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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발락,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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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07 17:24:12
독일 축구의 '전설'로 기억되는 미카엘 발락.. 사실 우승경력도 제법 있지만 유독 국제무대 우승과는 인연이 없어 축구계의 대표적인 '2인자' 이미지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한데요.. 발락은 1976년생으로 축구를 처음 접했을 무렵은 독일이 분단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발락은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는 동독지역의 괴를리츠라는 작은 도시 출신이었죠..

그런데 당시 동독은 공산주의국가답게 스포츠 인재들을 메달이라는 '선전장치'를 확보하는데 용이한 배구, 핸드볼 등의 종목을 선택하도록 장려했고 동독이 강세를 보이지 못하는데다 세계최강 서독과 비교당하기도 딱 좋은 축구는 국가차원에서 상당히 홀대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발락의 부모님은 발락에게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키려고 했다는데 그러나 발락의 축구에 대한 열망을 끝내 막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켐니처 FC 팀에서 유소년 선수생활을 하던 중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동독지역의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홀대받을 일은 없어졌고, 이후 1995년 19세의 나이에 2부리그 소속이던 켐니처 FC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해 1997년도에는 1부리그의 1.FC 카이저슬라우턴으로 이적했고 곧바로 승격팀 우승신화의 일원이 됩니다. 당시 발락은 전반기까지는 후보선수였으나 후반기 들어 조금씩 출전기회를 잡기 시작했고 사실 첫 우승커리어는 바로 이 때 기록을 했죠.

분데스리가에서 우승을 했으니 차기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무대도 경험했고 또 이 1998/99시즌부터는 확고한 주전미드필더로도 자리를 잡습니다. 다만 당시 발락의 포지션은 3-5-2 포메이션에서 공격형미드필더를 받혀주는 중앙미드필더로서 대부분의 경기를 출전했고 또 가끔 쓰리백의 중앙.. 당시 리베로라는 개념이 잔존하던 시절 리베로 역할을 소화한 경기도 있는 것으로 기록 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인 시절에는 수비적으로 활용되던 선수라는 것이죠. 또 1999년 3월에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뒤 4월에 데뷔를 이루었고 또 당해 여름 컨페더레이스컵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은 이 컨페더레이션스컵에 1.5군 정도의 전력으로 나서 발락과 라스 리켄 등 일부 젋은선수들을 시험해보았는데 브라질에 0:4로 완패하고 미국에도 패배하는 등 그 결과는 좋지 못했었죠..

이후 바이엘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유로화가 등장하기 이전이라 독일의 경우 마르크화로 이적료가 오가던 때였습니다.. 당시 발락의 이적료는 520만마르크였는데 Transfemarkt에서 유로화로 환산한 이적료는 400만유로 선.. 당시 분데스리가 기준에서 큰 액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준척급 규모의 선수가 오가는 수준의 금액이었죠.

 

그리고 이 때부터 발락을 대표하는 등번호가 13번이 되었습니다. 카이저슬라우턴 시절에는 등번호가 3번이었죠. 아마 레버쿠젠에서 13번을 달게 된 경위는 남는번호였기 때문이었을텐데 그 것이 또 발락을 대표하는 번호가 되었습니다.. 대표팀에서도 원래는 남는 번호를 주로 달다가 유로 2000부터 본격적으로 13번을 달고 활약한 바 있죠. 당시 두 경기에 나섰고 마지막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디트마 하만과 함께 메메트 숄을 받혀주는 수비형미드필더로서 선발출전했는데 팀은 0:3으로 무기력하게 패퇴한 바 있었습니다. 세르지오 콘세이상이 해트트릭을 기록했었죠.

여기까지는 제가 직접 겪은 시대가 아닌 기록과 텍스트로 전해들은 바를 통해 서술한 신인시절의 이야기이고.. 2001/02시즌 발락이 스타로 급부상한 이 시즌부터가 제가 독일축구와 발락이라는 선수의 팬으로서 함께 겪어온 이야기입니다.. 레버쿠젠 이적 후 서서히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기 시작한 발락은 이 2001/02시즌 공격력이 제대로 만개하게 되는데 리그에서만 미드필더 포지션으로서 무려 17골을 기록했죠. 또 당시 포지션이 전문 공격형미드필더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플레이메이커로서는 일리다이 바스튀르크라는 터키 국적의 기술좋은 선수가 있었고 발락 역시 전술 상 공격적으로 운용되기는 했지만 팀 공격이 발락에 집중된 형태는 아니었죠.. 그럼에도 장기인 이선침투능력과 정확한 골결정력, 또 특유의 공중볼 강점까지 더해 분데스리가는 물론이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까지 가는 동안 6골을 폭발시켜 물오른 득점력을 뽐냈죠.

