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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잡설)2차대전 독일보다 1차대전 독일이 훨씬 승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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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2 10:03:51

저 제목은 단순한 전력 통계만을 두고 거론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바로 그 통계와 실제 결과물의 격차가 전쟁, 특히 현대전이 단순 통계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너무나 많은 변수들로 인하여 예측이 거의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실제로 전력 통계만 보면 해당 통계 자료들을 종합한 결과물 예측 상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반년 내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박멸해야했습니다. 전황은 전~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구요.

 

여하간 단순 전력 수치만 보면 1차대전 독일제국군은 당시 무소불위의 세계 1위 최강 육군국으로써 한 전선에만 무리하면 300만의 병력을 투여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에 상비, 예비군 전원 포함해서 1300만의 전력을 자랑했는데 이는 서부전선에서 독일을 막아내는 핵심이었던 프랑스군의 두배(한 전선 투여 한계 120~150만, 총 전력 700만 안팎)에 육박하는 수치였습니다.

 

반면 1차대전의 핵심인 서부전선에서 독일을 맞상대해야할 프랑스는 이미 왕년의 챔피언 자리는, 유럽 판도에서는 독일에게, 세계 식민지 판도에서는 영국에게 1위 자리를 애진작에 내준 콩라인 중의 콩 말 그대로 홍진호의 위치에 있었지요.(정확히 말하면 세계 식민지 판도는 말고불변의 영국 1위, 프랑스 2위였으므로 그냥 시작부터 콩라인이었지만)

 

열강 후발주자로써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인구가 폭증하던 독일과는 달리 열강 선발주자로써 이미 100여년 전에 영국과 함께 세계를 제패하다시피한 이후로 꾸준히 저성장과 저출산, 산업 성장 둔화세를 겪던 프랑스의 인구는 당시 이미 독일에게 추월당한지 오래이고 영국한테도 추월당하네 마네하는 판국이었던데다 보불전쟁에서의 참패로 인한 이미지 실추로, 세간의 사람들 중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두배를 상회하는 저 강대한 독일제국군을 막아내리라 기대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독일 제국군은 내실이야 어떻건 간에 군사 교리, 대전략 계획 면에서도 프랑스나 러시아를 훨씬 상회하는 발전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요. 제대로 된 군사 작전 계획 절차도 없던 프랑스나 아예 귀족 지휘관들의 주먹구구식 판단에 의존하던 러시아에 비해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대단히 정교한 전략 계획을 짜고 플랜을 차근차근 실행시켰던 것이 당시 독일 제국군이었으니 1차대전에서 독일군이 거의 모든 전선에서 교환비 우세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또한 독일 장비, 훈련량의 질적 수준도 충분히 세계 제-일!을 외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1:1로 육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이길 나라는 단 한 나라도 당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참고로 그때까지의 미국은 '어린 군대'로써 경험도 없고 미국 본토가 위협받을 일은 거의 없었던지라 굳이 유럽 열강들처럼 군비 증강에 치중할 이유는 없었기에 1차대전 시작 직전 고작 200만 남짓의 '총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전쟁 시작 시점에서 미국은 독일의 상대가 전혀 될 수 없는, '약한 육군'의 나라였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미국이 1:1로 이길 수 있는 유럽 열강 자체가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기껏해야 이탈리아하고 그나마 또이또이했을런지. 물론 체급이 깡패라고 참전을 결정하고 대량 징발을 개시하자 그 두배인 500만 가량으로 총전력이 급상승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프랑스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수준이었고 서부전선에서의 미군 단독 작전에서 미군이 보여준 풋내기스러운 모습(전쟁에 통달한 상태인 독일제국군에게 육지 총력전에서 풋내기나 다름없던 당시 미군은 실컷 농락당했던)을 고려하면 질적으로도 기대할만한 면모는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 만약 미국이 유럽과 붙어있는 형태이고 그러면서도 저런 전력 수준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면 독일이건 프랑스건 1:1로는 1년내로 미국을 밀어버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는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1차대전은 결국 미국이 참전해서 이긴 것'이라는 것과는 꽤 다른 통계 수치임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지요. 물론 춘계대공세가 결국 좌절되고 뒤이어 미군이 참전하여 한달에 25만씩 지원병력을 프랑스-영국 연합사령부에 배달하자 이게 독일의 전의를 꺾어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미군 병사들의 전의는 아주 훌륭했고 프랑스 장성들은 이를 크게 칭찬하며 미군 병사들을 잘 운용한 편이었지요.(1차대전 서부전선 연합군의 최고사령부는 명목 상이야 프-영 연합 체제이지만 사실상 프랑스 군 수뇌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형태였고 영국 지휘관들은 이에 잘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아니꼬와서 말을 잘 안듣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1차대전의 미국군은 속된말로 별로 한 것은 없지만 킬딸은 제대로 친 셈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이 킬딸을 게임에서 볼 때에야 욕하는거지 실제 전쟁에서는 제대로 킬딸칠 것도 못쳐서 결과가 뒤집히는게 부지기수이니 킬딸 잘 치는 것도 칭찬은 충분히 받아야 마땅하다 하겠네요. 또한 이러한 1차대전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미국 육군의 수준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미국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었습니다.


