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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칸,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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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11 08:41:59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약 10여년 간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가장 이름 값이 높은 선수였던 올리버 칸.. 또 동 시기 독일축구와 바이에른 뮌헨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었는데요.. 칸은 1969년생.. 독일 남서부 바템뷔르크 주의 대도시 칼스루에 출신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팀 칼스루에 SC에서 1987년도에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됩니다. 또 자신의 아버지와 친형도 칼스루에 SC에서 선수로서 활약한 전력이 있는데 골키퍼였던 자신과 달리 아버지와 형은 미드필더로서 아버지 롤프 칸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 간, 또 네 살 터울의 형 아셀 칸은 1986년도에 프로무대에 데뷔했으나 1년 만에 방출된 뒤 은퇴한 전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칸이 칼스루에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것은 1990/91시즌.. 시즌 중 주전으로 올라선 칸은 동 시즌 Kicker의 분데스리가 1부리그 골키퍼 평점순위 4위에 랭크되며 젋은골키퍼로서 기량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1993/94시즌에는 전체 평점순위 1위에 랭크되는 맹활약을 펼치며 1994년도에 460만마르크.. Transfermarkt에서 유로화로 환산한 액수는 230만유로라는 이적료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이 것은 아마 당대 독일골키퍼 중 최고이적료.. 또 역대 분데스리가 골키퍼 중에서도 최고이적료였을겁니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라이몬드 아우만이라는 단신골키퍼가 골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이가 골키퍼로서는 크게 많지 않은 막 30줄을 넘어선 시점이었고, 당대 활약도 괜찮았음에도 아우만을 터키로 이적시키고 칸을 영입해 수문장을 교체했죠.

 

이후 칸은 1990년대 꾸준히 바이에른 뮌헨의 골문을 지키며 활약했지만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우선 칸이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것은 1994년 월드컵.. 그러나 당시 보도 일그너가 주전으로, 또 안드레아스 쾨프케가 서브였고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던 칸은 써드 신분이었죠. 유로 96에서 처음 국제무대 우승을 경험했지만 역시 쾨프케에 이은 서브골키퍼로 벤치신세.. 1998년 월드컵까지도 마찬가지였고 이후에 쾨프케가 국가대표를 은퇴하면서 칸은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드디어 국가대표팀에서 주전수문장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물론 일그너나 쾨프케나 당대 그 실력을 인정받는 선수들이었던데다가 당시 독일축구계, 그리고 베르디 포크츠 감독의 보수적인 성향까지 더해져 칸이 대표팀의 주전으로 올라서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죠.

 

이후부터가 칸이 국제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입니다. 1998/99시즌 '캄프 누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주전골키퍼로서 활약했고, 또 대표팀에서도 입지를 다지며 유로 2000에서는 조별예선 세 경기에 모두 출전, 그 중 두 경기에서는 주장으로서도 활약했죠. 팀은 1무 2패로 탈락했습니다만.. 또 기존의 주장이었던 올리버 비어호프의 입지가 2001년 경부터 좁아지기 시작하자 칸이 본격적으로 대표팀의 주장을 역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2000/01시즌에는 드디어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영광을 차지하였는데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벽은 그야말로 '철의 장벽'이라고 부를만 했습니다. 스웨덴 국적의 '완성형 센터백' 패트릭 안데르손이 중심을 잡고 사무엘 쿠포르와 토마스 링케가 그 양 옆에 포진된 쓰리백을 필두로 '독일판 미친 개' 옌스 예레미스가 그 앞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하고, 윌리 사뇰과 빅상트 리자라쥐가 측면을 틀어막은데다 이 것을 뜷어도 칸이 버티고 있었죠.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결승전까지 16경기에서 11실점 만을 허용했고 특히 8강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또 4강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총 4전 4승으로 격파하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었습니다. 이후 결승전에서는 발렌시아를 만나 양 팀의 키커가 7명 씩이나 나오는 긴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는데 발렌시아 측의 슈팅 7개가 모두 골문 안으로 향했지만 칸이 그 중에서 3개를 막아냈고 특히 마지막에 마우리시오 페예그리노의 슈팅을 막아내며 '끝내기 선방'까지 기록하기도 했죠.

