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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2차대전 이탈리아 왕국군 지휘관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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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28 20:24:37

지오반니 메세 - 2차대전 파쇼 이탈리아 왕국군에서는 그나마 봐줄만했던 훌륭한 역량의 지휘관. 겉보기에만 약체였지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던 그리스 군대와 그리스 왕국군 원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에게 사방에서 털리던 이탈리아 왕국군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약하며 파파고스의 역공을 막아내고 알바니아-테살로니키로 이어지는 그리스 공격 노선을 사수.

지오반니 메세는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그리스와의 전쟁도 흐지부지, 에티오피아는 이미 먹었고 남부 프랑스는 독일의 꼭두각시인 비시 프랑스가 있으므로 직접거리기도 뭣해서 할 게 없던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독소 전쟁에 이탈리아 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전. 소련의 대대적인 역습 시작이자 독일의 완전한 열세 전환을 알린 '천왕성 작전' 시기 소련군을 가장 오래 막아낸 지휘관과 군대가 독일군이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이 지오반니 메세의 이탈리아군이었다는 점도 특기할만한 점.

이후 1943년 본국으로 귀환한 지오반니 메세는 전황이 사실상 파국으로 치닿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독일 혼성 전차 군단의 지휘권을 잡고 본인이 주도하여 영미 연합군과 싸웠는데 이 때에도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패전. 메세는 완전한 무솔리니파는 아니었고 반 쯤 왕당파였기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무솔리니는 끝났다고 보고 사보이 왕가 계파로 전향하며 연합군을 맞아들이면서 영미소의 처벌 범위에서는 벗어났으며 이후 1947년 퇴역.




로돌포 그라치아니 - 지오반니 메세 정도를 제외하면 당시 이탈리아 군에서 그나마 그럭저럭 수준이 괜찮던 지휘관. 그러나 문제는 명백한 파시즘 인종 학살 행위를 자행한 전범이었다는 것. 실제로도 메세와는 달리 이 혐의가 입증되어 교도소에 갇혀 이후 전범 재판을 받았지만 그나마 '조국이 이탈리아라는 점'(이탈리아가 가장 빨리 무너졌으므로), 학살 대상이 당시 영미소에게는 다소 중요시되는 입장은 아니었던 리비아, 에티오피아인에 국한되었으므로 금고 19년형 정도였고 그나마도 감형되어 거의 바로 석방되다시피한 수준.

당연히 에티오피아와 리비아에서의 그라치아니는 인간백정으로써 그저 찢어죽여도 모자랄 인간일 뿐이지만 오늘날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메세 다음가는 당시 이탈리아의 수준급 지휘관으로 칭송하는 분위기가 강한 편.

그라치아니는 군사적으로 형편없는 무솔리니에 비해 훨씬 실무 현실 감각이 있었던지라 본인의 입지를 기반으로 무솔리니의 말도 안되는 명령을 자주 뭉개며 밍기적거리고 전력을 보존하곤 했고 이집트에서 영국군에게 패전한 이후 실각될 뻔 하였지만 하도 '남은 지휘관이 모자라서' 다시 무솔리니에 의해 복귀된 그라치아니는 북부 이탈리아 항전군 지휘권을 위임받고 1944년 가르파냐나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하고 토스카나, 피렌체를 탈환하는 등의 전적도 선보임.



피에트로 바돌리오 -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이었으며 그라치아니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전력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신 로마 제국 건설 계획에 대단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편.

결국 바돌리오가 예상한 대로 형편없는 전력의 이탈리아 군대는 독일군에게 6주 당하던 프랑스군 남부 사단조차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남부 프랑스 점유에 실패하여 비시 프랑스 성립에 혁혁한(?) 공헌을 해버렸고 이후의 그리스 침공마저 대실패로 끝나버리자 그 책임을 지고 사임.