한편 동부전선으로 넘어가보면 단순 수치 상으로는 총합 전력 1200만의 전력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1300만의 독일 제국과 능히 육군력을 겨뤄볼만 하긴 했습니다. 문제는 전쟁 극초반부 독일 장성들이 당시 러시아를 '허접한 프랑스ㅋㅋ, 그보다도 더 허접해서 수만 많은 거적데기 반쪽군대인 러시아군ㅋ'라고 자만하며 러시아군을 매우 우습게 여긴 것처럼 러시아군의 장비, 화력의 질적인 수준은 독일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동부 전선에서 평균적으로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1 : 1.3 내지 1 : 1.4의 교환비를 내었고 핵심 전선에서는 심각하면 1 : 2.5의 교환비까지 벌어질 정도로 러시아군은 처참하게 독일군에게 털렸으니 1:1로 붙는다고 가정한다면 당시의 러시아 제국군도 독일 제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참고로 프랑스, 영국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평균적으로 1 : 1.1의 교환비를 보였습니다. 1.1 쪽이 프랑스, 영국군. 종종 영국군 단독 작전으로 넘어가면 1: 1.5의 처참한 교환비가 발생하기도..)

 

그러나 이러한 통계와는 별개로 그 내실에서는 오히려 막강한 전의를 보여주던 프랑스군, 러시아군과는 달리 독일군의 내부 트러블이 상당하였는데 이는 프로이센 왕가와 귀족집단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독일을 통합한 독일 제국 특유의 '귀족 장교, 평민 부사관-병사의 대립'이라는 치명적인 문제로 이어진 것이 한몫합니다. 뭐 훗날 2차대전의 일본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긴 한데 1차대전 독일제국군의 병영부조리와 구타 가혹행위는 유럽 열강 군대들 중에서는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고 이는 그만큼 부조리와 구타가 아니라면 귀족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형편없는 동기에서 기인하는 평민 병사들의 낮은 전의를 고취시키기가 꽤나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훗날 2차대전의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민주정 수호, 국민 수호와 같은 전의를 자발적으로 고취시킬만한 동기가 전혀 없던(천황과 귀족 장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형태였으므로)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 병사들의 전반적인 전의 미비, 동기부여 저하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일본 군부가 이를 타개하고자 극도의 부조리와 구타로 병영 질서를 유지하려 들게 되었으니 은근히 비슷한 면모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1차대전의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굴욕감으로 인해, 당시 민족주의가 유럽을 잠식해가던 상황이었으니만치 그만큼 민족적 자존심에 큰 흠집이 났다고 스스로 여겨 일개 병사들의 복수심조차 대단했고 결국 제 2 제정을 붕괴시키고 민주정과 민주주의를 재구축했으며 이 대의에 기반하여 국민과 국민의 정부를 수호하겠다는 자발적인 동기가 병사들에게 전반적으로 강하게 작용하여 전의 고취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러시아군은 사실 부조리와 구타는 독일군 못지 않기는 했지만(러시아도 귀족 장교, 평민 병사의 대립 구도는 같았으니) 독일에 비해서 교육 수준이 낮던 당시 러시아 평민들은 그만큼 자유주의 사상에 미비했던지라 '진심으로' 황제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훨씬 강했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가 있던 독일 평민들에 비해서 통제가 훨씬 쉬운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평민 출신 러시아 군인들은 대개 보드카 한 잔 주면 눈이 돌아가서 차르 만세를 외치며 우라돌격을 해댈 정도로 특이하지만 강렬한 전의를 보여주었지요.