 

저는 그 시기를 실제 겪지는 못했고 후일 전해지는 바와 또 여러 영상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접했었는데요.. 특히 8강전과 4강전이 칸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바이에른 뮌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경기로서 상대는 바이언의 골문을 마구 공략하지만 단단한 결계에 부딫혀 애간장이 타고, 반면 뮌헨은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중원에서 기세를 유지하다가 메메트 숄과 같은 선수들에게 공격기회가 찾아오면 최전방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벼락같이 골을 성공시킵니다. 그런 축구로 당시 자신들과 함께 소위 '3M'을 이루었던 양 팀을 4전 4승으로 격파했고 여기에 강한 매력을 느껴 바이언의 팬이 된 올드 팬들이 국내에도 제법 있죠. 또 어떻게 보면 이 것이 올드팬들의 펩 과르디올라에 대한 불호의 이유 중 하나로서도 볼 수가 있겠는데요.. 당시 챔피언스리그 우승 과정을 담은 약 90여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십수년 전에 국내의 바이언 팬들 사이에서 공유되었고 저도 여러 차례 돌려봤었는데 아직도 자료를 구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뒤이은 2002년 월드컵은 칸의 이름을 그야말로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완벽하게 알린 대회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안그래도 국내언론에서 '녹슨 전차' 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주축들의 노쇠화와 더딘 세대교체로 힘이 빠져 있었는데 월드컵을 앞두고 각 포지션에서 전력누수도 상당했죠. 특히 수비진에서 핵심 옌스 노보트니가 이탈한데다가 마르쿠스 바벨도 리버풀 이적 이후 장기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했고, 또 주전급 선수들이던 마르코 레머, 크리스티안 뵈른스는 월드컵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경기 출전이 불가능했던 상황.. 루디 푈러 감독은 수비형미드필더 카르스텐 라멜로프를 센터백으로 운용하는 등 남은 자원들로 어떻게든 수비진을 꾸렸지만 상황은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조별예선 첫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압살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두 번째 경기 아일랜드 전부터 수비진의 호러쇼가 시작됩니다. 대미언 더프와 로비 킨을 주축으로 한 아일랜드의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에 독일수비진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하며 무수한 기회를 내주었고 그 경기력은 사실은 0:5 대참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 그런데 독일의 골문에는 칸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정말 모든걸 다 막아냅니다. 그야말로 월드컵 90년 사에서 단일경기 중 가장 위대한 골키퍼의 활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렇게 후반 막바지까지 기적에 가까운 무실점 행진.. 그 사이 독일은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머리에서 한 골이 터져 리드를 잡아나갔으나 끝내 장신공격수 니얼 퀸의 대추떨구기에 이은 로비 킨의 쇄도 후 슈팅이 사각에 정확하게 꽃히며 결과는 1:1 무승부.. 이 실점을 허용한 뒤 칸의 표정과 제스처는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었죠..

 

뒤이어 '16강 진출 결정전'이었던 카메룬과의 경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일랜드보다는 무뎠지만 그래도 사무엘 에토오와 패트릭 음보마를 축으로 한 카메룬의 빠른 공격에 독일수비진은 역시나 많은 기회를 허용했지만 칸은 무실점으로 경기를 끝냈죠. 이후 16강 파라과이전은 '대회에서 가장 지루한 경기'로 손꼽혔기에 칸도 한 숨을 돌렸지만 8강 미국과의 경기부터는 다시 빡겜이 시작됩니다. 그나마 포백으로 전환하고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기용하기 시작하면서 수비진이 조금 안정된 것이 다행이었죠. 그래도 4강 우리나라와의 경기.. 이 경기가 또 국내 팬들에게 대단한 충격으로 남았을겁니다. 물론 칸이라는 선수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이고 대회에서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것은 국내 팬들도 많이들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그 활약상은 가히 충격적이었죠. 당시 이천수가 독일의 골문을 계속해서 위협했는데 칸이 또 모조리 막아냈습니다. 경기 초반 사각을 제대로 노린 슈팅을 동물같은 반사신경으로 막아내는 장면도 있었고, 또 왼쪽에서 올라간 까다로운 크로스를 그대로 쳐내면 뒤따라오던 안정환에게 세컨볼 찬스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그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캐치하고 공을 앞이 아닌 뒤로 쳐내 코너아웃을 만들어버리는 장면은 경기를 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었죠. 그렇게 우리와의 4강전에서도 무실점.. 총 6경기 1실점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이어가게 됩니다. 당시 그 경기의임펙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한 동안 동네축구에서 골키퍼 잘 하는 친구를 올리버 칸에 비유하곤 했었죠..

