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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포스트 마라도나 - 천당에서 지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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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14:21:58


나폴리는 로마 카톨릭이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는 SSC 나폴리 또한 신앙의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한 때, 축구를 거의 종교만큼이나 숭배하는 나폴리의 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모습을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때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가장 돋보였던 시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마라도나의 나폴리 시절에 팬들은 전례없는 성공을 경험하였습니다. 2번의 스쿠데토, 1번의 우에파컵, 1번의 코파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은 모두 1987~1990년의 영광스러운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이 아르헨티나인은 메시아로 추앙받았습니다.

팬들의 사랑은 그가 필드 위에서 보여준 기교와 화려한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약물중독, 의도적인 탈세, 마피아 보스와의 술자리를 포함한 모든 그의 악행까지도 팬들은 따뜻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광스러운 시절은 결국 대가를 치뤘습니다. 마라도나의 이탈은 단테의 신곡의 세 시편(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연상시키는 불안한 여정의 서막이었습니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과는 다르게, 나폴리는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Seire A라는 천국에서 시작해 Serie B라는 연옥, Serie C라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세리에의 7공주 시절과 대비되는 당시 나폴리의 여정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닌 재앙과같은 추락이었습니다.


제 1장: 천국

1987년 5월 10일의 오후, 나폴리의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내를 돌아다니던 관광객들은 도시가 잠시 멈추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한 이 분위기를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Amalia Signorelli'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유럽에서 가장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가 버려졌다."
(역주: 나폴리 팬들이 축구경기를 본다고 전부 집에 틀어박혀 있던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나폴리는 확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처 베수비오의 주민들과는 다르게 나폴리의 시민들은 바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운이 좋으면 San Paolo 스타디움에서 폭발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나폴리는 창단 61년만에 마침내 리그우승을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아까까지 고요했던 거리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차와 빌딩, 테라스는 나폴리의 여름을 연상시키는 하늘색으로 뒤덮였습니다. 'John Foot'은 이러한 축하현장이 나폴리의 성격( irony, parody and a sense of macabre, obscenity and blasphemy)을 잘 반영했다고 평했습니다.



도시의 묘지에는 'Guagliu! E che ve sit pers!'(새끼들아! 너네는 우승하는거 못봤지?!)라는 문구의 그래피티가 그려졌습니다. 유벤투스를 위한 모의 장례식도 마련되었습니다. Vecchia Signora(유벤투스 애칭 Old lady)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감, 풍자, 샤덴데프로이데의 기저에는 엄청난 자부심이 깔려있었습니다. 그것은 나폴리의 시민이라는 자부심, 남부 이탈리아인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나폴리의 첫번째 타이틀의 의미는 단순히 축구에 국한되지 않고 더 광범위한 사회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를 집권하던 당은 'Lega Nord'당으로서 지역주의와 분리주의를 표방하며 이탈리아 남부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의 성공은 반항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수년동안 세리에A의 리그결과는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반영했습니다. 1970년 칼리아리의 리그우승을 제외하고 로마 남부에 위치한 클럽이 스쿠데토를 차지한 것은 나폴리가 처음이었습니다.

나폴리는 남부지역을 대표해서 통쾌한 한방을 날림으로써 잠시동안 북부의 독주를 깨버렸습니다. 나폴리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1987년 5월, 이탈리아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No.10 마라도나가 있었습니다. 초라한 배경과 반항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던 마라도나에게 나폴리인들은 자신들을 투영하였고 그에 열광했습니다. 그의 부스스한 외모는 숭고한 재능에 비하면 기만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모순되는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Gianni Brera'는 마라도나에게 '숭고한 낙태아'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ㅋㅋㅋ 미친놈)

1987년 우승 시즌에, 마라도나는 10골로 최다득점자였고 유벤투스의 미카엘 플라티니, AC밀란의 마르코 반 바스텐, 인터밀란의 로타어 마테우스, 그리고 우디네세의 지코를 아득히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에 있는 4년동안 뛰어난 경기력을 이어나갔습니다. 1989년 마라도나는 팀을 대륙컵으로 이끌었고, 대회에서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슈투트가르트를 뚜까패면서 UEFA컵을 들어올렸습니다. 다음시즌에 그들은 북부의 강자 아리고 사키의 AC밀란을 누르고 다시 한 번 스쿠데토를 들어올렸습니다. 마라도나는 16골을 넣으면서 다시 한 번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나폴리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들썩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문제였을지도 모릅니다.

