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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정주국가가 유목제국을 무너뜨린 사례들 - 사산 조 이란 : 호스로 1세 아누쉬르반 황제(서기 531~579)의 에프탈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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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8-05 14:12:00

근대 이후에야 유목국가들은 그 특유의 부실한 경제력으로 말미암아 어마어마하게 벌어진 힘, 기술의 격차로 인해 제 아무리 유목기마전사들이 강인하더라도 화기와 대량생산의 힘을 가진 농경국가들에게 파멸당하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게 일이었던지라(그나마 체급이 좀 있는 유목민이었던 몽골 정도나 간신히 청의 신하국으로 빌빌거리며 국가 꼴은 연명하는 수준이었지요.) 근대 이후의 발전된 정주제국들이 유목제국을 박살내는 것은 그렇게 회자될 일은 아닌 편입니다. 마땅히 이겨야할 정도로 강한 존재들이 마땅히 이긴 정도라고 생각.


그러나 그런 정도의 격차를 벌릴 수는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의 농경 정주국가들은 일단 '유목제국이 나오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었고(조선의 여진족에 대한 주기적 예방전쟁이 대표적. 여진족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목민들은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만약 인구 수 100만이던 200만이던 통합에 성공한 유목제국이 출범한다면 그 특유의 사회구조 상 성인 남성 인구 대부분을 전투 인력으로 쓴다는 방식 덕에 10만이고 20만이고 엄청난 규모의 전력을 자랑하는 '정예인데 수도 많은 기병스웜'이 탄생한다는 말과 같은지라 이를 원천적으로 때려잡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체급의 거대 정주국가로써도 정말 하드코어한 난이도였습니다.


최선은 엄청난 돈을 발라 요새 지대를 확충하고 자연국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방어에만 일관하다가 유목제국이 유목민들 특유의 불안정한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는 분열적 계승구조로 자체 파멸하는 시간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이었고 정주국이 오히려 전성기의 유목제국의 초원지대 영토로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은 자살로 향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지요.(점령지 유지가 안되어서)

 

물론 그럼에도 정주제국이 유목제국을 파멸시키는게 전근대에 마냥 불가능했느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화기와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선제공격으로 초원지대의 어딘가에 있을 유목민 메인 캠프를 털어 유목제국을 한순간에 멸망시켜버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곽거병 :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ㅋㅋ)한 일이지만 유목민들의 사회 구조 자체가 농경민들과 같은 고정된 부동산(농토)과는 달리 유동적인 목초지 찾기에 연관된 것인지라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와 정착지를 찾아 병사들만이 아닌 가족, 씨족 집단 단위로 한꺼번에 농경 국가의 영역 부근으로 몰려오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데 이걸 끌어들여 적절한 위치에서 없애버릴 경우 해당 유목민 집단의 완전 멸망(인구가 적으므로) 내지 반신불수로 이어지게 되었지요.


실제로 곽거병 같은 특이케이스를 제외한 전근대의 유목제국 파멸의 케이스는 같은 유목민 세력에게 메인캠프가 털려서 산산조각으로 붕괴하거나 저렇게 한꺼번에 몰려들다가 강력한 정주제국이 적절한 지리 포인트에 끌어들여 단숨에 섬멸해서 존재를 없애버리는 경우였다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사산 조 이란이 매우 막강했던 에프탈을 파멸시킨 사례를 꼽아보겠습니다.

 
 
이란 지역은 티베트 고원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유목 사회도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주 농경 사회 체제를 가진 지역인데 그러면서도 강력한 기병대를 구축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는 특색도 티베트 고원과 비스무리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란 고원을 제패한 세력은 이를 배후지로 삼아 주변의 저지대 농경지로 나아가(메소포타미아, 옥수스) 이를 장악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화와 집약 농경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로 알려진 사산 조 이란 제국도 이와 마찬가지였지요. 그러한 사산 조 이란이 로마 제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지도 못하고 이어 오랜 왕위다툼과 내부 소요로 쇠락하던 즈음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등극한 유목 제국 에프탈(아마도 5세기~8세기)은 당대 최강의 유목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럽에서 활동한 훈족과 비교하기 위해 '백훈'이라고도 불린 이 에프탈은 오랜기간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확립하면서 튀르크계와 토착 이란 유목민 집단이 섞이면서 흉노 출신(추정)임에도 백인화(이란화)한 세력으로 여겨지는데 온갖 동아시아 유목민들이 중국에서 깽판을 치던 위진남북조 시기와 에프탈의 출범이 겹치는지라 에프탈은 같은 유목민 세력끼리 누가 더 빨리 중국화-농경정주화하여 중국의 패권을 잡을지 대결해야하는 혼란한 중국 쪽보다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목 제국 그 자체로써의 힘을 기르기로 결정하고 중앙 아시아 방면으로 서쪽으로만 나아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에프탈은 옥수스와 타림 분지, 쿠탈, 북인도, 서부 티베트 전역을 공격하며 티베트인, 북인도인, 이란인, 타림 분지의 이란계 제민족들의 공포로 군림하였고 에프탈의 깽판 규모는 유럽에서 깽판을 쳤던 아틸라의 훈족보다도 훨씬 거대한 범주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에프탈은 거대 정주제국이지만 쇠락해가던 사산 조 이란 제국을 약탈 맛집으로 간주하고 허구한 날 들쑤셔대었고 아예 이란 제국으로부터 정기 상납금을 받는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려 들기에 이르렀지요.