이 시즌의 결과는 잘 알려졌듯 트리플'러너업' 이었지만 레버쿠젠 팀이나 발락 개인이나 그 성과는 매우 빛났고 이 시즌이 한창이던 2001년 말에 바이에른 뮌헨이 2,800만마르크의 이적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발락의 영입을 확정짓기도 했죠. 또 잉글랜드에 1:5로 참패한 '뮌헨 참사' 이후 플레이오프까지 밀려 2002년 월드컵 본선진출까지 위협받으며 뒤슝슝하던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총 3골을 몰아넣으며 안드리 쉐브첸코의 첫 월드컵 꿈을 좌절시키면서 이 때부터 국내언론에서는 '녹슨 전차의 희망'이라며 발락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키기 시작했죠. 여기에 함께 묶이던 선수가 바로 1980년생 세바스찬 다이슬러였는데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펼쳐진 평가전에서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월드컵에 나오지 못했었습니다.

이어 열린 2002년 월드컵에서 독일 팀은 칸이 수비하고 발락이 공격하는 팀이었습니다. 물론 조별예선에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득점력이 빛났지만 토너먼트 이후 침묵한 반면, 발락은 8강전과 4강전에서 연달아 결승골을 책임지며 팀의 결승진출을 이끌었죠. 다만 우리와의 4강전에서 경기 막판 이천수의 돌파를 막는 과정에서 옐로카드를 받아 결승전에 나서지 못했고, 결국 독일 팀도 우승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사상 최초 조별예선 탈락까지 우려되었던 독일은 칸과 발락의 활약 속에 호성적을 냈고 뒤이어 바이에른 뮌헨의 소속으로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뒤를 이어 팀의 중심을 이끌 발락의 활약은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죠..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에서의 모습은 기대에 썩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적 첫 시즌인 2002/03시즌 충격의 조별예선 탈락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론이 나오기도 했고, 또 중심으로서 무게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끊이질 않았죠. 그런데 사실 단순한 기록으로 보자면 충분히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또 이름값을 뺴고 그냥 미드필더로만 본다면 그 활약도 충분히 괜찮았죠.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의 중심이라는 역할.. 또 발락이라는 선수에 대한 높아질대로 높아진 기대치에 비하면 아쉬웠고 특히 바이언이 2003/04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6강 진출에 그치며 발락은 비판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죠.

또 공격적인 역할을 원하는 선수 본인과 공수양면에서 밸런스 잡힌 역할을 원하는 구단 간의 입장 차도 있다보니 결국 2004년 발락은 팀을 떠나는 것을 생각하고 구단도 매각을 검토하고 나서게 됩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아름다운 축구'를 기조로 기술좋은 플레이메이커를 염원하던 바이언 구단 측에서는 2001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피오렌티나에서 마누엘 루이 코스타를 영입하려다 AC 밀란과의 영입전에서 밀려 실패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 시기 FC 포르투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데코를 영입하고자 나섰고 데코를 영입하는데로 발락의 매각에 본격적으로 나설 참이었죠.

실제 바르셀로나와는 현금+올레게르 등 다양한 조건으로 카드를 맞추기도 했고, 또 인터 밀란과도 이야기가 나오고 했었는데 당시 바이언이 도르트문트에서 토어스텐 프링스를 영입한 것 역시도 발락 이적 후 미드필더진의 재편을 위한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데코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해버리고 바이언은 발락을 잔류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이적은 없었던 일이 되었죠.

그렇게 다시금 바이언에서 맞이한 2004/05시즌은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부임하고 발락은 팀에 잔류한 대신 본인이 원했던 전문 공격형미드필더 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결과 최전방의 로이 마카이와 함께 공격의 중심으로서 활약하며 날개를 달았죠. 그런데 발락이 올라가니 허리를 받혀줄 선수가 마땅찮았습니다. 프링스는 홀로 포백을 보호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죠. 그래서 여러 옵션을 두고 고심하던 중 센터백 마틴 데미첼리스가 발락의 '보디가드'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특히 아스널을 뮌헨으로 불러들인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데미첼리스가 그야말로 아스널의 척추를 접어버리며 완승을 이끌어내기도 했죠. 이후 두 시즌 간 데미첼리스의 보좌 속에 발락은 공격형미드필더로서 우수한 활약을 이어가게 됩니다.

