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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드사이의 이야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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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18:25:08

 
마치 가정집에 있는 어린 아이처럼 나는 이사를 가고 싶어 했고,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든 간에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낭트는 나에게 너무나도 작은 팀이 되었다.

나는 마르세유 이적을 원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엄청난 연봉을 보장해주는 모나코로 이적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싫다고 말했다. 나는 야망이 있었고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마르세유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 나에게 다른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축구에서는 운이 좋아야 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화려하고 재능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나는 평생 동안 다이어트, 수면, 모든 면에서 진지한 선수였지만, 이기는 구단에 가는 행운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AC 밀란 이적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AC 밀란의 디렉터이었던 아리에도 브라이다는 알렌 보크시치를 영입하고 싶어했고 브라이다는 내가 아닌 그를 보러 마르세유에 왔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 날 경기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리베로와 중앙 수비수로 뛰었고 그 시즌에 마르세유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브라이다는 나중에 나를 더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노트에 내 이름에 가위표를 그었다.

마르세유가 나를 이적 시장에 내놓았을 때, AC 밀란에서 즈보니미르 보반이 부상을 당했고, 그래서 밀란에 왔을 때, 보반을 대신해서 미드필더로 뛰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았다.

100점 만점에, 마르세유는 40점이고 밀란은 100점이었다. 단순한 이유다. 조직, 경기장, 경기 때마다 산 시로를 채우는 8만 2천명의 관중, 밀라넬로, 훈련장, 음식, 옷, 밀라노가 세계의 패션 도시인 것, 내가 경험한 노출 경험. 밀라노는 다른 세계다. 내 연봉은 마르세유에서 받았던 것보다 4배나 더 올랐다.

나는 압박감을 좋아한다. 몇몇 재능 있는 선수들이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중요한 경기가 열리는 큰 경기장에 들어서면 딜리버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압박감이 그들을 흔들고 막는다.
 
밀란에서의 첫 훈련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몇 년 후, 파비오 카펠로가 나에게 '너가 밀란에 왔을 때, 난 너가 누군지 정말로 몰랐지만, 너가 우리와 함께 했던 훈련의 첫 주에 나는 너의 모습을 보고 1군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라고 말했다.

즐거웠다. 마치 정글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오직 건강한 사람 뿐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EPL에서 고생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솔직히 디온 더블린, 던컨 퍼거슨과 같은 덩치 큰 남자들과 경기하면서 힘들었다. 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나는 공격수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오늘 너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를 보여줬고, 그 선수는 눈을 내려깔고 내가 이겼다는 것을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남자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격수들이 공을 뺏기 위해 달려들었고 나는 4개월 동안 우울했었다.

우리가 훈련하고 있던 훈련장은 끔찍했다. 그 당시에, 그 경기장은 3만 2천명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후에 4만 2천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확장했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라는 사실에 의해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나는 30살이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의 경력은 나보다 뒤에 있었지만, 새로운 모험에 대한 감각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그 이후의 스페인처럼,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다른 팀에게는 어떤 것도 없었다. 우리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체코를 제치고 유로 2000에서 우승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카타르로 이적한 이후, 어느날 아침, 나는 부상을 당했다. 방 안에 혼자 있었고, 아침 다섯 시가 되서 이미 태양은 열심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두 발을 바닥에 놓았을 때 움찔하고 놀랐다. 가족은 내가 카타르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제 은퇴할 때야' 라고 말했다.

은퇴를 결정하게 된 두 가지 요소는 심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이었다. 작은 부상을 당한 이후, 나는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날 나는 구단으로 가서 그들에게 은퇴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전했다. 프로 선수로서 헌신했던 20년의 세월 이후, 나는 지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90분 경기가 그립지 않다. 난 자유다, 힘들었는데 마음이 완전히 편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쉽다고 말한다. 그들이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발가락은 차갑고, 여행하고, 압박하고, 책임감을 느끼는 그 생활을 말이다. 롤 모델이 되어야 하고, 많은 일에 관여해야 한다. 이제 나는 자유고 지금은 다른 일에 전념하고 있다.

자선 사업, TV 일이 내 자신의 사업이다.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가족을 위한 시간도 가지고 있다. 나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경기를 뛰었을 때 느꼈던 같은 수준의 감정과 느낌을 다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몇몇 공격적인 선수들만틈 재능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고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돈이 필요하다.

이전에 내가 말한 축구 선수로서 벌었던 것에 100%에서 0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하면 일정한 수준의 수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본은 그대로지만, 선수로서 벌었던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벌 수는 없다. 네가 뭘 원하든 감소가 있고 이제는 평범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가 TV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인식하고 있고, 우리하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곳에 가고, 어떤 장소에 들어가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테이블로 와서 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유, 이 단어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나는 그 경기에 참여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이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선 활동을 하고 싶다. 나는 세계 시민이다. 나는 프랑스계 가나인이다. 내가 한 일은 가나에 투자하고, 약간의 단지와 스포츠 시설을 갖춘 Lizzy Sports Complex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스포츠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민간 차원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지역사회에 유용하고 이것이 가나에 대한 나의 약속이라고 믿는다. 1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고 아마 대략 300개의 일자리를 간접적으로 만들었는데, 나는 그것에 만족한다. 나는 내 아이들을 가나로 데려와서 아프리카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아버지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게 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단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인이기도 하다. 

https://thesefootballtimes.co/2019/12/04/marcel-desailly-talks-the-ac-milan-years-world-cup-glory-and-having-duncan-ferguson-tackle-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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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2-05 06:55:01

잘 읽었습니다. 자주 방문하는 페이지인데 드사이 글이 있었군요

2019-12-05 08:14:22

글 잘 읽었습니다.

2019-12-05 11:07:12

밀란의 레전드이자 존 테리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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