 

이러한 에프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국의 주요한 농경지 중 하나인 옥수스가 황폐화되었으며 이 와중에 왕위 계승 내전을 두고 페로즈가 형제인 호르미즈드 3세를 없애고 제위에 등극하고자 에프탈과 손 잡아 그들의 군세와 함께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군하여 호르미즈드를 제거하고 20대 황제인 페로즈 1세로 등극하면서 전성기 로마 제국에게조차 수도가 털릴 지언정 상납금 바치는 조공국이 되지는 않았던 이란 제국은 에프탈에게 정기 상납금을 바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페로즈 1세라고 이런 상태가 장기 지속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기에 몰래 국력을 비축하여 아르메니아와 에프탈에게 공세를 가하였지만 산악지대의 정주민들인 아르메니아인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아르메니아 장악에도 실패하고 그런 손실 와중에 유목제국으로써의 전성기에 돌입한 에프탈 군대에게 이길리가 없었으니 유목제국군 전통의 기동유인매복전략에 걸려든 페로즈 1세의 에프탈 원정군은 그대로 궤멸당하고 페로즈 1세까지 전사하게 되어버립니다.


페로즈 1세의 동생 발라시가 21대 황제로 제위에 올랐으나 그는 귀족들과 조로아스터 교단에게 휘둘리며 부패해가는 이란을 개혁하려면 이란 전통의 종교인 조로아스터를 버리고 기독교(아마도 그는 친 네스토리우스파였을 것으로 추정)로 개종하여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친기독교 정책을 펼쳤지만 이것이 제국 교단과 귀족 세력의 화를 사버리는 꼴이 되어 결국 페로즈 1세의 아들인 카바드 1세가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발라시를 축출하여 없애버리고 22대 황제에 오르게 됩니다.


카바드 1세는 그러나 발라시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오랜 왕실암투와 계승내전으로 인해 제국이 귀족들에게 마구 휘둘려 쇠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조로아스터 교단으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은 마즈다크 교를 옹호하며 마즈다크 교인들을 중심으로 귀족들을 억누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로인해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동생 자마습의 쿠데타로 폐위까지 당한 카바드는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에프탈에게 조공금을 더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군대를 지원받아 다시 제위를 탈환하였는데 귀족들을 제대로 억누른 것도 아니고 무려 서기 6세기에 공산주의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실현시키려들던 마즈다크 교 교리의 과격성(재산 완전 공유. 지금도 불가능한 이 개념이 당시에 가능할 턱이 없거니와 참고로 현대적 인권이라는게 없는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히 여자도 재산에 포함됩니다.) 은 이란 사회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에프탈에게 바쳐야하는 금액의 부담은 더욱 늘어나 이란 제국의 운명은 경각에 달린 것처럼 보였지요.


이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 아누쉬르반(불멸의 영혼)이라는 호칭으로 후세에 알려지게 된 호스로 1세로써 그는 부친 카바드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재빠른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형인 카부스와 마즈다크 교, 마즈다크의 교주를 모조리 잡아죽이고 정국을 안정화시킨 뒤에 조부나 부친과 같은 강경한 귀족억제정책을 완화시켜 채찍과 당근(전국 호구 조사를 통한 세금 재조정으로 귀족들의 수입을 절감 + 귀족들에게 각지의 군 사령관 직책 부여)으로 적절히 이란 대귀족들을 다시 왕실을 지지하게끔 만들었고 제국 연 수입을 무려 두배로 늘려 국고를 재확충하여 군단을 재정비 및 증강시킨 뒤에 이를 기반으로 에프탈에게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에프탈이나 훈, 그리고 후대의 몽골은 장비라던가 부족 구성 편제라던가 세부적으로야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전투 방식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사실 농경국가들이 수천년의 세월 동안 전략전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유목민들의 전략전술은 기동유인매복전략과 스웜전술로 사실상 고정된 수준이었는데 이는 그렇게 싸워도 화기의 등장 전까지는 충분히 농경국가 군대를 맞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유목민들끼리 싸울 때에는 저 전략전술 외의 다른 방식 자체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몽골이 에프탈이나 훈, 혹은 돌궐보다도 훨씬 더 성공적으로 거대한 정복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에는 정세의 운이 따랐으며 또한 몽골 자체가 에프탈이나 훈, 돌궐 보다도 더 거대한 유목 집단이었기에(쓸수 있는 인력이 더 많았기에) 그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전성기 돌궐 제국이 징기스칸의 몽골 고원 통일 직후의 몽골보다 더 많은 인구 수를 가졌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에프탈의 전력은 우리가 전성기 몽골 제국의 기마전사 집단을 떠올리는 것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텐데 이를 상대하는 이란인들 역시 유목민적 전통을 소소하게 유지하면서도 봉건적 농경 국가로써의 지배 계층의 강력한 중장정예기병화가 이루어지던 사회를 만들었기에 매우 강력한 기병 집단을 가지고 있었지요.