마라도나에 열광함으로써 놓치기 쉬운 사실은, 사실 나폴리의 성공은 강력한 선수단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입니다. 1986/87의 성공은 쥐세페 브루스콜로티, 모레노 페라리오, 알레산드로 레니카, 치로 페레라가 구축한 수비진과 그 앞을 지키는 페르난도 데 나폴리와 살바토레 바그니 듀오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공격진을 보자면, 브루노 지오다노(5골)과 안드레아 카네발리(8골)가 마라도나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나중에는 지안프랑코 졸라와 브라질의 카레카가 합류하여 공격진을 강화했습니다. 지오다노와 카레카, 그리고 마라도나는 훌륭한 호흡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 트리오를 'Ma-Gi-Ca'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폴리에서 활약하던 카레카


이 선수들이 오타비오 비앙키 감독의 훌륭한 리더쉽 아래 한데 뭉쳐 첫번째 우승을 일구어냈고, 다음에는 알베르토 비곤 감독과 함께 두번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을 뒤로한 채 사람들은 나폴리를 마라도나의 팀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사생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이 팀은 결국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2장: 연옥

사람들의 희망과 꿈을 스타 한 명에게만 맡긴다면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 별이 얼마나 빛나든지 말입니다. 브레라는 마라도나를 '신성한 낙태아'라고 이름지었지만 나폴리 시민들의 눈에는 신성함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의 신과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클럽에서 활약하는 동안 그를 도시의 수호신 'San Gennaro'과 견주는 벽화가 그려졌고 어떤 사람은 마라도나를 성인의 오른팔 그 자체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라도나는 유혹에 쉽게 빠지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마라도나의 코카인 중독은 그가 믿고 있던 수상한 회사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역신문에 그가 지역 마피아조직 보스들과 파티를 벌이는 사진이 실리면서 마라도나는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리는 그런 행동들을 멈추기 위해 애썼습니다. 심지어 1969년부터 나폴리 단장을 맡았던 코라도 펠라이노(Corrado Ferlaino)는 사립탐정까지 고용해 마라도나의 사생활을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마라도나의 컬트적인 위치는 구단의 규율과 관리를 아득히 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의 저돌성은 올바르게 표출되었습니다. 마라도나는 경기에 나올 때마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라도나와 클럽 사이의 이러한 병든 관계는 클럽의 장기적인 목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991년에 결국 마라도나는 바리와의 경기 이후 코카인 양성판정을 받았고 15개월의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나폴리의 구세주는 다시는 클럽의 경기장을 밟지 못했고 나폴리가 이후에 다시 재기하기까지는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라도나가 대부분의 경기를 빠진 1991/92시즌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은 신성 졸라가 12골을 넣으며 팀을 겨우겨우 4위까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아예 떠나버린 다음 시즌부터 나폴리는 연옥으로향하는 발자국을 내딛었습니다.

마라도나가 클럽의 성공의 상징 그 자체였기에, 마라도나의 몰락으로 인해 구단까지 몰락하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폴리와 팬들은 마라도나에게 과하게 의존하게 되면서, 마라도나의 경기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스승 마라도나와 제자 졸라