이후 뒷방 늙은이로 있던 바돌리오는 43년부터 전황이 추축 측에 파국 양상으로 돌아가자 영국, 미국, 자유 프랑스 등지에 연락을 접선하고 특히 영국의 후원을 중심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연계하여 무솔리니를 직접 제거하고 이탈리아를 '왕정-바돌리오 수상 내각' 체제로 돌려버리는 계획을 짰음.

이런 음모를 전혀 모르던 무솔리니가 전황 타개를 위한 '파시스트 대의회'를 소집하자 여기서 국왕, 카빌리아를 대동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무솔리니를 일시적으로 쫓아내버림. 그러나 이를 알아챈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에게 진압당하며 친연합 사보이 왕가-바돌리오 체제는 그대로 붕괴.

이후 바돌리오는 국왕을 대동하여 연합군에게로 튄 다음, 영국에게 계속 호소하여 사보이 왕가-바돌리오 수상 체제 이탈리아 성립을 주장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훨씬 입지가 크던 미국은 '무조건 자유민주주의 공화정 수립'을 외치며 영국의 의견을 씹었고 결국 미국 의견대로 사보이 왕가와 바돌리오는 그대로 나가리가 되어버림.



 

에밀리오 데 보노 - 40년 시칠리아 사령부 남부 이탈리아군 지휘관. 1943년 데 보노는 바돌리오, 국왕이 짜놓은 계략에 협력하여 파시스트 대의회에서 '무솔리니는 국왕에 대한 역적'이라는 의견에 동조하며 무솔리니를 체포하려 들었지만 이후 독일군에게 구출된 무솔리니가 일시적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자, 재빨리 튀는데 성공한 바돌리오, 국왕과는 달리 무솔리니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함


 


우고 카발레로 - 바돌리오의 후임 참모총장. 남프랑스 전선, 그리스 전선, 북아프리카 전선(롬멜과 협력하여 싸움)에서 모두 이탈리아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했으나 전부 패배와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당대 이탈리아 병사들 사이에서도 똥별로 이름이 자자했던.

무솔리니가 바돌리오의 계략으로 잠깐 권력을 잃었을 때에 바돌리오에 의해 '친무솔리니파'로 여겨져 죽을 위기였는데 '난 무솔리니 싫어했다고!'를 외치며 목숨을 구명하려 했고 이후 무솔리니가 다시 권력을 되찾은 뒤, 43년 호텔에서 암살당함. 무솔리니가 죽인건지 바돌리오가 죽인건지는 알 수 없음.

 




이탈로 발보 - 이탈리아 검은 셔츠단 지도자이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는데 핵심적 공헌을 한 정치깡패였는데 이후 무솔리니가 권좌에 오르자 군부에서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됨. 뛰어난 비행기 조종사이었고 실제로 공군 지휘관 노릇을 했지만 다만 정치 깡패 노릇을 한 것, 무솔리니 다음가는 사실상의 2인자 수준이었다는 점을 제외하자면 그의 제대로 된 군력은 알기 힘듬.

일생 내내 정찰기, 전투기를 잘 몰았다는 것 하나로 이탈리아 상공의 기사라며 범국민적 인기를 끌었지만 그가 제대로 전장 지휘를 해서 내놓은 결과물은 없었으며 40년 리비아 총독으로 재임 도중 영국군 공습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리비아 주둔군 대공포병들이 이탈로 발보가 리비아로 돌아오느라 타고 있던 전투기를 영국군 공습으로 오인하고 대공포를 쏴 격추시키면서 사망.

무솔리니가 발보를 암살했다는 설은 여전히 강하게 재기되는 편인데 그의 입지가 무솔리니 다음가는 수준이었고 실제로 스탈린한테 소리 지르던 보로실로프마냥 무솔리니에게 '넌 독일애들 부츠나 닦아주고 있을 생각이냐!'라고 일갈할 수 있던 수준이었는데 나치독일과의 강철 조약을 주장하던 무솔리니와 나치독일은 독일대로 알아서 놀게 냅두고 우리는 그러는 동안 아프리카에서 그란데 스파치오 설립에 집중하여 '신 로마 제국' 이상을 위해 매진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발보의 의견 대립이 상당히 컸던 상태였기 때문.

