 완벽하게 다시 침착함을 되았고, 나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말을 걸었다.
 "마리오, 어떻게 지내니?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무슨 일 있어?"

 그는 나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물론 그는 뛰어난 감독이지만, 어린 선수였던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이었다. 나는 축구계에서 클롭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을 웃기는 감독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여름의 어느 날, 뒤셀도르프에서 그를 만났을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클롭은 모발 이식을 위해서 전문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큰 뉴스가 되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도 매우 즐거워했다. 클롭은 웃으면서 모발 이식에 대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식 후에는 자기가 얼마나 멋져보일 것인가를 포함해서.

 그리고 뒤돌아서 떠나려던 클롭은 나에게 윙크를 하더니 나에게 "마리오, 걱정하지마. 전화번호는 저장해 놓을게."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의사의 전화번호 말야. 널 위해서 저장해 놓을게. 몇년 뒤에는 너도 필요하게 될수 도 있으니까."

 그리고는 그는 웃으면서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해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재밌는 사람이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만 한다. 그는 나를 데뷔 시켜 주었으며, 도르트문트에서 우리는 함께 여러 위대한 일들을 성취해냈다.

 내가 10살에서 20살이 될때까지, 나는 고향 클럽에서 뛰면서 부모님과 같이 테라스 하우스에서 살았다. 그동안은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오랫동안 고심한 것이었다. 

 그 전 해에 바이에른이 나에게 접근해왔을때,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펩 과르디올라가 바이에른 뮌헨의 새로운 감독이 된다는 발표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다시 그들이 접촉해왔을때,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20살짜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여러분은 20살 때를 떠올릴 수 있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나이다. 
 나는 대학교를 갈 기회가 없었다. 그때까지 혼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순수하게 축구의 관점에서 삶의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는, 펩 밑에서 뛴다면 내가 선수로서 더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떠나기로 결정했고 앞으로 일어날 결과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몇 주 후가 되자, 부모님의 집 밖에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경찰들이 배치되었다. 

 나는 누가 이 사실을 누설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나는 아니다. 내가 전혀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정말로 끔찍한 타이밍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게 되기 2일전, 여름에 내가 떠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지금의 나는 그 반응들을 이해한다. 나는 이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 일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팬들의 그 휘파람 소리들과 현수막들.....
개인적으로는 그 문제를 감내할 수 있었지만, 당시 14살이었던 동생은 학교에서 문제를 겪었고 어머니에게도 사람들은 말을 해댔다. 인터넷에는 나의 가족들에 대한 협박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겪게 된 일들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우리의 집이었다. 나는 여름에 떠날 수 있지만, 도르트문트에 머무르고 계속 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정말 좋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내가 이적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인생에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어떤 일이 다가올 지에 대해서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축구 선수로서 나는 가장 위대한 순간들을 가장 암울했던 시기들 직후에 맞이하곤 했다. 그것의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언론의 말들만 보면, 나는 유다였으며, 그 다음에는 영웅이었고, 그리고는 실망스러웠고, 그 후에는 축구계를 떠난 사람이었다. 이것이 단 4년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는 펩에게서 축구에 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배웠기에, 바이에른에 간 것을 실수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는 전술에 관해서 문자 그대로 몇시간 동안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새로운 관점에서 축구를 보는 방식을 배웠다. 훈련은 내가 경험했던 것 중에 가장 강도 높고, 세심한 것이었다. 클롭과도 그랬던 것처럼, 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펩과 함께한 경험은 특별했다. 
 그때를 다시 생각해보면 내 생각은 복잡해진다. 도르트문트를 떠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겪지 않았더라면, 내가 바이에른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월드컵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났을까?

 인생은 참 이상한 법이다. 그 월드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나의 결승전 골에 대해서 말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내가 그 대회에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잊어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알제리와의 16강전에서 내가 전반전이 끝나고 교체당한 것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나는 선발로 출장하지 못했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에서는 아예 출장하지도 못했다. 
 내가 이 일에 대해서 지금은 성숙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일은 내가 겪은 일들 중에서도 가장 슬픈 일이었다.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승전 직전까지 나는 정말로 우울했다. 

 무슨 일이 닥칠지 미리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골, 그 골, 그 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 골은 중요한 부분 중에서 가장 덜 중요한 부분이다. 공을 차는 것... 내가 수천번은 해왔던 일이다. 그 골은 내가 호텔 방에서 상황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더이상 우울해 하지 않고, 결승전 전에 가능한 최대한 훈련에 열심히 집중하기로 결심한 것의 결과물이었을 뿐이다. 
 그 골에는 어느 정도 운이 따랐다. 

 감독은 나를 교체선수로 투입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많은 선수들이 있었으니까.
 안드레 쉬얼레가 그 위치에 있는 나에게 공을 크로스로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간신히 나를 확인했다.
그 공이 박스 안에서 조금 다른 곳으로 왔을 수도 있었다. 1m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골키퍼가 손을 가져다 댈 수도 있었다. 