 

이는 독일군이 아무리 질적인 우세를 앞세워 러시아 군인들을 동부 전선에서 마구 도륙내더라도 독일 장성들이 예측한 '오합지졸 러시아군을 초전박살내면 슬라브놈들 지레 지려서 화평 협상이나 하려들겠지 뭐ㅋㅋ' 와는 아득히 거리가 멀 정도로 강렬한 전의를 드러내며 미친듯이 달려드는 러시아 물량 웨이브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는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절반 밖에 안되는 프랑스군이 강렬한 전의와 함께 영국군이 지원오기 전까지 끈덕지게 버텨서 마른 강의 기적을 구현하고 전선을 고착화시켜 독일 제국이 추구하던 '초살시켜서 빠르게 전쟁을 끝낸다.'라는 큰그림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된 셈입니다.

 

거기에 통계 수치 상의 수적, 질적 수준이 상당히 괜찮았던 오스트리아군이 위와 같은 내부 문제가 독일보다도 훨씬 심각해서(민족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치는 판국에 다민족 연합체인 오스트리아 제국군 병사들의 전의란 사실상 제로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독일의 오른팔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으니 독일은 나홀로 프러영을 상대하는 꼴이 되어버렸지요. 1차대전 독일 제국의 패배는 러시아를 우습게 보다가 끈덕진 러시아의 공세에 발목을 잡히고 이 덕을 입으면서 끈기있게 방어를 성공시킨 프랑스군의 마른 강 전투 승리 시점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에 비해서 2차대전 시작점의 나치 독일의 군세는 폴란드 침공전 개시 시기에조차도 단순 통계 전력 상부터가 프랑스보다 열악한 상태였고(실상은 그렇지 않았지만) 소련에게는 사실상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해보였지만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심각한 내부적 문제점으로 흔들릴 때에 도리어 1차대전에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매우 강력하게 단합된 군사적 기틀을 다진 상태였기에 도출된 결과물은 그야말로 정반대였다고 하겠습니다.


1차대전 독일 제국의 귀족 정치가, 장성들은 1차대전 종료와 함께 터진 독일의 민주 혁명과 민주주의 내각 구성과 함께 그 힘을 잃고 그 자신들의 대저택 영지에서 연금이나 타먹는 퇴물로 전락했는데 독일 군부를 평민 내지 하급 귀족 출신 장교들이 장악해버리면서 1차대전 독일군의 고질적인 '귀족 장교 vs 평민 부사관-병사'의 대립이 해소되었으며*1 또한 그러한 새로운 군부 장성 집단의 실력이 전반적으로 1차대전 이상으로 출중했으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나치스가 독일 민심을 장악하면서 내건 캐치프라이즈 사상이 국가적인 열망과 단결을 이루어내었다는 것이 아주 주효했다 하겠습니다.

 

*1 (굉장히 아이러니한 부분이 2차대전의 나치독일은 1차대전의 독일 제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명백한 악의 축인, 사악한 집단이 맞는데 정작 군대 내 병영부조리, 구타가혹행위는 역으로 1차대전 독일제국군이 심각했고 반대로 2차대전 나치독일군은 굉장히 온화하고 평등한 내무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비록 글러먹은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건 나치독일군은 병사들이 충분히 자발적으로 전의를 고취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는 시스템의 수혜를 입었고 그만큼 억압적으로 병사들을 통제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것이었지요.)

