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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잡설)반자이돌격과 관련된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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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03-21 15:26:49

일본이 미군의 물질적(화력적) 우위 앞에서 정신론을 내세우며 의지를 통해 이길 수 있다고 보병들을 마구잡이로 돌격시킨 것이 반자이 돌격이며 이것은 1차대전의 돌격 정신론에서 기원한 구시대적 발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자이 돌격이 지나치게 인간의지와 정신론에 얽매인 발상 끝에 나온, 썩 좋지 않은 교리 기법인 것은 사실이나 그 정신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며, 1차 세계대전의 정신론이란 엄연히 '기동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 중 하나'로만 간주된 것이고, 일본 육군 군부는 일단 이론적으로는 그냥 병사들을 무작정 돌격시킨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후술할 요인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2차대전 일본 육군은 미국을 상대로 그냥 병사들을 사지로 무지성 돌격시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의 정신론은 무작정 보병들에게 사지로 돌격하라고 말하는 내용이 아니며, 2차 세계대전의 일본 육군 반자이돌격이란 그러한 1차 세계대전 정신론의 후계자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 군부가 그 자신들의 현실 상황에 맞춰 기동전의 부분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정신론 파트만 콕 집어다 마개조해서 써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에서의 정신론이란 기동전에 필요한 요소들인 기계화, 제공권, 화력과 같은 요소들과 함께 첨부되어야 한다는 부분 요소 개념일 뿐이며 이는 프랑스군, 독일군, 러시아군, 영국군, 미국군 모두 똑같이 받아들인 것이다.

 

먼저 정신론의 기원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정신론은 이미 전근대 전쟁에서부터 대열 유지를 위해 강하게 강조되던 것이나 근현대 군사학으로써 정신론이 보편화된 것은 프로이센/독일 군부에 의해서이다. 프로이센 군부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에게 크게 당한 뒤로 이를 전훈으로 삼아, 게르하르트 샤른호르스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등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군사 철학 사조를 발달시켰으며 이 군사 철학에 기반하는 기동전 교리, 임무형 지휘체계를 철저히 신봉하였다.

 

그리고 이 프로이센/독일 군부의 이론에 따르자면, 기동전을 하기 위해서는 보병들의 공세 의지, 기동 의지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프로이센 장교들은 보병들에게 정신론을 강조하며 공격에의 의지를 불어넣는 것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론은 언급했듯이 기동전을 하기 위한 기반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다.

 

