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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프 클로제,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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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5-23 23:49:35

오랜 기간 독일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명성을 떨쳐왔던 미로슬라프 클로제.. 월드컵 통산 16골로 역대 월드컵 최다득점자라는 위대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국내의 연배가 좀 있는 축구팬들에게는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깜짝활약을 통해서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고, 또 말년에는 라치오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세리에 A 팬들에게도 많은 기억을 남긴 인물인데요.. 그 커리어를 쭉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978년생인 클로제는 폴란드 남서부지역에 위치한 도시 오폴레 출신으로 이 지역은 1700년대부터 약 200여년 간 프로이센 공국과 독일 공화국의 영토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 할양된 역사로 인해 독일계 주민들이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클로제의 아버지인 요제프 클로제 또한 그러한 배경이 있는 인물로 폴란드 국적의 축구선수로서 활약했고 또 1980년대 초반에는 프랑스 1부리그에 진출해 활약한 적도 있는 공격수였는데요.. 또 어머니는 핸드볼 선수 출신으로 클로제의 운동신경.. 특히 그 어마어마한 점프력은 부모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1987년 클로제가 9살이 되던 해 가족이 독일로 이민을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축구를 접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다만 유소년 시절부터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8년 스무살이 되던 해까지 클로제가 몸담았던 팀은 7부리그 소속의 블라우바흐 디델코프라는 구단이었습니다. 사실 10대 초반, 중반의 나이까지 하부리그의 유소년 팀에 몸담고 있다가 상위리그 구단의 유소년 팀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막 성인이 된 시기까지 7부리그에 머물렀던 선수가 프로무대에 데뷔하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사실은 클로제의 부모님도 이 즈음 아들이 축구선수로는 먹고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목수 일을 배울 것을 권했고 목수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1998년에는 3부리그 소속의 홈부르크로 이적하게 되는데 클로제가 주로 활약한 무대는 3부리그가 아닌 홈부르크 2군 팀이 소속된 5부리그였습니다. 시즌 중 1군으로 콜업되기도 했지만 그 활약은 썩 좋다고 보기 힘들었죠. 실제 1998/99시즌 3부리그 무대에서 10경기에 나서 1골 밖에 넣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즌 후 그 잠재력을 인정한 1.FC 카이저슬라우턴에서 클로제를 영입합니다. 물론 주 활동무대는 2군팀이 소속된 3부리그.. 2008년부터 독일 3부리그가 20개 팀이 경쟁하는 세미프로리그로 승격했지만 당시에는 지역 별 아마추어리그 개념으로 3부리그가 5개 지역리그로 나뉘어져 총 90~100개 팀이 소속된 시스템이었습니다. 지금의 3부리그보다는 경쟁력이 많이 떨어지는 무대였다는 것이죠. 물론 지난 2년 간 7부리그와 5부리그를 거친 클로제의 입장에서는 큰 무대였지만 사실 막 스무살을 넘어선 선수가 아직도 이런 무대에 머물렀다는 것은 사실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저슬라우턴 2군에서의 활약이 꽤 괜찮았습니다. 팀의 주포로서 활약했고 그 결과 1군의 부름을 받아 1999/00시즌 중 분데스리가 1부리그에 데뷔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7부리거 출신 성공신화의 서막이 열린 셈이었죠. 물론 시즌 막바지 체험학습 수준으로 몇 분 뛴 것에 불과해 별 다른 임펙트는 심어주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듬 해인 2000/01시즌 드디어 클로제가 큰 도약을 맞이하게 되죠. 당시 카이저슬라우턴에는 올라프 마샬이라는 주포가 있었습니다. 1997/98시즌 팀이 전설적인 승격시즌 마이스터 신화를 일구어냈을 당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오랜 기간 활약해왔던 선수인데 이 선수가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로 향하면서 기량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백을 대체하고자 체코 국가대표 신분의 장신공격수 브라티슬라프 로크벤치를 영입했지만 짝을 이룰 공격수 역시 마땅찮았던 상황.. 그 자리를 당시 팀을 지휘하던 오토 레하겔 감독이 클로제에게 맡기기 시작했죠.