 

바로 극단민족주의와 인종우생학이지요. 1차대전 독일제국군의 전쟁 명분은 결국, [위대한 황제 폐하와 제국 정부의 무구한 영광을 위해 영프를 때려눕혀 그들로부터 식민지를 대량으로 뜯어내서 우리 독일이 세계제일의 식민대국이 되도록 하자!]입니다. 딱히 국민들에게, 평민 병사들에게 와닿을 내용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2차대전 나치독일군의 전쟁 명분은 [독일 민족 전체의 생존권 확대, 모두가 다 잘 살아갈 수 있는 신세계의 도래, 우리는 우월한 인종이고 우리 독일인과 같은 우월한 인종/민족이 세계 다른 열등한 인종/민족들을 지배하고 멸종시키고 노예화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여러분들이 그것을 누리게끔 총통께서 인도하신다!]라는 것이고 이에 1차대전 패배로 인한 경제 침체에 대한 극복 요구(강인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이걸 극복해주길 ㅜㅜ 정도의 사고방식)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당시 독일 국민들의 미비한 이해력과 공감대가 섞이면서 그야말로 독일 정부와 대중 전체가 하나된 목표 의식을 지니고 단결하여 전쟁에만 몰두할 수 있게끔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자발적인 동기부여로 일치단결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반면 프랑스의 경우 1차대전에서 용맹하게 잘 싸우긴 했지만 그 대가로 인구대비 사상자로 따지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세계최강 독일제국군을 정면으로 상대하던 입장이었으니) 국가가 되었으며 그 후유증이 엄청난 상태였습니다. 당시 독일에 비하자면 훨씬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였으니 민주정 특유의 '그래서 이 책임은, 여기서 도출된 문제의 해결점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두고 국민들과 정치가들의 정서가 분열하고 갑론을박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게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여도 '민주주의 국가라면' 매우 당연한 것이고 이걸 민주주의를 택하면서 얻는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해야하지만 하필 시기가 '독재와 전쟁이 민주주의적 의견보다 우선시되는' 시기였고 여기서 이러한 분열상은 아무리 민주주의로써 당연한 면모였다고는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프랑스에 영 좋지 않은 결과물을 가져다 준 셈이라 하겠습니다.

 

국민들은 분노하고 정치가들은 사상을 두고 내가 옳네 니가 옳네 대립하며 국론을 합치하지 못하며 군부 인재들이 물갈이되지 않은 채로 1차대전 수준의 구태의연한 사상을 가진 늙은 장성들이 정치가들과 국민들의 눈치를 보며 교리 정립, 전략 계획 수정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지요.

 

소련은 스탈린의 공산당 일당독재(사실상의 스탈린 일인독재) 체제가 구축되었지만 공산당 내부 파벌 정리 및 스탈린 일인독재 체제의 확실한 안정화를 위해 '대숙청'이 진행되었으며 최고위 장성들부터 말단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수천명의 장교진이 도륙당했던지라(별 단 장성들이 100단위로 죽거나 굴라그행이었는데 사실상 군부 운영 능력을 반갈죽해버린 꼴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병사들의 전의야 공산주의적 사상 무장 하에 부르주아지 파쇼들을 몰아내자!라며 충만할지언정 이를 지휘할 지휘관 수준이 전반적으로 급락해버렸으니 초반에 나치독일군을 제대로 상대해내기 어려울 수 밖에 없게 되었구요.

 

이는 명백히 전력 상 압도우위였던 1차대전 독일제국군이 프러 어디 하나 제대로 밀지도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갇혀 죽은 것과는 달리 전력 상 프와 동급에 러보다 한참 밀리던 2차대전 나치독일군이 프를 밀어버리고 러도 거의 밀어버리기 직전까지 가는 기염을 토해내는 아주 주요한 상호 원인들로 작용하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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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02 09:37:03

잘봤습니다.

