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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알못이긴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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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00:03:03

태종

왕자의 난 1,2 대학살을 자행한 것도

맞고 정도전을 죽였지만

정도전이 제시한 재상정치 제외하고

많은 부분을 활용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이라는 성군의

기틀을 잡아준 왕인데

과연 정도전 말대로 재상정치가 되고

입헌군주제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면

정도전의 뜻대로 흘러갔을까요?

세도정치급 혼란의 시작이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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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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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1-24 00:09:48

완전 If라서 알 수 없죠.


여담으로 세도정치가 된 이유는 왕실이 극단적으로 당파들을 잡아족치고 당파들이 도저히 왕권을 견제하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강화된 왕권이 정조의 사망, 외척 가문의 득세로 붕 떠버리면서 그러한 외척 세도가들에게 순식간에 국가 권력이 넘어가게 된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써 딱히 정도전의 유교 학자들 기반의 신권 중심 정치 체제와 족벌-혈통주의 귀족 집안의 세도 정치는 그다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도정치는 신권이 완전히 개박살난 뒤에 왕권이 제대로 된 공공행정 통치 체계를 구축하기도 전에 붕 떠버리면서 아무런 견제 장치없이 대규모 족벌 가문이 그 붕뜬 권력을 집어먹으며 발생한 일이죠

2020-11-24 00:12:19

정조가 일부 신하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데 그들을 정조가 살아있을때는 통제가 가능한데 어린 순종이 그들응 통제하는건 불가능했져

많은 매체에서 정순왕후김씨를 정조랑 사이 안좋게 그리는데 딱히 나쁜건 아니고 오히려 순종을 보호하는 쪽으로 갔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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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1-24 00:22:41
애초에 정도전 사후 조선 성리학 당파 체제는 영국 의회제처럼 변하기에는 내제적 한계가 분명했으므로 언젠가는 왕권에게 찍어눌려지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기는 합니다. 일단 근본적으로 조선 성리학 관료들은 영국 영주-의원들도 아니고 고려 호족들도 아니라서 자체적인 대규모 세습 농지와 사병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지들끼리 힘을 합치더라도 최대한도가 새로운 왕을 옹립시키는게 다이지 그 왕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거나 하는게 거의 불가능했죠.

따라서 영국 의회 의원들이 지들끼리 싸우다가도 왕이 덤비면 단결해서 왕 모가지 떨구고 의회권을 수립시키고 의회 내에서 투닥거리더라도 자체적인 결론을 외부 개입없이 자기네들 스스로 결정했던 반면, 조선 당파들은 자체적인 결론을 외부 개입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최종 결론은 결국 왕의 선택지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구조였지요.
 
이런 형태이니 어느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서로 논쟁을 하건 칼부림을 하건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는게 아니라 왕한테 "저 놈 역적이래요~"하고 고자질을 하는 것'으로 정치적 결론을 내려고 할 수 밖에 없었고(그게 정치 투쟁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결론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뭐 또 몇가지 사건들이 겹쳐서 당파 간의 피의 고자질(;) 복수극이 당연한 상황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는데 이는 조선 왕들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기도 한 겁니다.

이 쪽 신하 말 듣고 저 쪽 족치고, 저 쪽 신하 말 듣고 이 쪽 족치고 하면서 왕의 절대 권력을 안정적으로 수립할 수 있게 되니까요. 문제는 그 절대왕권의 완성본을 정조 때에 굳혔는데 그래놓고 뒷안배를 제대로 못하고 일찍(?) 골로 가버렸지요. 그러니 붕뜬 왕권은 족벌주의 명문 외척들의 손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는 테크로 흘러가게 된
Updated at 2020-11-24 00:10:20

그건 모르는 거지만 아마 정도전이나 이성계가 방석이 크기전에 죽었으면 이방원 아니더라도 뭐 방번방간등등 한씨 왕자 소생 세력을 누르기 힘들다고 봐서

이때는 강씨도 죽었을때라 방석이는 뭐 어찌됐는 결말은 똑같았을거 같습니다

오히려 능력있는 방원이 정권을 잡아서 다행이지 능력없는 방번방간이 잡았으면 초기 고려꼴났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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