 

개막 후 얼마 되지 않아 레하겔 감독이 물러나고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신임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클로제의 입지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결국 한 시즌을 주전으로 소화하며 유리 조르카예프나 마리오 바슬러 등 화려한 이름값의 노장선수들의 지원사격을 받아 9골을 기록했고 2001년 3월에는 드디어 독일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게 되죠. 사실 그 전에 폴란드 축구협회 쪽에서 사람이 찾아와 클로제에게 폴란드 국가대표로 뛸 것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제안을 수락했다면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가 올리사데베와 클로제의 투톱을 상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인데요.. 물론 그렇다면 클로제의 위대한 국가대표 커리어가 크게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컸겠죠. 그런데 또 국가대표 데뷔전이 대단했습니다. 중요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약체 알바니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후반 막바지까지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고전하던 상황.. 뒤늦게 교체투입된 클로제가 경기 종료 5분 여를 남겨두고 자신의 장기인 헤딩으로서 결승골을 작렬,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죠. 더구나 며칠 뒤 그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도 후반 교체투입 후 경기종료 10분 여를 남겨두고 마찬가지로 결승골을 작렬,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자마자 팀을 두 차례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이 어려운 시기 클로제의 활약이 없었다면 독일은 2002년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뒤이어 2001/02시즌에는 16골과 7개의 어시스트를 곁들여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격수로 거듭나며 월드컵 라이징스타가 될 준비를 끝마칩니다. 또 월드컵 예선기간에는 올리버 비어호프나 카르스텐 얀커, 올리버 뇌빌과 같은 기존 공격수들에게 밀려 교체선수에 머물렀지만 월드컵 진출이 확정되고 클로제가 분데스리가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2002년 경부터는 수 차례의 평가전에서 루디 푈러 감독이 클로제를 주전공격수로 낙점했죠. 그리고 월드컵 첫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 클로제는 전반전에 발락의 두 차례 크로스를 모두 헤딩골로 연결시켜 포문을 열더니 후반전에 끝내 또 한 번의 헤딩골을 성공시켜 월드컵 데뷔전 해트트릭이라는 대기록을 완성합니다. 이어서 아일랜드, 카메룬과의 경기에서도 모두 헤딩으로 한 골씩을 기록, 조별에선에서만 5골을 모두 헤딩득점으로 성공시키는 이색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죠.

 

클로제는 184cm 그리 크지는 않은 신장이지만 점프능력이 아주 특별하고 또 위치선정 능력과 헤딩슈팅 능력까지 일품이라 커리어 내내 많은 헤딩골을 기록해왔습니다. 이 것은 서두에 언급했듯 운동선수였던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또 아버지가 일찍이 클로제의 점프능력에 주목해 납조끼를 입거나 트램플린에 올라타 헤딩슈팅을 하는 등의 특훈을 시켜왔다고 합니다. 또 클로제 또한 하부리그에서 뛰던 무명시절부터 독종이라고 불릴 정도의 연습벌레였다고 하는데 그런 노력들이 클로제의 장기로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강팀들과 부딫히고 또 집중견제가 시작된 토너먼트에서 클로제의 득점포는 멈추게 됩니다. 결승전까지 모두 선발출전했지만 추가득점없이 5골로 첫 월드컵을 종료.. 그렇지만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알린 계기가 되었죠.

 