 

수비진에 루시오, 윌리 사뇰, 필리프 람, 미드필더진에서는 발락이 중심이 된 가운데 제 호베르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다이슬러, 또 공격진에 마카이가 활약하는 바이언은 독일 국내무대를 정복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두 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죠.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내무대에 국한되는 이야기였습니다. 2004/05시즌 8강전에서 첼시의 스피드에 혼비백산한데 이어 2005/06시즌에도 조별예선에서는 유벤투스와 좋은 승부를 펼쳤으나 16강전에서는 AC 밀란을 만나 산 시로 원정에서 1:4 대패.. 끝내 발락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옵니다. 당시 2006년 여름에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에서 바이언 측에서는 리그 최고연봉 600만유로까지 제시하였으나 발락은 조기에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공식화하게 되죠.

 

최초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접촉해왔지만 당시 맨유도 데이비드 베컴의 이탈과 이후의 리빌딩 과정에서 부침을 겪던 상황이었습니다. 발락은 이 팀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명분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고 훗날 회고한 바 있죠. 파트릭 비에이라와 에메르손이 버티던 유벤투스가 발락까지 품어 '에메이락' 라인을 형성하려 한다는 루머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첼시가 발락과 계약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이언에서의 4년 간 발락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트로피를 각 세번 씩이나 들어올렸지만 챔피언스리그는 8강 진출이 한 번, 나머지 두 번이 16강 진출, 또 한 번은 조별예선 탈락에 그쳤죠. 이 것이 발락이 바이언이라는 구단에 한계를 느낀 이유가 되었죠.

 

그 직후 발락은 2006년 월드컵이라는 또 한 번의 큰 무대에 나서게 됩니다. 2년 전 유로 2004에서 큰 실패를 겪은 바 있던 독일은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부임해 팀을 젋고 에너지틱한 팀으로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여전히 발락이었죠. 다만 바이언에서의 발락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두에도 언급되었듯 발락은 수비형미드필더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입니다. 공격능력이 특출나 자연스레 앞선으로 중심이 이동했지만은 수비도 잘 하는 선수죠.

 

그리고 클린스만 체제의 대표팀에서는 그 수비능력을 활용했습니다. 바이언에서 발락과 프링스가 공존했던 한 시즌 간 프링스는 많은 수비부담을 소화하지 못해 실패했죠. 그러나 대표팀에서는 둘이 나란히 4-4-2 '도펠젝스'(영어로는 'Double Six', 즉 등번호 6번으로 대표되는 포지션인 수비형미드필더 두 명을 중원에 배치하는 것)로 나서 발락이 중심이 되고 프링스가 보좌를 하는 가운데서도 발락이 수비적으로도 활약하며 프링스와 역할을 적절하게 분담합니다. 이는 두 선수 모두에게 시너지가 되었고 바이언에서와 달리 그 위력이 대단했죠. 이러한 모습을 본 팬들은 바이언에서도 이런 역할분담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 대회에서 독일대표팀은 4강전까지 진출해 유로 2004의 실패를 완벽하게 만회하는데 성공했고 발락의 활약 역시도 다시금 조명되었죠.

 