1984년 나폴리가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위해 지불한 £6.9m은 그 당시 월드레코드였습니다 - 사실 지역 정치가 Vincenzo Scotti가 그의 연줄을 이용해서 은행에서 돈을 지원받지 않았더라면 영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나폴리가 1980년대 중후반 이적시장에서 지출한 금액은 클럽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마라도나가 떠나고 몇년간 나폴리는 세리에A에서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93/94시즌은 6위, 1994/95시즌은 7위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성적을 유지하는 데 우루과이 미드필더 다니엘 폰세카와 이탈리아 유망주 파비오 칸나바로, 베니토 카르보네의 몫이 컸습니다. 그리고 라니에리, 마르셀로 리피, 부야딘 보스코브의 전술도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적이 재정적 파탄까지 커버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법부에서 나폴리 구단주가 Tangentopoli 스캔들에 연루된 것을 확인하였고, 구단주 펠라이노는 막대한 빚을 남긴 채 팀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993년 쫓겨나고 1년 뒤에 그는 나폴리를 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펠라이노는 구단의 파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고, 그 결과 팀의 소중한 자산들이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졸라와 칸나바로는 식품 경영회사 Calisto Tanzi가 공격적으로 투자한 파르마로 팔려나갔고, 페레라는 1994년 리피를 따라 유벤투스로, 카르보네는 1년 뒤 인터밀란으로 떠났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리 시민들은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싫었던 사실을 다시한번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축구의 균형이 확실하게 북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들의 1996/97 시즌 전반기의 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감독 기기 시모니(Gigi simoni)는 앞선 14경기에서 2위를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모니가 시즌이 끝난 후 인터밀란으로 떠나기로 사전계약한 사실이 구단주 펠라이노에 의해 발각되었고 시모니는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열정이 식어버린 나폴리 선수단은 급격하게 폼이 저하되었고 성적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스코치 Vincenzo Montefuso가 소방수로 기용되었지만 나폴리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패배하였고, 마지막 16경기에서 2승만을 기록하면서 강등권에 4점 앞선 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리 팬들은 매우 억울했겠지만, 펠라이노는 다시 한번 구단 최고의 재능들을 팔아넘겼습니다. 파비오 페치아가 유벤투스로 갔고, 안드레 크루즈는 AC밀란, 알랑 보고시앙은 삼프도리아로 팔려갔습니다. 이제 남은 나폴리 선수단은 빈약함 그 자체였고, 미래의 아르헨티나 주장 로베르토 아얄라가 분전했지만, 그들은 매 경기마다 2점 넘게 실점하며 난장판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89 UEFA컵 우승의 순간


펠라이노는 다음 시즌 4명의 감독을 선임하였지만(Bartolo Mutti, Carlo Mazzone, Biovanni Galeon, Montefusco) 누구도 나폴리의 추락을 막을 수 없었고 2승, 14점의 승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세리에 A에서의 33년, 그리고 두번째 스쿠데토를 들어올린지 단 8년만에 나폴리는 세리에 B로 강등당했습니다. 세리에 B로 강등되면서 나폴리는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제 3장: 지옥

월터 노벨리노(Walter Novellino)감독의 지도 하에, 나폴리는 2년만에 세리에 A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나폴리 팬들이 경험한 모든 사건 중에서, 이 거짓 희망이 가장 잔인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승격 직전, 미디어계의 거물 지오지오 코벨리(Giorgio Corbelli)가 클럽의 지분 50%를 사들였고, 펠라이노와 함께 구단주 위치에 올랐습니다. 코벨리는 즉시 유럽대회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허울뿐인 약속을 내세웠습니다. 노벨리노 감독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질되었고 대신 즈데네크 제만(Zdenek Zeman)감독이 임명되었습니다. 자신이 임명한 제만감독을 밀어주기 위해 코벨리는 스트라이커에 니콜라 아모루소, 윙백에 마렉 얀쿨로프스키을 보강해주었고 이전에 팔았던 파비오 페치아를 다시 구단으로 데려왔습니다.

제만 감독은 그의 공격원칙을 고수하였고 코벨리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재임했던 시절은 재앙이었고 무엇보다 그 기간이 너무도 짧았습니다. 그는 시즌이 시작되고 6경기만에 짤렸고(ㅋㅋㅋ) 나폴리는 1번의 승리도 챙기지 못한 채 14골을 실점했습니다 - 홈에서 열린 볼로냐전에서는 5골을 실점했습니다.

나폴리는 다시 에밀리아노 몬도니코 감독을 임명했습니다. 이 감독은 '단순하고 단순한' 축구를 주장하며 제만 감독의 철학과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몬도니코는 언더독팀들을 데리고 작은 기적을 이뤄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1992년 토리노를 UEFA컵 결승에 올려놓음으로써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그는 라치오, 인터밀란을 상대로 인상적인 승리를 기록하고 피오렌티나에게는 두번이나 승리하면서 제만감독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리는 시즌 마지막날 강등이 확정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즌은 강등권경쟁이 유례없이 치열했던 시즌으로 12위부터 17위까지 승점이 단 2점밖에 차이나지 않았습니다.

예상치못한 강등으로 인해 재정적인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나폴리는 강등을 피하기 위해 1월에 브라질리언 듀오 에드문드와 아마우리를 영입하는 도박수를 두었지만 그들의 도박은 완전히 실패했고 구원은 없었습니다.

나폴리 시민들은 독실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라도나가 팀을 떠난 뒤 신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더라도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2001년 9월, 홍수로 인해 San Paolo 스타디움에 구멍이 뚫렸고, 그들은 홈경기를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작은 경기장에서 치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동안 많은 구단 관계자들이 바뀌었고 구단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습니다.