 가슴이 공에 와 닿았을 때, 내가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있을 수도 있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내가 마라카낭에서 월드컵 우승 골을 넣은 선수가 아니게 되는 시나리오는 수없이 많이 있다. 


꿈꿀 수 있는 것 이상의 골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만족감을 준 것은 내가 결승전 이전의 며칠 간을 잘 감내해 낸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경력에서 최악이었던 시기로부터 3일 뒤, 우리는 세계 챔피언이었고, 나는 갑자기 영웅이 되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런 역경을 극복해낸 그때의 방식은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에 영감을 주었다. 

 그런 류의 기대에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요아킴 뢰브의 "메시" 발언을 언론들은 너무나도 강조했다.
결승전에서 나를 벤치에서 부른 뢰프가 "메시보다 낫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줘"라고 말했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나는 전술과 내가 해야할 역할에 너무나도 집중해 있었다. 사실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뢰브가 그 말을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반복하자, 그것은 큰일이 되었다. 이미 바이에른 소속으로서 너무나 많은 압박감이 있는 상황이었다. 메시와의 그 비교는 22살의 나에게는 아마도 최선의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정도를 벗어났고, 나에게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잊기 쉬운 일인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 점을 월드컵이 끝난 후 매우 가혹하게 새기게 되었다. 
 그 후로 2년 동안 내 몸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나는 훈련 강도를 매우 높였고, 많은 통증을 겪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로 피곤했으며,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대사장애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내 경력이 끝났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재활치료가 필요 했고, 회복을 위해서는 몇달 간은 삶의 고삐를 늦춰야 했다  어떻게 본다면 이는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건강 문제를 겪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8살때 부터 모든 삶을 축구에만 바쳐온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수 있지만, 월드컵 우승조차도 나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3주 간의 휴가를 떠났고, 그 후 내가 바이에른으로 돌아왔을때 월드컵 우승은 없었던 일 같았다. 더 많은 우승 타이틀과 더 많은 골에 대한 더 많은 기대감이 있었다. 바이에른에서, 이는 가차없을 정도다. 
 
 그래서 축구를 나의 삶에서 떨어뜨려 놓아야만 했을 떄, 나는 처음으로 내가 했던 일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이 좋던 간에 나쁘던 간에,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을 나는 처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내린 최선의 결정은 도르트문트로의 복귀였다. 20살에 도르트문트를 떠났을 때, 나는 삶에 대한 어떠한 관점도 갖고 있었다.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릴 수는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떤 잔디 위에서 공과 함께 뛰어다니는 것이다는 식으로 말이다. 축구는 나에게 그저 스포츠였을뿐이었고, 그게 다였다. 
 하지만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는 축구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증오, 사랑, 압박감과 모든 것들임을. 그리고 삶에 대한 관점을 얻게 되었다. 

 음, 사실 나는 아직도 증오의 측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잘 대해주었던 바이에른의 선수들과 나는 여전히 친하다. 나는 피부색을 이유로 누군가를 증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함께 월드컵을 독일로 가져온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영원히 이어질 유대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도르트문트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고향을 떠났을 때 분노했던 많은 사람들은 내가 돌아오게 되자 나를 반겨주었다.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2009년 11월 21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다.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이날은 마인츠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둔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이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경기 88분에 위르겐 클롭이 나를 벤치에서 경기에 투입했던 날이자, 내가 데뷔한 날이었으니까.

 상상해보자. 17살이었고, 나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랐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교체로 투입된 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그 '노란 벽'과 노란 벽의 모든 팬들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라운드 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바지에 똥을 쌀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월드컵 결승전 골을 앞으로의 100년 동안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하지만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의 잔디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순간 또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기회를 준 클롭에게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초인 그 기회를.

 그리고 그걸 아는가? 몇 년이 지났지만, 그 전화번호가 여전히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수 있어서 기쁘다.

 아직까지는.
 아마도 언젠가는, 지금으로부터 먼, 더 먼, 아주 먼 미래에는... ????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시즌 내내 나를 지지해 준 도르트문트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보내고 싶다. 나에게는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함께 겪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상도, 밑바닥에도 경험했다. 이 여정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클럽이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부분임을 말하고 싶으며, 축구를 다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Danke.

 M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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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5-21 15:11:03

이래저래 느낀 게 많을 수밖에 없을 여정이겠죠. 그래도 팀에 대한 애정이 충만해보여서 다행.

2019-05-21 15:29:07

올 나중에 또봐야지요

2019-05-21 15:43:06

와 정말 잘 쓴 글이네요

2019-05-21 15:59:16

막짤 임원희씨! ㅠㅠ

2019-05-21 16:00:58

사실 괴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였는데, 힘든일 많았는데, 잘 이겨내서 다행이에요. 작년 여름에 여친과 결혼했던데, 앞으로는 축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좋은 일만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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