그러나 이후 두 시즌 간은 클로제에게 오랜 슬럼프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높아진 주가에도 카이저슬라우턴에 잔류, 활약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마이스터 이후에도 5년여 간 꾸준히 중위권에 머물렀던 팀은 이 시기부터 찾아온 극심한 재정난 등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클로제 역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했죠. 그래도 두 시즌 간 9골과 10골을 기록하며 최소한의 역할을 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도 좀처럼 득점을 추가하지 못하다가 결국 유로 2004를 앞두고는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본선에서 클로제 대신 출전했던 케빈 쿠라니나 프레디 보비치가 활약을 했느냐.. 그 것도 아니었죠. 결국 무기력한 조별예선 탈락 속에 클로제는 손 쓸 기회 조차 거의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회 이후 반전의 계기가 찾아옵니다. 스물여섯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할 시기에 깊은 슬럼프가 계속되던 그 상황.. 클로제를 선택한 팀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더 브레멘이었죠. 당시 브레멘은 2003/04시즌 깜짝 마이스터를 차지했으나 주포 아일톤을 샬케 04에 자유계약으로 빼앗기는 바람에 공격력 공백이 상당했던 상황.. 그 대안으로서 클로제를 점찍고 500만유로의 이적료에 영입하게 됩니다. 오랜 슬럼프와 카이저슬라우턴의 팀 사정으로 인해 클로제라는 선수의 이름값에 비해서는 다소 저렴한 금액으로 영입한 셈이었지만 당시 브레멘의 재정능력으로서는 그야말로 구단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몇 경기에서 슬럼프를 떨쳐내지 못한 듯한 모습으로 불안하게 시즌을 시작하면서 브레멘 구단 측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금새 득점포를 가동하기 시작해 최종적으로 분데스리가에서 15골과 10개의 어시스트, 또 처음 밟아온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도 2골을 성공시켜 돈값을 해냈죠.

 

클로제는 2002년 월드컵의 모습때문에 일부 축구 팬들에게는 오랜 기간 헤딩만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곤 했었습니다만.. 사실은 1부리그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름 다재다능함으로 주목받아온 선수였습니다. 양 발을 모두 잘 사용하고 꽤 빠르고 날렵하기도 한데다가 움직임과 판단력이 좋고 패스도 은근히 잘해서 동료선수와의 연계플레이에도 강점이 있었죠. 그래서 2002년 월드컵 직후에도 분데스리가의 상황을 알던 국내의 소수 마니아들이 클로제가 절대 헤딩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며 변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능력이 브레멘 이적 후 수준높은 공격축구를 펼치는 팀의 스타일, 또 요앙 미쿠 등 우수한 동료들과의 조합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었죠. 이후 브레멘에서 세 시즌 간 꾸준히 10-10 클럽에 가입했고 특히 2005/06시즌에는 25골과 13개의 어시스트로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단한 활약을 펼쳤죠.

 

유로 2004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부임하고 개혁을 위해 다양한 선수들이 대표팀의 부름을 받아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클로제 또한 브레멘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기회를 잡았죠.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기간에는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중요한 시기를 놓치기도 했지만 복귀 후 서서히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고 루카스 포돌스키와 함께 투톱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던 케빈 쿠라니가 부상으로 낙마, 결국 포돌스키와 투톱으로 2006년 월드컵에 나서게 되죠. 그리고 두 번째 월드컵 무대에 나선 클로제는 더 이상 헤딩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조별예선에서 이번에는 발로만 4골을 기록했고 또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경기에서는 장기인 헤딩슈팅으로 경기종료 10분 여를 남겨두고 귀중한 동점골을 기록, 월드컵 토너먼트 첫 골까지 기록하게 되죠. 팀은 4강까지 진출했고 클로제는 첫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대회에서 클로제는 다재다능한 공격수로서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이 활약을 계기로 국내 팬들의 시선 역시도 많이 바뀌었죠.

 

다만 2006년 월드컵 이후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대규모 재건을 노리던 바이에른 뮌헨이 클로제의 영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클로제 또한 브레멘 측의 재계약 제안에 응답하지 않고 더구나 한 언론사에서 클로제가 바이언 측과 사전접촉을 펼치는 장면을 포착해 보도하며 논란이 일기도 했었죠. 여기에 또 다른 언론을 통해 사생활과 관련된 악성루머까지 퍼지며 축구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데스리가에서 13골과 15개의 어시스트로 활약했고 브레멘 구단 측에서는 당초 클로제를 무조건 지키겠다는 입장을 여름이적시장 중에도 고수했으나 끝내 1,500만유로의 이적료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협상이 마무리되었죠. 그렇게 됨으로서 루카 토니와 새롭게 투톱을 이루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팬들은 이 조합을 상대수비수의 구토를 유발한다는 의미의 '토나오제'라고 명명하며 기대를 모았습니다.