그리고 미래 동력 갈아버린 2차대전 소련 ㄷㄷ

OP
1
Updated at 2020-07-02 09:42:36
스탈린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사실 저 대숙청이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실제로도 군부 내에서 스탈린 제거 논의가 오고갔다는 추정도 있기도 하고 만약 스탈린이 대숙청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에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만일 히틀러가 또 소련을 침공했다면 아마 소련이 훨씬 쉽게 나치독일을 저지했을텐데 그런 수순이라면 여기서 승전을 이끌 군부 지휘관들의 정치적 입지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스탈린의 권좌를 자연스럽게 위협하는 형태로 이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대숙청 이후 거의 모든 군부 장성, 장교들을 당에서 파견하는 정치장교들로 감시하고 스탈린에게 직통보고되는 시스템을 고착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스탈린은 당으로 군부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형태를 갖출 수 있었지요.
 
한편 당시 소련의 통계적 전력은 나치독일군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고 장기 전쟁 수행 능력도 우위였다고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독소전쟁 초반부에 모스크바 털리기 일보직전까지 순식간에 털린 가장 큰 이유가 결국 지휘부의 무능으로 인한 지휘체계 부실이었음을 고려하면 스탈린의 대숙청은 스탈린 본인과 소련 공산당에게는 필요한 일이었을지언정 러시아 국민 전체에게는 그냥 죄악이나 다름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2020-07-02 09:44:21

독일 통일하고 인구가 프랑스보다 2천만명 많았더군요
공업화수준도 물론 높고

OP
2020-07-02 09:47:05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후부터 프랑스는 경제 전반의 장기 침체에 빠진 상태였고 저출산이 고착화되었던지라 독일에게 인구 수를 애진작에 추월당한 상태였지요

2020-07-02 09:45:35

2차대전에 비해서 1차대전은 잘 모르는데 글 잘봤습니다.

OP
2020-07-02 09:47:24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

2020-07-02 09:45:57

근데 승세가 있었다기보단 전력이 좋았다 정도로 봐야될듯

OP
2020-07-02 09:49:19
통계 수치적으로 보면 프랑스를 4개월 이내로 박살내서 평협으로 끌어내어 반신불수로 만들고 러시아 오합지졸들은 가볍게 막아내주다가 프랑스를 끝장낸 뒤에 총부리를 돌려 러시아까지 마무리한다라는 골자는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승세가 있었다'라고 기술한 것인데 정작 실상이 그렇지 않음을 또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요(세부적 전략 미스들도 원체 잦았고)

2차대전 나치스는 정작 통계 수치적으로는 프랑스 공격조차도 승세가 아예 없다시피한 수준이었는데 성공시켰으니 전쟁이란 항상 변수덩어리이지 싶네요.
Updated at 2020-07-02 09:49:16

1차대전 당시의 독일은 현재 폴란드땅의 2/3(힌터포메른, 슐레지엔,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 포젠)과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덴마크의 북슐레스비히까지 점하고 있었고 서부의 베스트팔렌과 동부의 슐레지엔을 바탕으로 엄청난 공업을 돌리고 있던게 프랑스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죠. 심지어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에서 쏟아져 나오는 곡물도 프랑스 입장에서는 만만치않은 부담이었는데 문제는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도 실수를... 개인적으로는 말씀하신대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당나라 군대여서 실상 도움이 안된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루마니아, 이탈리아는 비교적 잘 때려잡았는데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진짜 적인 제정러시아를 제대로 상대 못해서 독일이 2:1로 홀로 싸워야했고, 아무리 독일이라도 대륙에서 2:1은 부담스럽죠.

OP
2020-07-02 09:51:12
프랑스가 알자스 로렌에 그렇게나 목을 매었던 것도 과거 중근세 농경 시대에나 프랑스 땅이 엄청난 꿀 땅인거지 근대 산업화 이후부터는 석탄이 적은 프랑스 땅은 독일 땅에 비해서 하등 나을게 없던 땅인지라 알자스 로렌을 비롯해서 석탄채굴권 확보가 가능한 땅을 점유하는 것에 프랑스가 그렇게나 미친 듯이 목을 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독일은 중세 시대에는 덩치만 크지 숲 천지인 빛 좋은 개살구소리나 듣다가 근세 이후부터 슬슬 포텐 터뜨리더니 근대 산업화 이후부터는 대량의 석탄과 풍부한 목재자원을 기반으로 급속 산업화를 하기에 아주 적합한 꿀땅으로 변모했으니 ㅋㅋ
Updated at 2020-07-02 09:54:52

석탄채굴권은 근대 이후 이야기이고 프랑스가 왕정시절부터 허구한날 이야기하는 라인 강과 피레네 산맥 자연국경설 때문에 알자스로렌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죠. 앙리 2세때부터 본격적인 침탈이 시작됐으니...