물론 '그냥 팀킬 사고였지 무솔리니 반응보면 진짜로 놀란거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의견도 만만치 않음.

 

 


사바스티아노 비스콘티 프라스카 - 비스콘티가 성씨라면 밀라노의 뼈대있는 전통 명문귀족 가문 비스콘티 출신일 것. 여하간 40년 그리스 침공 당시 선봉 지휘관이었으며 당시 이탈리아군은 메탁사스 정권 그리스 왕국군에게 형편없이 개털렸는데 프라스카는 책임을 모면하고자 '그리스 거의 다 먹었어요! 그리스애들 우리가 박살냄!'이라는 말도 안되는 보고를 올려버림.

이에 무솔리니는 나중에 사실을 깨닫고 격노하여 프라스카를 해임시켰는데 할 일이 없던 프라스카는 점차 반무솔리니파가 되었는지 이탈리아 공산당 유격대인 파르티지아노로 전향, 무솔리니를 상대로 이탈리아 내부 저항 운동을 벌였고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에게 결국 사로잡히게 됨.

그러나 프라스카는 간수들을 죽이고 탈옥에 성공하여 이후 한창 독소 전쟁 중인 러시아로 가서 무려 소련군에 입대, 소련의 독일에 대한 대대적인 전세 역전 전투들에 대체로 참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심지어 소련의 베를린 입성 전투에서조차 프라스카가 참전한 것으로 기록됨. 이후에도 늙어서 책이나 쓰며 잘 먹고 잘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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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2-28 22:57:01

이탈리아는 2차대전에서 어느정도 역할이 큰편이었나요?? 2차대전 보면 그냥 연합군 vs 나치 이런 구도인데 이탈리아는 짐짝마냥 털리는걸루 알고 있거든용

OP
Updated at 2021-02-28 23:06:11
뭐 국지적, 지역적 전술 단위 전투 문제라자면 나치한테 6주당한 엘랑한테도 털리는 이탈리아군..이라고 하면 그 수준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실제 당시 이탈리아 육군은 그다지 전쟁 준비가 안된 상태로 개전을 시작해버렸습니다. 그러니 내부 군사 개혁을 진행 중이던 그리스 육군한테도 와장창 털린 것이기도 하고..

다만 의외로 육군 기술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고(최소한 일본보다는 훨씬 나은 전차와 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었던) 확실히 해군력은 꽤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규모만 놓고보면 프랑스랑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해군은 되었고 영국, 미국, 일본 해군에게 감히 상대는 안되겠지만 하다못해 수상 대해군이랄게 아예 없는 수준인 독일군을 대신하여 지중해를 장악, 독일군이 지중해를 활용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전쟁 규모 확대에는 큰 공헌을 하기는 했습니다. 즉 전략적으로 이탈리아의 추축 가입은 독일에게 대단한 역할을 해준게 맞습니다.

즉 종합적으로는 전략적인 전선 규모 확대에는 공헌을 해도 전술적, 지역 단위에서는 패배를 반복하면서 도리어 독일군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기묘하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본래의 무솔리니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사라져 그저 '에혀.. 저 등x..;' 하는 동정;의 태도로 변해가고 독일 수뇌부나 병사들도 이탈리아를 업수이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탈리아와 무솔리니가 강철 조약을 통해 추축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거나 프랑스에게 아프리카 식민지 이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스트레사 구축에 동의했다거나 했다면 프랑스의 전선 부담이 극도로 줄어들어 6주 엘랑 당할 일이 없었거나 최소한 영미가 본격 개입할 때까진 버틸 수 있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나치 독일의 초반 세력 확대에 이탈리아가 큰 공헌을 했다라는 부분은 저는 분명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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