 

다만 바이언 이적 후 활약은 썩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에서 10골을 기록했고 2008/09시즌 중에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7골을 기록해 활약했지만 전반적인 활약 상은 클로제의 이름값에 어울린다고 보기는 힘들었죠. 유로 2008에서도 조별예선에서 무득점에 그쳤는데 그러나 8강전과 4강전에서 한 골씩을 기록하며 중요할 때 한 방씩을 해냅니다. 특히 두 경기 모두 1골 차 접전이었기 때문에 가치가 컸죠. 이후 2009년 루이 반 할 감독이 취임한 이후로 바이언에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는데 반 할 감독은 공격진에 토마스 뮐러를 축으로 이비차 올리치, 또 거액의 이적료에 영입한 마리오 고메스를 우선적으로 운영했고 그러면서 토니와 클로제는 찬밥신세가 됩니다. 결국 토니가 2010년 먼저 팀을 떠난데 이어 클로제 역시 구단과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2011년 여름이적시장을 통해 33세의 많은 나이에 세리에 A 라치오와 계약하며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되죠.

 

그런데 그 어려운 시기에도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을 꾸준했습니다. 2010년 월드컵 예선에서 꾸준히 득점포를 가동한데 이어 본선에서는 또 다시 4골을 기록, 이번에는 잉글랜드와의 16강전에서 한 골, 또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에서 두 골을 기록해 토너먼트에서 더욱 빛을 발했죠. 다만 이 것이 클로제가 공격진의 주축이 된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고 이후 유로 2012와 2014년 월드컵에서는 백업으로서, 또 특급조커로서 역할을 부여받았죠. 그렇지만 마지막 무대가 된 2014년 월드컵에서 두 골을 더 추가, 4번의 월드컵에서 통산 16골이라는 대기록을 완성하고 더구나 월드컵 우승까지 들어올리며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를 장식하게 되었죠. 이로서 총 국가대표 커리어는 137경기 71골.. 또 월드컵 통산 16골과 유럽선수권 통산 3골.. 월드컵 우승 경력까지 상당히 풍부한 국가대표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되었죠.

 

그리고 2011년부터 시작된 세리에 A 커리어.. 사실 1980년대부터 독일국가대표 공격수라면 한 번쯤은 세리에 A를 거쳐가곤 했었습니다. 1980년대 당시로서는 초거액의 이적료에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던 칼-하인쯔 루메니게를 시작으로 AS 로마에서 활약했던 루디 푈러, 인터 밀란과 삼프도리아를 거쳤던 위르겐 클린스만, 라치오에서 활약한 바 있는 칼-하인쯔 리들레, 우디네세와 AC 밀란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올리버 비어호프, 그리고 우디네세에서 처참히 실패했지만 카르스텐 얀커까지 세리에 A 무대에서 활약한 바 있고 최근에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마리오 고메스가 피오렌티나에서 뛴 적이 있었죠. 클로제 또한 늦은 나이지만 국가대표 선배공격수들의 전철을 밟아 이탈리아 무대로 향했는데 다만 사실 바이언에서 지난 4년 간 썩 활약이 좋지 못했던데다가 나이도 있다보니 이름값은 높았지만 큰 기대를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예상을 뒤엎고 첫 시즌부터 팀의 주포로서 본인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환경을 잘 이용하는 것은 물론, 축구도사와 같은 포스로 동료선수들까지 잘 살려주며 12골과 7개의 어시스트로 이름값을 하더니 두 번째 시즌에도 15골을 폭발..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다가 37세에 시작해 38세에 끝마친 마지막 2015/16시즌에도 다소간 줄어든 출전시간에도 7골과 8개의 활약으로 그야말로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하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이 기간 라치오는 주축선수들이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상황 속에도 클로제가 최전방에서 꾸준히 버텨주면서 매 시즌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확보하는 수준의 성적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렇게 33세에 시작해 38세에 끝마친 5년 간의 세리에 A 커리어는 통산 139경기 54골과 30개의 어시스트.. 노익장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습니다.