에프탈의 기마전사들

 

사산 조 이란의 기병들(전근대 농경국가의 기병들은 거의 죄다 귀족 내지 지주부농층임을 기억합시다. 부유하지 않으면 저만한 장비를 맞출 수가 없거든요. 전근대에 귀족들을 함부로 숙청 못하는 이유에는 저런 군제와 관련된 문제점도 있습니다.)

기존 전력의 무려 4배에 달하는 병력을 증강시킨 호스로 1세는 기습적으로 모든 상납금을 끊어버리고 옥수스 방면으로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감행했는데 외교적으로도 이이제이를 통해 에프탈을 완전히 멸하기로 작정한 형국이었습니다. 즉 앞서 언급했듯이 농경국가 군대가 농경지대를 수복하는거면 몰라도 초원지대로 유목제국 메인 캠프를 털러 가는 것은 전근대 시기의 기술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자살행위이지만 같은 유목민들끼리 초원지대에서 서로의 캠프를 털러 가는 경우는 훨씬 쉽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이용한 것으로 당시 동부 대초원-몽골고원에서 발흥하던 튀르크계 유목 세력인 돌궐과 손을 잡아 에프탈의 주력을 이란 제국군이 잡아놓는 동안 돌궐이 다이렉트로 에프탈의 후방을 찔러 메인 캠프를 털어버리고 에프탈을 총체적으로 부숴버리겠다는 대전략이었지요.

돌궐의 3대 가한(카간)이었던 목간가한(무칸 카간) 역시 초원지대의 기존 패자이던 에프탈을 매우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호스로 1세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결국 에프탈은 옥수스 방면 전역에서 이란 군대에게 털리며 옥수스 농경지를 내주는 와중에 초원지대의 메인 캠프들까지 돌궐 전사들에게 빈집털이 당하면서 유목민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인력 손실'을 당하면서 초원지대로 도망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그대로 몰락하게 됩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하는 거지만 유목민들은 가축들에게 먹일 초지만 있으면 언제든 재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었고 드넓은 초원지대에서 농사는 못 지어도 가축 먹일 초지는 널려있었기에 정주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아닌 이상 토지 그 자체에 그렇게 얽매일 필요는 없었지요. 그러나 그 가축들을 부리고 하나의 유목제국에게 종사해야할 피지배 유목 인력들이 학살당하거나 약탈당할 경우 제 아무리 강대한 유목제국이더라도 총체적으로 붕괴해야하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유목민 사회 구조 자체가 비교적 적은 인구 수로 유지되는 형태였기에 발생하는 문제였지요. 훗날 돌궐을 몰락시키고 초원지대의 패권을 자랑하며 장안을 약탈하는 등 떵떵거리던 위구르 족이 초원지대에서 메인 캠프들을 키르기즈족에게 다이렉트로 털려버리고 순식간에 몰락하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간 이로인해 초원의 패권은 돌궐이 독차지 하게 되었으며 호스로 1세는 염원하던 동방의 농경지 옥수스의 완전 수복을 성공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아시아 본토의 에프탈인들은 돌궐이나 위구르인에게 흡수당해 존재가 사라지거나 산간지역에 정착하여 작달막한 마을들에 옹기종기 모여살며 농사를 짓는 정주민으로 변모하였고 18세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훨씬 다수인 파슈툰, 타지크인에게 흡수당해 소멸하거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에프탈과 관련된 이름 하나가 현대에까지 남아있는데 아프간 민족 구성의 한 일파를 이루는 압달리 파슈툰 또는 아프간인들의 압달리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으로 이들은 에프탈과 파슈툰 간의 혼혈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편 전성기 에프탈이 북인도를 혼란과 공포로 빠뜨리며 북인도의 패자 굽타 왕조(서기 320~550)를 몰락시켰듯이 많은 에프탈 군소 집단이 여전히 북인도에 잔존하여 계속 활동하였지만 결국 6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북인도 왕조들에게 각지에서 공격받거나 동화-흡수되어(전통적으로 북인도가 엄청난 수준의 인구밀도를 자랑했음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합니다만)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란 제국은 옥수스, 아프가니스탄, 아랍 동남부, 아르메니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정점의 위세를 떨쳤는데 호스로 1세의 손자 호스로 2세가 무리한 로마 정벌 전쟁을 감행하지만 않았어도 사산 조는 로마처럼 오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단기간이나마 큰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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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8-03 21:09:41

페체네그족도 올인 러시 갔다가 동로마한테 그만...

OP
2020-08-03 21:11:49

1차 페체네그 전쟁 시기 페체네그 숫자가 호왈 80만(;)이었으니 진짜 말도 안되는 규모의 올인 러시이긴 했죠. 아마 실상은 실질 전투원 숫자가 10만도 안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호왈이 맞으면 그 몽골마저 능가하는 역대 최대급 유목군대 숫자;

2020-08-03 21:26:16

옥수스에선 옥수수 농사 짓나요? 어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OP
2020-08-03 21:27:05

쌀농사 짓는 모하메드 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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