OP
Updated at 2020-07-02 10:11:13
루이 14세가 유능한 인간이었으면 리슐리외, 루이 13세가 신롬을 분열된 반신불수로 만들어놓고 차지한 유럽 최강자의 입지를 기반으로 정말로 라인강 자연국경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ㅋ 군재는 없는 양반이 헛된 명예욕에만 찌들어서는..

여담으로 프랑스가 독일 방면을 위험시여겨 자연 국경을 확보하려들던 것은 중세부터 유구한 일이긴 했지요 ㅋㅋ 신롬 견제는 거의 항상 하던 일이었으니.. 필리프 2세 전까지야 플랜테저넷 왕조랑 프랑스 전체 지배권 두고 푸닥거리하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지만 필리프 2세가 플랜테저넷을 족쳐버리고 신롬-잉글 연합군까지 개발살내버린 이후로 카페티앙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자 미묘하게 신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었는데 그 전성기가 이어지면서 필리프 4세 시기에는 성전기사단을 제거하고 교황청까지 허수아비로 만들고 카페티앙 프랑스가 신롬을 제끼고 최강자의 위치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신롬 입장에선 다행이라면 다행인게 카페 직계가 필리프 4세 이후로 연속 요절로 단절되고 이후 방계인 발루아 가문이 백년전쟁으로 카페 왕조 전성기로 축적한 국력 다 날려먹으면서 합스부르크 패권 기틀을 다질 시간적 여력이 발생했다고 여겨지네요. 합스부르크 패권 구축 이후의 이탈리아 전쟁은 발루아 가문이 부계 선조인 카페 가문의 유지를 받들어 유럽 최강자 자리를 노리려고 신롬에게 덤벼든 일종의 발악에 가까웠다고 생각
Updated at 2020-07-02 10:08:21

합스부르크 왕조도 알브레히트 1세가 암살당한 이후 가문 위세가 많이 쪼그라들었는데 루돌프 4세의 참칭, 룩셈부르크 왕가의 단절,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열, 결혼 상속(케른텐, 크라인, 티롤)을 잘 이용하면서 권토중래에 성공했죠.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리적 특성상 독일 중부로 나가기 힘들고 보헤미아-헝가리와 접했던게 나중에 결혼 상속으로 이 땅들을 먹어치우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기스문트 사후 프리드리히 3세가 무능해서 한동안은 정말 위험했지만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가 잘 수습하기도 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무능한데 너무 오래 살아서 정적들이 다 알아서 죽어줬죠

OP
2020-07-02 10:33:40
룩셈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먹은 시점에서 신롬 장기 세습 계승도 충분히 가능한 입지를 얻은 셈이었는데 단절된게 진짜 너무 아쉬울 듯 싶습니다 ㅋㅋ

여담인데 웃긴게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은 그 시절 룩셈부르크 가문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가문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네요ㅋㅋ 혈통상으로는 카페티앙 계통 부르봉-파름 가문(귀천상혼 때문에 계속 나사우계 가문명을 쓰고는 있지만)이니
Updated at 2020-07-02 10:08:28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가 독일의 공세를 버텨내는데 성공하고 유틀란트 해전 이후로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이 없더라도 독일이 승리했을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대전 후반기의 프랑스의 전쟁수행능력은 독일 못지 않구요. 대체역사게임인 카이저라이히 마냥 독일이 영국의 봉쇄를 뚫어내거나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영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OP
Updated at 2020-07-02 10:10:30
넵 그래서 말씀대로 '통계 수치 상으로나 독일 제국이 승세가 있다'라는 글입니다 ㅋㅋ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통계 수치로는 승산이 없던 나치독일은 다른 결과물을 도출'했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그만큼 내부적으로 변수가 많고 또 지휘부의 역량에도 통계 수치 상의 전력만큼 큰 역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1차대전 독일군이 시스템적으로 프러보다 우월한 면이 많았다지만 내부적 문제도 있었고 그러한 독일 장성들도 전략적 실책을 여러 차례 범했으며 슐리펜 계획도 따지자면 이미 시작부터 본인들의 그릇된 전략안으로 말아먹고 시작한 꼴이었으니
2020-07-02 10:31:20

