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후이 코스타 : 말끔하게 머릴 빗어 넘긴 왕자, 이탈리아에서 왕이 되다
지난 번에 피오렌티나에 관한 글을 썼는데, 후이 코스타에 관한 글이 있어 또 길지만 번역해봤습니다. 상당히 장문인데요, 꽤 좋아했던 선수라 추억할만한 장면들이 많아 영상도 첨부해봤습니다.
영상도 많고 글도 쓸 데 없이 깁니다...
[TFT] 후이 코스타 : 말끔하게 머릴 빗어 넘긴 왕자, 이탈리아에서 왕이 되다
RUI COSTA: THE SLICK PRINCE WHO BECAME A KING IN ITALY
[These Football Times = Edd Norval]
마누엘 후이 코스타의 축구 인생은 한 골과 몇몇 순간으로 함축할 수 있다. 1996년 8월 리스본, 벤피카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다 루스에서 피오렌티나와 프리시즌 경기를 가졌다. 사실 큰 의미가 있는 경기가 아니긴 하지만, 이 날이 후이 코스타가 처음으로 벤피카를 ‘원정 경기 선수’로 찾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후이 코스타는 경기가 끝날 즈음, 박스 모서리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게 공을 건네받았다. 그는 옛 동료들인 엘데르 크리스토방과 디마스 테셰이라를 살며시 제치고 살짝 찍어 차 슬라이딩하는 벨기에 골키퍼 미셸 프뢰돔을 넘겼다. 공과 그 사이는 단 몇 인치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하단 링크 2분 경.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감각적인 플레이를 펼친 후이 코스타. 하지만 득점한 뒤 그의 행동은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았다. 그의 동료들은 동점골을 축하하려 한 데 모였지만, 그것보다 후이 코스타에겐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그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풋살이 후이 코스타에 미친 영향은 그가 포르투갈에서 보낸 젊은 시절부터 이미 나타났다. 그의 발에 공이 닿으면 공이 무거워진 듯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발을 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날아갔다. 이러한 면은 풋살의 영향을 받은 여러 선수들에게서도 보인다. 메시와 호나우지뉴, 쿠티뉴, 그리고 두 명의 호나우두 같은 이들 말이다. 그가 벤피카의 유스 선수일 때부터, 그는 포르투갈이 배출한 가장 흥미롭고 유망한 선수로 여겨졌다.
유로 2000, 포르투갈이 잉글랜드를 상대했을 때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포르투갈은 전반 20분이 되기도 전에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코스타는 마법 같은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누노 고메스를 꿰뚫어 본 세 번째 작품은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에 있어 이집트 피라미드에 비견될만한 작품이었다.
2001년, 전 시즌 피오렌티나의 감독이었던 파티흐 테림은 AC 밀란으로 떠났고 4400만 유로에 코스타와 재회하고자 했다. 피렌체의 재정 상황을 생각하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당시 바티스투타는 필리포 인자기와 스왑될 수 있었고 코스타는 지네딘 지단과 바꿀만한 선수였다. 인자기는 새 클럽과 사인하는 코스타를 두고 지단보다 더 낫다고 평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단과 코스타 논쟁은 끝없는 수수께끼다. 마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그것처럼. 코스타와 지단은 비슷한 역할을 맡았고 지단이 천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세리에 A에서 전성기를 보낸 둘을 보면, 코스타가 좀 더 번뜩이는 감각이 돋보이기는 했다. 지단이 머리로 플레이했다면, 코스타는 가슴으로 뛰었고 이 사실은 이탈리아 팬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탈리아 축구는 수비에 죽고 수비에 산다는 이야기는 엘레니오 에레라 시기부터 만들어진 철학이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지아니 브레라 같은 축구 평론가들이 수도 없이 떠들어댄 이야기다. 파울로 말디니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등이 버티는 밀란의 수비는 견고했고, 그 저명한 수비수들의 기개에 공격 재능까지 가미시키는 것이 코스타의 일이었다. 밀란은 이제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에 후이 코스타까지 보유했디. 번쩍이게 도색된 그는 굉음 같은 엔진 소리를 내며 수비수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밀란에서 그는 별명을 하나 더 얻었으니, 바로 '마에스트로'였다. 이름하여 클래식 앙상블이나 오페라의 지휘지가 아니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는 클래식 지휘자 쪽보다는 즉흥 재즈 뮤지션 쪽이긴 하다. 그는 지난 10년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전통적인 10번이니까. 그라운드 전역을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중앙 공격에 무게를 실었다.
밀란에서 후이 코스타가 입단 당시 받았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워낙 밀란의 스쿼드가 찬란했고, 그가 마지막 조각같이 여겨졌으니까. 하지만 결코 그가 실패했단 의미는 아니다. 그는 2003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포함, 여러 우승컵을 경력에 추가했다.
