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랴 인을 위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0
요즘 같은 시국에 다들 여행을 못가니 랜선으로 여행 욕구를 채우시는데..
세랴에 저보다 더 여행에 조예가 깊은 파마산 님 같은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나름 전공자로서 세랴 인을 위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나 풀어볼까 합니다. 오늘은 프리뷰 느낌
쉽게 쉽게 써야 하는데 전문적인 내용도 많고 해서 쉽진 않을 것 같은 ㅎㅎ 세랴 인들이 여행 가서 썰 푸는데 도움되면 좋겠군요 ㅎㅎ
1. 이거 왜 생겼냐?
1954년에 이집트 정부가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일강 상류에 아스완 댐을 짓기로 결정해서 아부심벨 사원 등 이집트 고대 유적이 졸지에 수몰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문제는 이집트 정부가 저 유적들을 다른 곳으로 제대로 이전할 능력이 안 되어서.. 결국 유네스코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 국제원조처(USAID) 등 여러 나라가 비용이랑 전문가를 지원해서 이전을 마칩니다. 그 전까지는 이런 문화유산 관리를 각 국가가 개별적으로 했는데, 이게 국제적으로 문화유산 보호 협력을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렇게 일일이 해체해서 옮겼습니다.
이래놓고 보니까 손이 갈 문화유산이 세계 각지에 참 많습니다.. 그래서 1972년에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줄여서 세계유산협약)'을 채택합니다. 그리고 유네스코 내에 세계유산센터(World Heritage Center)를 세우는데, 이게 유네스코 활동 중에서 못해도 1/3은 차지하는 핵심이 됩니다.
2. 비슷한 게 너무 많다.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차이가 뭐냐?
미디어에서는 이게 일반인들에게 다소 혼동을 줄 정도로 두서 없이 쓰는 경향이 제법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긴게 1972년 세계유산, 그 다음이 1997년 세계기록유산, 마지막으로 2003년 인류무형문화유산
일단 가장 큰 차이는 세계유산은 영어로 World Heritage "Site". 그러니까 일정 규모 이상의 면적(site)을 지닌 유산입니다.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 대상이고, 인류무형문화유산은 '만질 수 없는(intangible)' 공연, 매사냥, 음식 등의 무형유산을 말합니다 - 아니 이게 왜 만질 수 없어?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무형유산의 정의라 ㅋㅋ 뭐 쉽게 생각하면 언제든 바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유산?으로 봐도 되고요. 반대로 세계유산은 유형유산입니다. 형태가 있는 유산.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계유산'이라고 할 때에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만 해당됩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잘 섞어서 그냥 쓰지요....
세계유산 안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이 있는데 그 차이는 대충 이렇습니다.
문화유산 - 인류의 손이 닿은 건조유산(built heritage)
자연유산 -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지질물리학 등의 변화 과정, 생물학적 진화와 다양성 등을 보여주는 공간
복합유산 - 문화유산이랑 자연유산 양쪽 속성을 다 가진 경우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가장 큰 차이는 결정적으로, 자연유산은 굉장히 과학적이고 기준이 훨씬 객관적입니다. 그래서 논란이 별로 없지요....
3. 문화유산이란?
문화유산이 보통은 건조유산이라서 건물이나 도시, 고고학 유적지, 성곽, 계단식 논밭 같은 문화적 경관 뭐 이렇게 인간이 만들거나 인간의 손이 닿은 제법 규모 있는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 박물관에 있는 유물(artifact) 같은 거랑은 다릅니다. 뭐 바티칸 시티처럼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 - 박물관은 그 일부 - 박물관의 유물도 그 일부 이런 관계는 있지만..)
딱 하나 여기에 예외가 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밀라노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건 세계유산에 등록된 정식 명칭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수도원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ㅎㅎ 이건 건조유산도 아닌 일개(?) 미술품이 세계유산에 등록된 희귀한 사례입니다. 사실 최후의 만찬만 넣기 뭐하니까 그거랑 조화를 이루는 성당이랑 수도원을 한꺼번에 넣은 느낌.