이후 바이언과 발락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된 2006/07시즌.. 우선 바이언은 발락 외에도 제 호베르투까지 이탈하고 데미첼리스는 부상에다 2006년 월드컵 엔트리 탈락여파로 얻은 마음의 병까지 겹치며 부진을 거듭하고, 다이슬러마저 다시금 부상으로 이탈하는 통에 루카스 포돌스키, 다니엘 반 부이텐, 마르크 반 보멜 정도를 영입한 수준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시오와 반 부이텐은 서로 호흡이 맞지않아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등 팀이 완전히 망가지며 끝내 차기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마저 획득하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프랑크 리베리, 루카 토니를 필두로 무려 7,000만유로 이상을 들여 선수를 대거 영입해 구단의 방향성을 바꾸어버렸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1~2년만 빨리 했더라도 발락 역시 더 오랜기간 이 팀의 일원으로서 활약했을 여지가 있었기에 아쉬움이 컸죠. '만약'이기는 해도 발락의 양 옆에서 리베리와 아르연 로벤이 공격을 펼친다..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첼시에 간 발락은 바이언 시절만큼 중원에서 큰 비중을 가져갈 수는 없었습니다. 첼시에는 이미 '미들라이커' 프랭크 램파드가 있었기 때문..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발락은 수비도 시키면 잘하는 선수입니다. 또 빅이어라는 대의를 가지고 이적한 첼시였기에 발락은 기꺼이 희생을 어느정도 감수하며 중원에서 힘을 보태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미드필더의 끊임없는 공수전환이 요구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발락의 기동성 약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또 분명한 클래스를 지닌 선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강점인 탄탄한 기본기와 신체능력 등을 앞세워 많이 극복했죠. 그러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4강전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승부차기 혈전 끝에 리버풀에 패배..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자신이 거절했던 맨유에 밀려 2위.. 콩의 기운이 스물스물 다가오게 됩니다.

 

뒤이은 2007/08시즌.. 발락은 전반기를 모조리 부상으로 날려먹었지만 후반기 복귀해 중원에서 힘을 보태며 팀은 4강전에서 리버풀과 또 다시 연장혈투를 거쳐 복수를 성공하고 결승전에 진출하게 됩니다. 상대는 같은 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자신이 거절했던 팀이었죠. 승부는 한 골도 나지 않은 채 승부차기로.. 발락은 사력을 다해 120분을 모두 소화했고 승부차기에도 두 번째 키커로 나서 슈팅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첼시의 다섯번 째 키커가 슈팅을 성공시키면 첼시가 우승하는 상황.. 그 키커는 바로 첼시의 '심장' 존 테리.. 아브람 그랜트 감독의 '대단한 선택'..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상황.. 그러나 모든 첼시선수들과 팬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간절했던 발락의 염원을 담아 테리가 디딤발을 놓던 그 순간.. 경기 내내 계속해서 내리던 비로 인해 너무나도 미끄러웠던 그라운드.. 그렇게 발락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순간이었죠..

 

그리고 그 충격이 제대로 가시지 않은 채 맞이한 유로 2008에서 독일대표팀은 이제는 우승후보로 거론되고 있었고 8강전과 4강전에서 포르투갈과 터키를 명승부 끝에 제압하고 결승진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발락은 결승전을 앞두고 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하던 상황.. 그러나 국제무대 우승이 간절했던 발락은 끝내 결승전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고 90분 간 풀타임 출전해 사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부상을 안고 뛴 발락의 활약은 좋지 못했고 팀도 시중일관 열세 속에 결국 페르난도 토레스에게 내어준 결승골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 그렇게 발락의 커리어에는 또 다시 국제무대 준우승이 추가되고 맙니다.

 

그 다음시즌 역시도 발락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2008/09시즌 시즌 중 아브람 그랜트 감독이 경질되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는 등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4강전까지 진출한 첼시..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누 캄프 원정을 무실점 무승부로 끝마친 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2차전을 치르게 됩니다. 경기 초반 마이클 에시앙이 선제골을 기록한 가운데 첼시의 유리한 경기가 이어지던 상황.. 그러나 경기의 주심이었던 톰 오브레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을 경기 내내 거듭합니다. 것도 첼시에게 불리한 판정만을 거듭하며 첼시의 쐐기골이 터질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버렸죠. 그럼에도 한 골을 잘 지켜 결승진출을 눈 앞에 둔 찰나.. 결국 후반 추가시간 안드레아스 이니에스타의 동점골이 터지며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첼시는 4강전에서 패퇴하고 맙니다. 당시 발락의 엄청난 울분이 담긴 항의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분노와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지금까지도 화자되는 장면이죠..

 

뒤이은 2009/10시즌에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과 함께 하며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조세 무리뉴의 인터 밀란에 패퇴.. 또 FA컵 결승전에서 케빈-프린스 보아텡에게 당한 태클로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2010년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또 하나의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더구나 독일대표팀은 이를 계기로 슈바인슈타이거와 자미 케디라로 새로운 허리를 구축해 비록 4강전에서 스페인에 패퇴했지만 큰 성과를 일구어내는데 성공.. 독일의 요아힘 뢰브 감독은 팀을 빠르고 에너지틱한 속공축구로 개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팀의 색깔과 맞지 않게 된 발락을 월드컵 이후 배제하게 되었죠. 이후 발락은 1년 간 더 대표팀에 대한 희망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뢰브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2011년 은퇴를 선언.. 대표팀 출전경력을 98회에서 마감하며 센추리클럽 가입을 이루지 못했죠.