제목만 읽고 본문은 대충 읽고 댓글을 쓴 결과물입니다 ㅜㅜ
어쨌든 2차대전 항복의 이미지 때문에 굉장히 폄하받는 부분이 있지만, 1차대전 프랑스는 굉장히 잘 싸웠죠. 2차 대전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모양새라면 1차 대전 프랑스는 보급, 전투 모두 협상국의 핵심이었으니까요.

OP
2020-07-02 10:33:59

그 놈의 2차대전만 아니었어도 백기 밈은 없었을텐데 크흠..

2020-07-02 10:12:34

호부견손의 아이콘 빌헬름 폐하 ㅠㅠ

OP
Updated at 2020-07-02 10:19:47
사실 군사적인 면에서 빌헬름 2세는 쩌리였고 초기에는 힌덴부르크(이 때부터 이미 루덴도르프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중기 이후부터는 군부 최고 수반에 오른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최고 수권자로써 독일 군 전체를 지휘하긴 했는데 문제는 빌헬름 2세가 아직 군부에 영향력 행사가 상당했던 극초반부에 다소 초를 치는 괴악한 결정들을 한 것도 독일제국군 패전에 한 몫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ㅋㅋ

여담으로 루덴도르프와 호프만의 행보가 독일제국군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지 않나 싶은데 루덴도르프, 호프만은 찰떡궁합으로 엄청난 지휘 능력을 선보였지만 정작 호프만의 출신 혈통 + 호프만의 평소 소위 말하는 '고귀하지 못한 행실'(밤새 술 마시고 소시지 퍼먹고 비만해져서 말도 잘 못타는 면모 등등)로 인해 능력이 출중함에도 결국 크게 출세하지 못하면서 호프만과 루덴도르프의 사이도 멀어지고 호프만의 보좌가 없던 루덴도르프가 전략적으로 단독 결정을 행사할 때 보여준 한계점 등등이 당시 독일제국군에 만연한 혈통주의의 문제점을 꽤나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프랑 도긴개긴 수준이던 1차대전 독일과는 달리 확실한 악의 축이던 2차대전 나치독일은 악의 축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러한 인재 기용 면에서는 매우 유연한 면모를 보인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지요
2020-07-02 11:23:27

2차때 프랑스의 그 6주는 진짜...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을 듯 싶네요 어느쪽이던간에 말이죠.

독일 국방군 장성들도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은 힘들고 좀더 전력을 충원해야 한다 생각했으며 낫질작전도 반신반의 했던 작전인데다 세세하게 보면 빈틈도 엄청 많았던게 전격전의 허상인데 그걸 넘은게 연합군 수뇌부의 막장판단력이라...

국방군 장성들도 처음에는 히틀러 저놈이 나라 말아먹는다 하고 생각했다 낫질작전 이후 "아니 히밤 이게 되네" 하고 점점 동조하기 시작했죠 ㅋㅋ 만슈타인이 진짜 인성은 위선자지만 능력하나는 천재적인듯

OP
Updated at 2020-07-02 11:32:03
2차가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 것처럼 1차도 예상 밖의 상황인 것이었는데(그만큼 독일제국군의 통계 수치 상의 위력이 압도적이었던) 이 두 전쟁 모두 전쟁의 결과를 단순 통계 상의 전력 차이만으로 예측하기는 무리가 있음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지 않나 싶습니다.

