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잡설)흑인 노예 무역의 시작
사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상과는 달리 흑인 노예 무역의 시작은 백인 침략자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 민족/부족/국가 사회집단들 간의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의 노예들과 이러한 노예들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아프리카의 고대사회적 경제 구조가 아메리카 식민지화와 함께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유럽인들의 이해 관계에 맛물리면서 '상호 공조'로써 발생한 것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노예 무역의 시작 시점, 그리고 적어도 18세기 말엽까지는, 흑인이 같은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백인들에게 팔아넘기는 것이 세계 노예 무역 시장의 일반적인 구도였다.
흑인이 어떻게 같은 흑인을 노예로..?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지극히 현대인적이고 또한 '북미 흑인'스러운 감정이기도 한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일반적인 한국인들이나 북미 흑인들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제각기 민족 집단, 부족 집단, 심지어는 제어 사용자 집단(제족 집단) 단위로 크게 다르며(애초에 아프리카가 중국 몇 개는 들어가고도 남는 거대한 대륙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피부색이 같다고 해서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거나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절대다수 흑인 국가들, 민족 집단들은 서로를 그저 때려잡아야할 외적이나 그냥 이방인으로 인식했다. '흑인은 모두 동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20세기 북미/미국 흑인들을 중심으로나 나온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간 유럽의 기술발전과 상업의 발전, 이 유럽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세계 무역 질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부족들, 국가들을 '전략적 구속'에 빠뜨렸다. 흑인 민족 집단들, 부족 집단들끼리 전쟁을 벌여 서로 간에 얻은 포로들을 노예화하여 노예제 사회의 노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당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부족/국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에 필요한 경제 기반 구축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본래는 당연히 이런 흑인 국가들이 딱히 자신들이 취득한 노예들을 유럽 상인들과 거래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이 급격하게 발전하고 무기 기술 면에서 세계를 선도하고(이미 총기가 제식화되기 이전인 14~15세기에도 이미 군사 기술적인 면에서 유럽이 사실상 세계 1위급에 올라섰다고 평가받기도) 거기에 16세기 이후 유럽 중심의 총기 발전 상황이 눈부시게 빛나며 총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무기의 패러다임을, 더 나아가 전투의 패러다임을, 그리고 전쟁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자 이 총기 사용법을 전파 받은 사하라 이남 흑인 민족/부족 집단들, 국가들은 상호 경쟁 간에서 '어느 쪽이 더 많은 총기를 가지고 있느냐'가 승패의 주요한 관건이 되어버렸다.
발전한 유럽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 사회집단들이 그나마 좋은 값어치를 받으며 유럽-아메리카 무역 질서에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은 그 자신들이 취득하여 그 자신들의 노예제 사회를 돌아가게 만들 원동력이던 '노예 그 자체'였고 또한 유럽의 급격한 발전을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 및 노예 인력 투자를 통해 더 많은 부로 환원되어 돌아올 이득을 이미 알고 있던 유럽 무역상인들은 마땅히 그 노예 수입에 상당한 재화를 지불할 용의도 충분했다.
따라서 사하라 이남 흑인 국가들, 사회집단들은 '자신들의 사회에 필요한 노예 인력을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 사용하지 않고 대신 수출함으로써 그 대가로 총과 기타 재화를 손에 쥐고 이를 통해 당장 서로 간의 경쟁에서 생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며 사실 그것은 당장의 상황에서는 불합리한 판단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총과 기타 재화를 손에 쥔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기 훨씬 쉬웠고 멸망당한 쪽은 결국 그 자신들이 노예를 보존하려다 스스로 노예 처지가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것은 아직 고대 사회식 노예제 인력을 기반으로 국가 사회의 경제 질서를 운용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에게는 '잠재적이며 장기적인 국가 운용에 필요한 기반'을 포기하는 행위였고 말하자면 이는 딜레마였다.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1670년, 지역 패권국이던 다호메이를 중심으로 연간 3천여명의 노예가 유럽 노예무역상들에게 판매되었지만 서아프리카에 플린트락 머스킷이 전파된 이후인 1688년부터는 연간 2만여명의 노예가 유럽 노예무역상들에게 판매되었다. 다호메이는 이렇게 노예를 판매하면서 얻은 총기로 나라를 확장했고 곧 서아프리카 최대 노예 거래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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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동아시아에서도 전쟁나면 서로 노예로 삼고 공녀 요구하고 그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