 

또 첼시에서도 퇴단을 하게 됩니다. 최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첼시에 잔류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본인은 2년의 다년계약을 원했던 반면, 첼시는 구단 방침 상 1년 계약 만을 제시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친정팀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복귀해 두 시즌을 활약하였는데 어느정도 힘을 보태기는 했지만 부상으로 고전하는 기간이 길어지게 되고, 끝내 레버쿠젠과의 2년 계약을 채운 뒤 2012년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죠. 그렇게 커리어 동안 들어올린 트로피는 분데스리가 우승 4회, 프리미어리그 우승 1회, DFB-포칼 우승 3회, FA컵 우승 1회.. 이 외의 각종 슈퍼컵 트로피들과 독일 올 해의 선수상 3회까지.. 그러나 모든 것이 국내무대 트로피였고 끝내 챔피언스리그나 월드컵, 유로와 같은 국제무대 트로피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는 점.. 이 것이 팬들에게 '만년 2인자'로 화자되는 이유이면서 또 선수 본인에게도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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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20-04-01 22:10:05

몇번이나 코앞에서 놓치는 준우승 일대기에 읽는내내 안타까움이 멈추지않았습니다...

정말 너무 좋아했던 선수
저한테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기준은 언제나 발락과 제라드...

2020-04-01 22:11:44

러너업당시 레버쿠젠 멤버들이 스타는아니었어도 준수한 선수들은 꽤됬죠. 바스튀르크도 나쁘진않았지만 02 이후에는 거진 베른트 슈나이더가 중원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을겁니다.. 노이빌레나 외르그부트도 좋은선수였지만 슈나이더가 가장 좋았던선수죠. 라멜로프같은 한물같지만 그래도 국대자리 차지하던 이도 있었고..

그건그렇고 다이슬러는 '비운의천재'로 묶이긴하는데요.. 저때 다이슬러보다는 제기억으론 노보트니에게 거는 기대가 훨씬 더 컸을겁니다. 다이슬러야 발락, 슈나이더, 옌스예레미스같은 선수들이 있어서 '아쉽다'정도였지 노보트니가 02월드컵앞두고 십자인대 부상당했을건데 이건 정말로 치명타였거든요..

이후 완전히 유리몸화된걸 생각하면 커리어사상 보여준건 다이슬러보다 노보트니가 훨씬 아쉽죠..... 좀 오바하면 네스타처럼 수비하던 독일선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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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01 22:28:34

노보트니가 엄청난 선수였고, 또 독일 대표팀 전력 악화에 있어서 노보트니가 장기 부상으로 아웃된 여파가 컸던 건 맞지만(어쨌건 다이슬러 롤은 발락-프링스-슈나이더가 분담할 수 있었으니까요) 독일에서 천재 소리 들었고 또 전국적인 기대를 모았던 게 다이슬러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비단 독일만이 아니라 전유럽에서 그런 평가를 들었어요. 노보트니는 이미 2002년에 만 27세였습니다. 노보트니의 위상은 잠머처럼 한창 때 부상으로 일찍 저문 대형 수비수 이미지이지 천재 이미지는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그 때 독일 살았었는데 당시 독일 잡지들이 외국 감독들 만나면 항상 물어보는 게 다이슬러였습니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카펠로랑 인터뷰할 때도 다이슬러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말이죠. 유난스러울 정도로 말이죠. 그 때가 독일이 암흑기였다 보니 더더욱 다이슬러에게 기대는 게 강했습니다. 발락은 다이슬러에 대해 물어볼 때 세트처럼 물어봤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이드킥에 가까운 이미지였죠.

독일 축구 역사상 다이슬러보다 더 뛰어난 천재들은 많았다고 저 개인적으로도 생각합니다만 어린 시절 다이슬러만큼 전국민적인 기대감을 받은 선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로 2000의 실패로 인한 박탈감 때문에 더더욱... 괜히 다이슬러가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연속적으로 부상 당하면서 우울증에 시달린 게 아니라는... 뭐 어쨌건 다이슬러가 부상으로 훅가면서 발락이 더 많이 클 수 있었던 게 있긴 했죠.