긴 법정 공방 끝에, 코벨리는 그의 새로운 파트너(Salvatore Naldi)와 함께 펠라이노 구단주의 지분을 없애버렸고 구단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02년에 코벨리는 TV 판권 판매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체포되었고 팀은 더욱 더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나폴리는 그동안 세리에 B에서 근근히 먹고살고 있었지만, 2004년 8월, 나폴리가 €79m의 빚을 청산하지 못해 파산을 선언하면서 그들의 비참함은 완성되었습니다. 구단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지만 다행히 영화 제작자이자 현재 구단주인 아우렐리오 데 로렌티스(Aurelio De Laurentiis)가 클럽을 €34m에 인수하면서 그들은 Napoli Soccer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세리에 C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깊이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세리에 C라는 지옥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런 암흑기 시절에도 나폴리의 San Paolo 스타디움에 관중들이 50,000명 넘게 모였다는 것(세리에 C 기록)은 나폴리의 명성과 팬들의 충성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4번째로 관중이 많은 이 구단은 실패의 값을 톡톡히 치뤘습니다. 재정난에 더해진 형편없는 경기력은 나폴리 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구단내부 질서는 엉망이 되었고 선수들이 직접 공격받는 수많은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한 무리의 젊은 팬들이 칼을 들고 미드필더 레나토 올리브 선수를 둘러싸 위협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한 때 위대했던 클럽은 정말 밑바닥을 찍고야 말았습니다.


제 4장: 사치

나폴리의 닉네임인 'Partenopei'는 'Partenop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던 사이렌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유혹에 실패한 뒤 바다에 처박혀 자살했고 나폴리 해안가로 떠내려왔다고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배 기둥에 묶은 덕분에 사이렌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7공주 시절 많은 이탈리아 클럽들은 순간의 영광을 차지하겠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나폴리의 쇠퇴는 이탈리아 축구의 거대 클럽들이 갖고 있던 재정적 부실함을 방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덕분에 세리에 A가 스릴있고 중독성있는 리그가 되었고 많은 젊은 재능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대는 축구 천재들의 시대가 아닌 부끄러운 사치의 시대였습니다. 부도덕한 구단주들은 즉각적인 희열을 위해 계속해서 낭비를 일삼았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혹은 비열한 방법을 통해 돈이 조달되었고 쓰여졌습니다. 결국에 Calisto Tanzi가 운영하던 파르마, Sergio Cragnotti의 라치오, Gian Mauro Borsano의 토리노, Vittorio Cecchi의 피오렌티나는 모두 사양길에 접어들었습니다. 한 때 남부의 자랑이었던 라치오의 추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리버풀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리버풀이 파산하고 3부리그로 강등된 것입니다. 물론 나폴리의 성공은 국내에서나 유럽에서나 리버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폴리 팬들의 문화적 지역적 정체성과 그들에게 축구가 가지는 의미는 리버풀 팬들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나폴리 팬들에게 나폴리의 강등은 단순히 구단의 추락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나폴리가 데 로렌티스의 후원 아래에 다시 태어났지만 지옥을 다녀왔던 그들의 기억은 씻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유벤투스나 AC밀란을 발 아래 놓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단테가 말했듯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복한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7공주 시절 나폴리의 이야기였습니다.

By Luca Hodges-Ramon




 
https://www.fmkorea.com/3342499588#comment_3342794896

양질의 칼럼이라서 퍼왔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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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1-22 14:42:38

프로야구가 처음 생기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해태가 강팀으로 떠올랐는데
광주 시민들의 감정이 그대로 담긴 팀이라 더 열정적이고 애정을 갖고 사랑했죠

야구선수들은 억압받던 울분을 대신 풀어준 사람들이었고
의도적으로 5월 18일에 광주 홈경기를 열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목적이 반영된 것이었으니

나폴리 사람들이 그들의 우승에 자부심을 갖는게 이해되네요

2021-01-22 14:51:39

잼난글잘봤습니다 이런글 더올려주시면 너무너무고맙겠어요!!

Updated at 2021-01-22 16:36:18

세리에A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과정은 잘 몰랐는데 정말 다이나믹 했었군요.
세리에C에서도 5만명 관중이었다니... 경이로움.

2021-01-22 17:24:33

라니에리가 감독경력이 엄청 오래됐네요 ㄷㄷ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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