 

그리고 브라질과의 결승전.. 안그래도 전력 차가 크다는 평가였는데 거기에 에이스 미카엘 발락마저 결장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 그렇지만 브라질의 공세를 잘 막아내며 후반 중반까지 경기는 0:0으로 이어집니다. 칸의 선방이 이어지고 또 독일의 강점이던 고공전에서 한 골이 터지거나 독일이 강세를 보이는 승부차기까지만 끌고 간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그런데 여기서 그만 칸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히바우두의 중거리슈팅이 정면으로 날라왔고 충분히 잡을 수가 있었으나 바로 앞에서 예상치 못한 바운드가 튀어버리는 바람에 그만 놓쳐버렸고 그 것을 쇄도하던 호나우두가 득점으로 연결시킨 것.. 이후 호나우두가 한 골을 더 성공시켜 0:2로 패배, 준우승에 그쳤고 칸은 대회를 7경기 3실점이라는 성적으로 끝마쳤죠. 그러나 이 대회의 골든볼은 8골을 넣은 호나우두가 아닌 칸에게 돌아갔습니다. 야신상이 덤으로 딸려온 것은 물론이었죠. 그 만큼 이 대회에서 칸의 활약은 월드컵 90년 사를 통틀어서도 골키퍼로서 가장 위대한 활약이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 월드컵 역사에 남을 활약은 어떻게 보면 칸의 최고점이었습니다. 이후 30대 중반에 들어선 칸의 기량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칸은 체구가 두껍고 밸런스가 좋아 문전 내 혼전상황이나 공중볼 처리에도 강점이 있었고, 또 카리스마가 있고 판단력이 좋아 박스장악력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반사신경이 최고의 자산이던 선수였는데 이 것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둔화되기 시작한 것이었죠. 게다가 이 시기 불륜스캔들까지 터지며 심리적으로도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실 바이언은 그 시절 FC 헐리우드라고 불릴 정도로 팀 내 사건이 끊이질 않던 팀이었습니다. 로타 마테우스, 에펜베르크, 리자라쥐 등 한성깔 하는 무서운 형님들이 여럿 포진하고 있었고 훈련하다가 치고 박고 하는 것이 일상이었죠. 그래도 이런 일들은 경기 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불륜스캔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습니다..

 

또 칸은 갖가지 기행으로도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문전혼전상황에서 상대선수와 조그만한 충돌이라도 있다 치면 시비가 붙는 것은 다반사였고 1990년대 후반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는 상대공격수 하이코 헤어리히의 귀를 물어뜯으려 한데 이어 마찬가지로 상대공격수였던 슈테판 사퓌자를 발로 걷어차버리는 일도 있었죠. 또 비슷한 시기 한 경기에서 셋피스 공격에 나섰다가 그만 손으로 골을 넣는 바람에 퇴장을 당했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것도 얼떨결에 손에 맞은게 아니라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정확하게 펀칭하듯 공을 상대골문으로 집어넣어버렸죠. 칸의 공식적인 별명은 '타이탄' 인데 큰 등빨과 강력한 카리스마 덕에 붙은 별명입니다만.. 특유의 성깔과 기행 등으로 안티 팬들도 만만찮은 인물이었고 그런 안티 팬들은 칸을 '고릴라'라고 부르며 심한 경우에는 경기장에 바나나까지 투척하기도 했었죠..

 

여기에 또 한 가지 일화로 스캔들과 하락세 등으로 슬럼프를 겪을 2003~04년 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할 기회가 있었다고 본인이 직접 회고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맨유는 파비앙 바르테즈에 대한 인내심을 잃고 로이 캐롤 등을 대안으로 운용해보았으나 만족스럽지 않자 새로운 골키퍼를 찾던 차였죠. 당시 이적이 성사되었다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어 더 좋은 활약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맨유는 팀 하워드를 영입했으나 또 실패로 이어지는 등 에드윈 반 데 사르를 영입할 때까지 골키퍼 문제로 고생을 했었죠.