2020-04-01 22:58:34

옛날축구 이야기하게되서 더 반갑네요.
노보트니는 이미 말씀하신거처럼 나이가 좀 있었었죠. 아마 앞단락에 적은 비운의천재 카테고리로 엮었다는거때문에 헷갈리신거같은데 노보트니에 대해 거는 기대는 02 wc 앞둔 시점에서 다이슬러보다 더 컸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지 노보트니 아웃될 시점에 독일 수비는 라멜로프, 뵈른스같은 진짜 한물갔다해도 무방한 느린선수들 뿐 이었잖아요. 기대감자체가 이미 다이슬러는 아웃ㅇㅣ 정해진 상태에서 노보트니와는 달랐다는 이야기로 알아주셨으면합니다. 당시 독일사셧다면 저보다 독일분위기는 더 잘아실테니까요.

OP
2020-04-02 10:19:08

노보트니의 이탈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죠. 당시 독일수비수 중 유일하게 월드클래스에 비빌 수 있는 선수였으니.. 또 바이언에서 오랜 기간 노렸고 맨유 같은 팀에서도 오퍼를 받았지만 레버쿠젠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던 선수이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뵈른스도 대회엔트리에는 들었지만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나왔고 센터백 중 그래도 스피드를 갖춘 선수였던 마르코 레머까지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면서 라멜로프가 어쩔 수 없이 센터백으로 나와서 호러쇼 펼치고, 이 외에 토마스 링케하고 이런 선수들로 버티다가 그나마 크리스토프 메첼더가 토너먼트 이후로 기대 이상의 활약 해주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죠.. 근본적으로는 올리버 칸이 모든걸 다 막아서 결승까지 갈 수 있었지만요.

2020-04-01 22:17:14

한때 젤 좋아하던 선수
발락때문에 제2의 조국은 독일이다
하면서 위닝하곤했는데

2인자보단 준우승러가 더 잘어울리지않을지 ㅋㅋ

2020-04-01 22:20:27

선추천 후감상..ㅎㅎ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발락이 제 기억에 유로2000때에도 출전은 했던 걸로 기억나네요. 주전은 아니고 유망주로 교체로 나왔던가 그랬음.. 그때만 해도 발락이 포지션도 수미였고 뭐 암튼 2002월드컵의 그 조율과 한방의 발락이 될 줄은 몰랐는데..ㅎㅎ

OP
2020-04-02 10:27:37

맞습니다. 본문에도 살짝 언급을 했는데 조별예선 세 경기 중 잉글랜드전 교체출전, 포르투갈전에 선발출전한 것으로 기록이 있습니다..

1
2020-04-01 22:23:14

전 개인적으로 제라드보다 높게 평가합니다.

2020-04-01 22:34:02

22222

저더

2020-04-01 22:29:31

진짜 독일축구 암흑기에 발락없었음 그때 그 성적도 못 올렸을겁니다.

전성기 진짜 한 몸으로 지탱했는데, 본인이 버티고나서 은퇴할때쯤 독일이 다시 강해지는거 보면 약간 운 때를 잘못타고 난 선수같음...ㅠ

2020-04-01 22:30:40

콩락...ㅜㅜ

2020-04-01 22:40:30

이짤 처음에 만들어졌을때 마지막에 유로 준우승(예정) 이었었죠. 근데 진짜 그렇게됨ㅋㅋㅋ

2020-04-01 22:34:53

발락형님 02월드컵 때 칸이랑 하드캐리하던 모습 잊혀지지가 않네여 

 

1
2020-04-01 22:44:10

독일 관련해서 대체 얼마나 조예가 깊으신겁니까 ㄷㄷㄷ

존경스럽습니다 

2020-04-01 22:44:26

2002년 당시 칸과 더불어서 너무 좋아했던 선수인데..ㅠㅠ
읽는 내내 아쉬웠네요ㅠㅠ
정말 높은 클래스의 선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만큼의 보상을(트로피) 못 얻은 불운의 아이콘 같더라구요

OP
Updated at 2020-04-02 10:35:21

제 기억으로 라멜로프는 전형적인 수비형미드필더로 2002년 월드컵에서는 팀 사정때문에 센터백으로 나올 정도로 수비에 특화된 자원이었고 발락보다 바스튀르크가 정통 넘버10 스타일의 선수라 한층 더 윗선에 배치되고 좌우에 슈나이더, 제 호베르투가 주로 활약하고 발락은 2.5선 정도의 위치에서 조율보다는 적극적으로 이선침투로 직접적인 득점가담하는 비중이 높았던걸로 기억이 됩니다..