반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보불전쟁에 치닿기 전까지, '전쟁은 과학이다.'라는 군사 철학 사조를 발달시키며 '보병들의 정신력이나 의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극대화된 사전계획과 과학적 화력 우위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라고 보고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군부 측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의 차이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완패로 이어진다. 이후 프랑스 군부는 충실히 프로이센/독일의 기동전 교리와 군사 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보불전쟁에서의 전훈,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은 모두 '기계화, 제공권, 화력, 정신력=공세 의지/기동 의지'라는 요소를 결합시킨 기동전이 다가올 현대전의 정답임을 이미 암시하였다. 독일군은 기동전을 통해 거의 모든 전선에서 모든 적국 군대를 상대로 교환비 우위를 보였으며 그 프로이센/독일군을 가장 충실히 따라한 프랑스군은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급기야 전차를 앞세운 기동전까지 선보이며 세계최강의 육군이라던 독일 육군을 상대로 교환비에서 우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본 군부는 이러한 보불전쟁, 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 군부는 보편적으로 한가지 문제점을 인식하였다. 일본은 비록 제국주의 시대 열강급 국가들 중 하나로 인식되었으나 세계 해군 1~4위 패권을 다툴 법한 막대한 해군력의 위용 덕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기반 산업 체급, 그리고 이러한 기반 산업에 의지하는 군수 산업의 체급에서 열강들 중에서는 최약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기간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발전과 성장은 일본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본토가 섬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팽창주의 일로에 있던 국가인 일본으로써는 그 첨병 역할을 할 해군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고 이미 한 번 비대화된 해군은 계속해서 강력하게 유지시켜야 했으므로 그 열강 중 최약체급의 산업력을 육군 강화에만 쏟아붓기는 커녕 반 이상을 해군 강화에 투자해야했다. 즉 기동전을 위해서 필요한 여러 요소들, '기계화, 제공권, 화력, 정신력'에서 산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기계화, 제공권, 화력이라는 부분을 충족하기가 일본이라는 국가 입장에서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군부는 보불전쟁과 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흡수하여 기동전 사상을 받아오기는 했으되, 기계화, 제공권, 화력이라는 세부 요소에 있어서 같은 열강을 상대로 우위를 담보할 역량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난히도 심각했던 일본 육해군의 대립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비록 오늘날 일본에서는 해군선역화, 육군악역화가 대중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나, 당시 일본 육군 군부 인사들 입장에서는 '해군 때문에'(정확히는 해군 쪽으로 가용되는 산업과 자원 때문에) 보불전쟁과 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받아놓고도 이를 통한 육군 개혁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육군이 해군의 행동 및 해군으로의 자원 배정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흐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일본 육군 군부는 '중국 침탈과 아시아 패권을 확보하는 행위를 함과 동시에' 타 열강들을 육군력으로 따라잡기 위해서 어떠한 타개책을 내야했다. 여하간 아무리 실질 산업과 육군 수준이 열강 중 말석, 최약체였다지만 적어도 어지간한 해군 강국들과의 한타 싸움에도 충분할 정도로 막강했던 일본 제국해군 규모는 일본이 실질 산업과 육군 수준에 맞지 않을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갖게끔 해주었으며 비열강 국가들(특히 아시아 국가들) 중 일본 상대가 될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육군 군부 입장에서는 나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일본 육군 군부는 일종의 편법적 타개책으로써, 보불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받아들인 전훈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부분적으로 수용하더라도 그들이 사전에 예상한대로 '당장에는'(중일전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일본 육군이 아무리 서구 열강 육군에 비해 질적 수준에서 약체더라도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 쯤은 질적으로 그냥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이미 극단적인 팽창주의 정서에 빠져있던 일본 제국 사회는 '일단 팽창 행위를 멈추고 국내 산업 발전에 집중하며 육군 발전을 위한 자가 가용 자원 확대에 주력한다'는 선택지를 전반적으로 도외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특히 이를 제지할 수도 있었던 문민정치가들이, 결국에는 사회 전반이 군국주의화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일본 군부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요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일본 육군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보불전쟁/1차대전의 전훈에서의 일부 요소들만 부분적으로 구체화한 것인데 물론 그것이 심지어 정석은 아닌 임시 편법 정도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단지 '일단 팽창하고 이번 상황만 넘기면 이후 확보되고 늘어나는 가용 자원과 산업으로 나머지 요소들까지 빠르게 발전 및 구체화시킴으로써 서구 열강 육군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요행을 바라고 그리한 것이다. 그 부분적 전훈 수용이 바로 기동전을 위해 필요한 선제되는 요소들인 기계화, 제공권, 화력, 정신력 중 정신력이라는 요소만을 중점적으로 받아들이고 확대한 것을 말한다.

 

때문에 일본 군부는 병사들에게 기계화, 제공권, 화력을 담보해주지도 않는 채로 무작정 정신론만을 들이민 것이고 이 정신론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점차 하위 장교들에서 부사관들, 말단 병사들에게까지 뿌리깊게 고착화되면서 결국 '의지만 충분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는 식의 변질된 정신론 만능주의로 이어져버린 것이다.

 

물론 서구 열강 국가들에 비해서 기계화, 제공권, 화력의 요소가 모자란다는 것이지 비서구, 비열강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자면 일본군은 압도적으로 기계화되었고 제공 역량이 있으며 화력이 우세한 국가였다.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당군은 교환비라는 측면을 보자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났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동시에 역으로 일본 군부가 자신들이 행한 임시 편법적 타개책을 통한 발전상(?)에 만족해버리고 모든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게끔 만들어버리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중일전쟁을 두고 발생한 미일 대립과 일본 수뇌부의 잘못된 낙관주의 정서에서 기반한 판단 과정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결국 진주만 공습을 일으켰으며, 이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자신들의 서구 열강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요소들인 기계화, 제공권, 화력의 열세 문제를 미국을 상대로 뼈저리게 실감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 기술할 전제를 하더라도 여전히 승자는 미국 측이었겠지만, 여하간 만일 미일 전장 환경이 넓은 개활지이고 전선 단위의 연속전투가 벌어지는(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동부전선처럼) 구조였다면 비록 미국에 비해 기계화, 제공권, 화력의 요소가 부족하더라도 대규모 보병 전력을 활용한 침투 전술(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열심히 개발하고 가다듬은 기동전용 세부전술이다. 물론 자기네들의 기동전 교리를 자가폐기하고 요새전으로 교리를 바꿔버린 2차대전의 프랑스군은 그런 거 없었지만)은 나름대로 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미일 전장환경은 광범위한 개활지 전선에서의 연속 전투가 아니라 대양에 있는 태평양 제도들을, 마치 징검돌 건너듯 계속 바다 건너가며 싸워야하는 '좁은 섬 공간 내부'였다. 그리고 이러한 좁은 공간에서는 화력이 우세한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해진다.(비단 태평양 제도들 뿐이 아니라 동남아 전선에서도 밀림과 산악이 널리고 널려 지형이 매우 험준하므로 여전히 기동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확연히 드러난 전선 취약 지점이 별로 없었으니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역시 상황은 별 반 다를 것도 없었다.)