 

또 바이언은 당시 미카엘 렌징이라는 유망주가 한창 기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1984년생으로 소속팀에서 백업 신분임에도 독일 U-21 대표팀에서는 주전골키퍼로 활약했고 또 간혹 칸이 결장하게 되어 주전으로 출전할 때마다 활약이 나쁘지 않았죠. 칸이 이적하거나 은퇴할 때를 대비해 이 선수를 차기 넘버 원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원채 길어진 탓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릇에 한계가 있는 선수였는지.. 2008년 주전으로 올라선 뒤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죠. 사실 제 생각에는 후자입니다. 애초에 선방능력은 제법 갖춘 선수였지만 안정성도 부족하고 또 박스장악력도 좋지 않고 부족한 점도 많은 어찌보면 전형적인 하위권 팀에 어울리는 골키퍼였습니다. 그래서 바이언을 떠난 뒤 쾰른에서 잠시 반짝했었는데 그 마저 오래가지는 못했었죠. 지금은 독일 1부리그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백업골키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칸이 아닌 옌스 레만을 대표팀의 주전골키퍼로서 낙점한 것.. 당시 클린스만은 칸 뿐만 아니라 레만, 티모 힐데브란트 등 다양한 골키퍼들을 실험해왔고 레만이 가장 기량이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죠. 당시 칸의 이름값과 영향력이 대단했기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 자체에는 대부분 납득을 했죠. 칸은 한창 하락세라는 평가였고, 반면 레만은 칸과 같은 나이임에도 아스널에서 한창 물이 오른 기량을 과시하던 시기이기 때문.. 레만은 1990년대 후반 샬케 04의 주전골키퍼로서 활약하며 대표팀의 일원이 되었지만 이후 칸의 그늘에 가려진 넘버 투로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는데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어버렸죠.

 

또 칸 못지 않게 레만도 제대로 한성깔 하는 선수였기에 둘의 사이가 안좋다는 이야기가 월드컵 시기까지 나왔습니다만..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승부차기를 앞두고 칸이 레만의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고, 또 칸이 3,4위전에서는 풀타임을 소화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기도 하면서 그 마지막은 아름답게 끝이 났죠. 또 레만은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클린스만의 선택 역시 옯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게 칸은 대회가 끝난 뒤 86경기 출전을 끝으로 국가대표 커리어를 내려놓게 되죠.

 

이후 두 시즌을 더 활약한 뒤 2008년 39세의 나이에 마이스터와 DFB-포칼을 하나 더 추가하며 커리어를 끝마치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선수생활 간에 쌓아올린 커리어는 분데스리가 우승 8회, DFB-포칼 우승 6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UEFA컵 우승 1회, 유로 우승 1회.. 또 개인수상경력으로서 독일 올해의 선수 상 1회와 월드컵 골든볼과 야신상.. 그 커리어 역시 세계 최고의 골키퍼이자 축구 역사에 남을 골키퍼로서 나름 손색이 없었죠.

 

더불어 칸은 그라운드에서의 야수적인 이미지와 달리 축구계의 대표 인텔리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선수시절 통신대학을 통해 경제학을 공부한 바 있는데 당시에는 학부 수준에 그쳤고,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스포츠경영학 석사 과정을 이수하며 소위 말하는 MBA를 취득하는 학구열을 보였죠. 또 말솜씨가 좋아 독일 국영방송 ZDF에서 축구 해설위원으로도 꾸준히 활동을 했었는데 주식과 증권에도 조예가 깊어 이 쪽 프로그램에도 몇 차례 전문가로서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인물이다보니 자연스레 현장보다는 프런트 쪽으로 진로가 이어졌는데요.. 2020년 1월 1일 부로 바이에른 뮌헨의 이사로 취임했고 경험을 쌓은 뒤 2022년 1월 1일부터는 칼-하인쯔 루메니게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와 이사회의장 직을 맡는 것으로 내정이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올 초 이사로 취임한 뒤에는 하산 살리하미지치 단장 등과 함께 여러 협상의 전면에 나서고 있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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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4-11 09:09:53

jens mustermann

2020-04-11 09:12:28

결승전 당시에 손가락 골절이 있었다던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네요. 여튼 02년 칸 퍼포먼스는 진짜 충격. 아일랜드전 보고 진짜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납니다.

2020-04-11 09:29:48

두유노우두유

2020-04-11 10:23:33

제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던 골키퍼

2020-04-11 11:03:50

아일랜드전 ㄹㅇ 방탄키퍼
로비킨 골도 칸 맞은다음 골대맞고 들어갔던거같음

2020-04-11 11:33:49

02년 월드컵이 초등 저학년때였는데 아직도 칸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는걸 보니 임팩트가 어마무시하긴 했네요 ㅋㅋ

2020-04-11 13:40:55

이천수 슛 막고 잘하는 키퍼라 생각했음 ㅋㅋㅋ

2020-04-11 15:13:12

02년도 칸의 활약은 경이적이었죠. 저도 보면서 저딴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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