또 수비진에 쓰리백으로 루시오, 노보트니, 디에고 플라센테를 배치하고 최전방에는 울프 키어스텐,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올리버 뇌빌, 토마스 브르다리치 이런 선수들이 돌아가며 나오면서 3-5-2 포메이션을 주축으로 했고 또 미드필더 자원이 두터운 것을 활용해 상황에 따라서는 3-6-1 포메이션까지도 운용하다가 노보트니의 부상 이후 포백으로 전환했던걸로 기억이 나네요..

2020-04-02 14:03:49

저도 Bill님 의견에 동의하는게 당시에 공격형미드필더들이 워낙 많이 쓰였던 시기라서 글쓴분이 플레이메이킹을 전통 10번으로 이해하는게아닐까싶네요. 1.5선 공미들이 엄청 많이 존재하던시기라 플레이스타일과 관계없이 1.5선공미=플메 이런 생각들이 많을때였던터라서..

바쉬튀르크는 제 기억에도 패싱게임보단 침투나 속공에 특화된 선수였던거로 기억나서..ㅋㅋ

2020-04-01 23:07:29

나 결승 올라가서 준우승해야한다고!

2020-04-01 23:23:10

미카엘인가요 미하엘인가요

2020-04-01 23:48:07
2020-04-01 23:58:1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미카엘보다는 미하엘이 좀 더 독일어 발음에 가깝지 않나 싶네요.

2020-04-02 01:57:03

 라리가에 갔으면 어땠을지 궁금

2020-04-02 08:28:26

02년 월드컵 직전 당시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던 미드필더는 다이슬러나 발락, 노보트니 외에도 메멧 숄이 있었죠. 숄이 월드컵 앞두고 장기부상 끊었다는 소식에 독일의 월드컵 우승 가능성이 급락했던 기억 나네요..

OP
2020-04-02 10:41:07

당시 수비진에서 노보트니, 마르쿠스 바벨, 미드필더에서는 다이슬러, 숄, 공격진에서도 알렉산더 치클러 등이 이탈하고 뵈른스, 레머, 리켄 같은 선수들도 대회 엔트리에는 들었지만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전력누수가 상당했었죠.. 특히 숄은 당시 독일의 플레이메이커 중에서는 가장 수준이 높던 선수라 수비진에서는 노보트니, 공격진에서는 숄의 이탈이 가장 뼈아팠죠.

OP
2020-04-02 10:44:31

2002년 월드컵의 부상악재하면 또 생각나는게 엄청난 전력이탈 속에서 신기하게도 유리몸하면 알아주던 좌측윙백 크리스티안 치게는 정상적으로 참가해서 웬 이상한 닭벼슬 머리를 하고 왼쪽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날려댔었죠.. 이 선수가 당시 토트넘 소속이었는데 월드컵 이후 한동안 토트넘에서도 맹활약을 하나 싶더니 얼마 안있어 어김없이 부상소식이 들려오고 끝내 은퇴할 때까지 부상에 신음했었죠..

2020-04-02 14:00:02

지게는 토트넘에서도 욕 엄청 먹었습니다ㅋㅋㅋ 유리몸이라 리버풀에서도 이름값대비 기대만큼 해주진못했지만 토트넘에서는 완연히 하락세였죠.. 지게는 수비력도 꽝이라 당시 구시대윙백의 전형취급받았죠.. 그나마 감독이 3백변태 글렌호들이라 어느정도 끌고간것도 있고..

반대사이드가 대런 앤더튼이었는데 앤더튼이 준족에 공수모두 성실하게 해주는선수였는데 이거랑 비교된것드 크고.. 거기다 앤더튼은 본포지션이 윙어임에도 불구하고요..ㅋㅋ 욕을 바가지로먹는 완벽한 환경이었죠..ㅎㅎㅎ

사족으로 토트넘이 당시엔 전성기지난 베테랑들이 주축이었죠.. 지게도 그중하나고.. 셰링엄이나 레스 퍼디난드, 거스포옛, 팀 플라워, 팀 셰어우드같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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