최후의 만찬. 저는 밀라노 갔었을 때 하필이면 쉬는 날이라 못봤습니다 ㅜㅜ
아!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의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고, 그것과는 별개로 또 팔만대장경과 이걸 소장한 해인사 장경판전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4. 등록 기준
이건 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있어서 다음에 비슷한 이야기(아마 폴란드 바르샤바 이야기)할 때 깊게 다룰 것 같은데, 일단 문화유산은 기준이 6개가 있고 자연유산은 기준이 4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유산 제도가 시작되고 초기에는 달랑 1개 기준만 만족해서 등록된 세계유산이 많은데, 이미 그런 것들은 죄다 진작에 올라가 있고 최근에 등록되는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은 대부분 기준 몇 개씩 만족해서 올라갑니다. 1개 갖고는 이젠 부족하고 사실상 힘듦..
5. 복합유산
그냥 문화유산이랑 자연유산 짬뽕된 건데요 ㅎㅎ. 그리서 당연히 그 개수가 훨씬 적고 희귀합니다.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869개, 자연유산이 213개인데 복합유산은 여태 39개 밖에 안 돼요.
호주의 울룰루 국립공원 - 이건 고대 호주 원주민 사회의 자연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형성 과정을 보여줌
터키 카파도키아 - 이것도 화산암 지형의 독특한 지질학적 형태와 함께 거기에 동굴을 파서 거주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보여줌
페루 마추피추 - 아마존강 상류 안데스 산맥의 아름다운 모습과 각종 동식물의 풍부한 생물 다양성 + 고대 잉카 제국의 유적지
그리스 메테오라 - 독특한 돌기둥 절경 + 수도원 이상향
중국 우이산 - 숲으로 우거진 뛰어난 생물 다양성 보존지역 + 11세기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유교 발상지
중국 황산 - 중국사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문학(시), 예술(산수화) 작품에 영감을 남긴 소나무와 기암괴석이 있는 절경
중국 태산 -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성스러운 땅으로 도교 문화의 중심지이며 각종 기암괴석과 오밀조밀한 식생이 펼쳐져 있는 고원으로 둘러싸진 절경 (이건 진짜 깡패인게 총 기준 10개 중에서 무려 7개를 만족합니다..)
6. 한국은 몇 개?
2020년 현재 14개입니다. 문화유산 13개, 자연유산 1개 (달랑?)
- 해인사 장경판전: 팔만대장경 보관소, 종묘, 석굴암/불국사, 창덕궁, 수원 화성 성곽,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지, 경주 역사지구,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안동 하회/경주 양동), 남한산성 성곽, 백제 역사지구, 한국의 산사와 불교 사찰, 한국의 서원, 제주도 용암지형
한국의 세계유산 등재사는 나중에 썰 풀릴 일이 있을 겁니다..
7. 중국이랑 일본이랑 북한은 몇 개?
중국 - 문화유산 37개, 자연유산 14개, 복합유산 4개 총 55개
일본 - 문화유산 19개, 자연유산 4개 총 23개
북한 - 문화유산 2개 (고구려 무덤군, 개성 역사지구) 참고로 북한이 세계유산 등록할 때 한국 전문가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8. 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문가 놀이하는가?
보다시피 워낙 다학제적 분야라 온갖 분야에서 오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자연유산은 지질학자, 지구물리학자, 생물학자, 생태학자 등등 과학자 베이스가 많고요.
제가 한 발 걸치고 있는 문화유산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건축가, 도시계획가, 조경가, 지리학자, 보존과학자, 무기/전쟁 사학자 등등이 있는데 이들 간의 내부 알력 다툼이 또 제법 있습니다. 여기에 외교관들까지 끼어들어 아주 카오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썰을 풀겠습니다.
대충 앞으로 쓸까 하는 목록은
- 만약에 베네치아가 죽으면(이건 모 작가의 If Venice Dies의 책 제목입니다)
- 바르샤바의 유일무이한 세계유산 등재 이야기
-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기울어진 운동장
- 도시는 변화해서는 안 되는가? (유럽 여러 도시 그리고 리버풀 이야기)
- 세계유산 그까이꺼 안 하고 말지(독일 드레스덴)
- 예루살렘은 어느 나라의 세계유산인가?
- 탈레반 테러로 무너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은 다시 만들어야만 하는가?
- 어두운 역사의 유산(Dark Heritage): 아우슈비츠 수용소, 히로시마 원폭돔, 그리고 군함도
- 건축가 르 꼬르뷔제, 그 자체로 세계유산이 되다.
등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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