 

그렇게 2016년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끝마친 뒤에는 독일대표팀의 코치로서 요아힘 뢰브 감독을 보좌하며 2년 간 일하다가 2018년부터는 바이에른 뮌헨 U-17 팀의 감독으로서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데요.. 또 2020/21시즌부터는 바이에른 뮌헨 1군의 코치로서 한지 플릭 감독을 보좌하는 것으로 내정되어 서서히 지도자 커리어를 밟아나가고 있습니다. 대기만성형의 전형인 선수시절과 달리 코칭스태프로서의 커리어는 나름 시작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셈인데요.. 잘 풀린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빅리그 감독' 클로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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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5-02 13:58:21

 잘읽었습니당

클로제가 라치오 왔을때 신나서 페북에 글 올리던 기억이 나네요ㅠㅠ

근데 와서의 활약이 더 깜놀..

2020-05-02 14:07:07

뮌헨에서 대박칠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

2020-05-02 15:00:20

Pk 정정요청 영상이 퍼지면서 멘탈갑이라는 별명까지..

2020-05-02 15:11:29

크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클로제 어시능력도 진짜좋더라구요!

2020-05-02 15:13:09

뮌헨에서 큰 족적을 남긴건 아니었나보네요
역시 국대 이미지가 큰가ㄷㄷ

OP
2020-05-02 23:14:20

본인이 예전만 못했던 것도 있고 또 토니하고 의외로 안맞는 부분도 좀 있었습니다. 클로제가 기본적으로 다재다능한 선수이기는 하지만 근본은 포처이다보니 토니하고 약간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죠..

Updated at 2020-05-02 15:20:29

클로제 형님 라치오 처음올때는 나이때문에 약간 의심스러웠는데, 너무 잘해줘서 고마웠네요.

라치오에서 월드컵 최다골 기록까지 쓰고.....

 

생각해보면 클로제가 라치오 선택한게 라치오한테는 행운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2020-05-02 15:41:10

이름도 간-지

2020-05-02 16:09:01

사실상 미로형덕분에 라치오 빨기 시작한 1인으로써.. 매번 라치오 하이라이트볼때마 가슴이 저릿해지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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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2 16:11:23

첨언을 하자면.. 클로제의 05/06 시즌은 적어도 분데스리가 내에서는 스트라이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 시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6경기 25골 14도움, 키커지 평균 평점 2.38

득점왕, 도움왕, 키커지 평균 평점 전체 1위, 키커지 선정 주간 베스트 일레븐 선정 횟수 1위, 키커지 선정 이 주의 선수 선정 횟수 1위 등등

시즌 종료 열린 월드컵에서 5골로 골든슈, 2006년 독일 올해의 선수 선정.

베르더 브레멘 시절 K-K 듀오로 같이 명성을 떨친 클라스니치와의 콤비가 엄청나던 시절이었죠. 제가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선수 평균 평점입니다. ㅋㅋㅋ 골키퍼 평균 평점이 2점대가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공격수, 그것도 스트라이커 평균 평점이 2점대 초반인 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키커 평점에서 2점이면 MoM에 준하는 수준이거나 해당 경기 MoM이었다는 건데.. 시즌 동안 잔부상이 있었음에도 저런 스탯을 찍어버린다니 정말로 쇼킹한 일이었죠.

2020-05-02 18:28:35

저도 이때 한참 축구 열심히 볼때라 클로제가 당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이다! 이 생각했음ㅋㅋ

OP
2020-05-02 23:17:02

당시 시즌 중반까지는 평점이 더 낮게 유지되어서 클로제가 평균평점 1점대라는 신의 기록을 달성하느냐가 큰 관심사이던 시기도 있었죠..

2020-05-02 19:01:10

세랴에선 라치오 시절 덕분에 다들 아시는 얘기지만 클로제는 진짜 축구지능이 만렙이져. 평범한 볼터치에 라치오 시절엔 신체능력도 꽤 떨어져 있었는데 미친 판단력으로 맹활약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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