미국은 비록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기존의 화력 우세에 기반한 소모전 교리를 버리고 기동전으로 선회하기는 했지만 2차 세계대전 시절까지는 화력 우세에 기반한 소모전 교리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현대 화력 소모전 교리는 소모전 교환비 우위를 수년 내지 수십년 전쟁 기간 동안 계속 점하게 해줄 막대한 산업력을 필요로 하므로 사실상 '세계 최대 규모 산업력을 자랑하는 미국만 제대로 쓸 수 있는 교리'나 다름없었다.(따라서 당시 타 국가들보고 미국 교리를 왜 안 따라했느냐고 비웃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애초에 미국 정도의 산업력을 가진 나라가 쓸 수 있는 교리를 그 정도 산업력이 안되는 나라들에게 따라하라고 하는게 뭘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력 소모전 교리는 비록 넓은 전선에서의 고점이 상대적으로 높지는 않지만 저점은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축이며* 특히 좁은 공간에서의 화력 투사력에서는 소위 딜찍누, 즉 일방적으로 화력 우세를 점하며 적을 찍어눌러버릴 수 있었다. 반면, 기동전의 위력은 기계화, 제공권, 화력의 요소는 제하고 보더라도, 넓은 전선 단위의 연속 전투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취약지점을 탁월한 기동력으로 선제적으로 찔러서 이후 적 전선의 연속적 분단과 붕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요점이 있는 것인데, 육군 간 싸움에서 넓은 전선이 펼쳐지지 않는 태평양 제도들에서는 이러한 전선 중 취약지점을 기동전으로 찌른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하물며 그것이 화력 소모전에 특화되어 대대, 연대 단위로 하나의 종합된, 일종의 움직이는 파이어베이스를 구축하고 싸우던 미군을 상대로는 기계화, 제공권, 화력이 열세인 일본군 입장에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일군의 기갑을 앞세운 기동전, 소련군의 종적동시성/횡적동시성을 아우르는 고차원적인 종심 공세 교리 등은, 전 전선 단위에서의 연속 전투에서 파상 공세를 통해 전선 전반을 가공할 진격 속도로 무자비하게 무력화시키며 일정 시점부터는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적 병력에게 계속 포위섬멸을 강요할 수 있었으나, 이와 달리 미군의 화력 소모전은 매우 안정적이고 병력 희생율도 낮은 편이라 저점은 상대적으로 매우 높으나 반면 상대적으로 낮은 전선 단위의 속도로 인해 고점도 상대적으로 낮은 축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냉전 이후 미군이 자신들의 산업력 강점을 살린 화력 소모력 우위성을 일정부분 유지하면서도 기동전 교리틀을 갖춘 군대로 현대군 교리를 탈바꿈시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장점만 골라 취득하는 교리 개선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정도의 국가 자본/산업 규모가 되는 나라이니까 가능한 것이지 아무 나라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러한 당시 미국 교리의 특수성과 이를 극대화시킬 전장 환경은, 화력이라는 요소에 있어서 미국을 상대로 결코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일본 육군을 상대로는 문자 그대로 전용 카운터나 다름없었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태평양 제도 각지의 좁은 공간에서 일본 육군 병사들은 정신력이라는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한 보병 중심의 기동전(세부적으로 말하자면 보병 침투 전술이라던지, 그러나 전선 취약지점을 발견을 할 수가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기습 효과를 어떻게든 내려고 야간 습격을 감행한다던지)을 시도하다가 미군의 화력에 일방적으로 짓눌리며 갈려나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소위 2차 세계대전 일본 반자이 돌격의 실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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