프랑스가 이 두 대전에서 이런 면을 아주 제대로 보여줬지요 ㅋㅋ 수치 상의 전력 차이만 보자면 누구나 패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전력 수준 차가 보이는 1차대전에서는 그런 전력 차이에도 매우 잘 싸우고 버텨내는데 성공했는데 정작 수치 상의 전력 차이는 그다지 차이도 없고 오히려 우세한 점도 많았던 2차대전에서는 순식간에 박살났으니
2020-07-02 11:35:08

1차 때 프랑스는 절대 깔수없고 대놓고 탱커 잘해줬죠 뭐 ..ㅠ

근데 탱커 역할 너무 충실히 한게 2차때는 문제였고 자기들 창이 될 체코와 폴란드를 버린 판단이란..  

OP
1
Updated at 2020-07-02 11:54:35
체코 버린건 가능한한 요구 조건 해달라는거 들어주면 일정 수준에서 만족하고 더 막나가진 않겠지 ㅜㅜ 이런 안일한 마인드로 프랑스와 영국 정치인들이 가득차있었으니..

폴란드를 버린 것은 결국 1차대전 이후로 너무 엄청난 피해에 이후 전쟁은 절대 안된다는 여론이 프랑스의 대다수가 되었으니(이러니 도리어 전쟁을 하자!고 주장하는 프랑스 극우파 드 라 로크의 세력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요ㅋㅋ;) 정치인들도 마지막까지도 피해가 심할지도 모르는 선제 타격은 가하지 말자는 식으로 의견이 기울어진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전쟁이란게 군부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니 말이지요

사실 이런 모든 요소가 단순한 '숫자로의 전력'이 실제 전쟁 결과에 그대로 연동될 수는 없다는 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가 전체를 전쟁이라는 한가지 목적에 총체적으로 몰아가 단결시키는 독일과 국가 전체가 전쟁을 피해야한다며 움츠리고 전력 운용에 경직된 면모를 보이는 프랑스가 붙는다면 독일이 이기는건 결과론적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문제는 그 총체적으로 몰아가 단결시킨 근본적인 사상부터가 틀려먹었다는게 나치독일이 영원불멸의 절대 악인 이유이기도 하겠습니다ㅋㅋ
2020-07-02 17:56:25

매번 식견이 넓어지는 글 감사합니다.

2차대전에서 민주주의 정착이 프랑스에게 역으로 안좋은 결과를 주었다는 부분은

아직 진행중이긴 하지만 세계 각국이 코로나 시국을 대처하는 모습의 차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네요.

OP
Updated at 2020-07-03 19:34:36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

민주주의로 인한 자연스러운 국론 분열은 그렇다치더라도 당시 시기가 원체 '다음 세대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가'를 두고 온갖 사상이 판을 치던 시기인지라 지금처럼 확실하게 정할만한 노선이 없었다는 것도 치명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즉 지금이야 프랑스나 한국에서 국론이 분열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상 베이직을 절대로 훼손하고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의 분열이기에 봉합하기도 그만큼 쉬운 편이지만 당시의 프랑스는 온갖 사상이 세계를 휘몰아치던 시기의 민주주의 국가였으니 그 분열은 단기간 내에 봉합이 거의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드 라 로크, 도리오의 극우파(이 둘 역시 노선이 또 다릅니다.), 모리스 토레즈의 극좌파(극좌파도 내부 노선에서 스탈린주의를 따르자는 입장과 파리 독자 코뮌을 주장하는 입장이 또 갈라지고)가 날뛰고 있었고 기존 3공화국 민주 노선 정치가들도 이렇듯이 혼란한 상황에서 국정을 안정화시킬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심지어 이런 판국인지라 왕정복고주의자들까지 다시 나타나서 설쳐대고 있었지요.(그 왕정복고주의자들도 부르봉파, 도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로 갈라져있다는게 함정..;)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에게 정말 좋지 않았겠지만 나치스의 공격을 당장 막아내기 위한 구심력 있는 정부를 구축하려면 드 라 로크의 극우파가 세를 잡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그 결말은 파쇼 이탈리아만큼이나 나쁜 파쇼 프랑스의 탄생이었겠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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