조별리그에서 후이 코스타는 이제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사단의 중심이 된 지단과 맞닥뜨렸다. 결과부터 말하면 밀란은 홈에서 거둔 1-0 승리를 앞세워 그룹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팬들이 사랑하는 후이 코스타의 아름다운 어시스트 덕에 말이다.
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센터 서클 뒤 쪽에서 볼을 건네받은 코스타는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안드리 셰브첸코를 포착했고 대지를 가르는 스루패스를 내질렀다. 그 패스가 셰바의 발에 닿기까지 네 명의 레알 선수 사이를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치 그는 상대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는 선견지명이 있는 듯했고 그 순간 지구 최고의 패서로 군림했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 재발이 그의 발목을 잡는 등 불운이 따랐다. 그리고 카카의 영입 또한 크게 작용했다. 카카는 공격 일선에서 코스타 보다 더 나았고, 이제 코스타는 더 뒤쪽으로 내려앉아 안드레아 피를로와 함께 후방에서 플레이메이킹을 돕는 역할을 받았다.
여전히 코스타는 출전할 때마다 영향력을 보이는 선수였지만 꾸준하진 못했고 강한 밀란 스쿼드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다. 코스타는 밀란을 떠날 때까지 65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후에 그가 인정했듯, 골문 앞에서 침착하지 못했고 피를로만큼 레지스타 자리에 잘 녹아들지 못했다.
효율적인 득점을 위해선 밸런스와 방법론적 접근이 필요한데, 이 부분들은 코스타의 스타일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의연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축구를 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곧 꾸준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냥 지켜보기엔 더없이 좋긴 하다. 코스타는 사자의 공격을 피하는 유연한 영양처럼 자이브를 추듯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선수가 아닌가? 사냥감도 언젠가 사냥꾼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코스타는 늘 상대의 집중 견제를 받지만 꼭 한 번은 불가능한 패스를 성공시키거나 천재적인 골을 넣을 수 있는 불세출의 선수였다.
코스타는 루이스 피구, 주앙 핀투 등과 더불어 포르투갈 골든 제너레이션 멤버였다. 성인 대표팀에선 유로 96에서 8강을 시작으로 유로 2000 4강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홈에서 치른 유로 2004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8강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90분 혈투 끝에 1-1, 연장전에 돌입했다. 하프라인을 살짝 넘어 잉글랜드 진영에서 볼을 받은 코스타. 역습 상황에서 공격과 수비 5대5로 빠르게 역습을 해볼 만하지만 볼을 줄 데가 없다. 볼을 딱 붙인 채 페널티 박스 구석 쪽으로 돌진을 해본다. 순간적으로 시망을 봤지만 마크가 너무 타이트하다. 그리고 코스타는 단호하게 오른발로 강력한 슛을 날렸다. 로켓처럼 솟구친 공은 크로스바 하단을 때리고 그대로 데이비드 제임스를 뚫어버렸다.
결국 포르투갈은 승부차기 끝에 잉글랜드를 꺾었고 결승에서 그리스에 패했다. 코스타도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대표팀 유니폼을 벗는 순간까지 10번의 자존심을 세웠고, 관중들을 환희로 물들이는 스타였다.
코스타는 축구화를 벗기 전에 리스본으로 돌아와 벤피카에서 뛰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2006년, 그 약속을 지키기 적절한 시기가 찾아왔다. 아직 밀란에서 460만 유로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고사하고 벤피카로 돌아왔던 것. 코스타 같은 천재 유형의 선수들은 보통 빠르게 저물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꾸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코스타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10년이나 최정상에서 불타올랐다. 아직 벤피카에서 태울 불꽃이 코스타에게 남아있었을까?
순전히 축구적으로 봤을 때, 코스타의 최고의 전성기는 그가 플로렌스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코스타가 선수 생활 황혼기에 벤피카로 돌아왔을 때, 마치 백색왜성 같았다. 그가 늙은 행성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단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밝게 타올랐단 의미다. 컴백 첫 시즌, 그는 시즌 내내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벤피카가 포르투와 스포르팅 CP에 이어 3위로 마치는데 공헌했다.
2007-08시즌이 시작할 때쯤, 코스타는 FC 코펜하겐전에 두 골을 터뜨렸고 팀을 챔피언스리그로 인도했다.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락을 겪었던 벤피카의 암흑기가 끝나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팬들은 코스타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즌 시작과 함께 그는 해당 시즌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렸고, 매 경기, 매 득점 후마다 팬들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은퇴 후, 후이 코스타는 벤피카의 단장이 됐다. 전임이던 조르제 제주스는 “후이 코스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벤피카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 클럽의 모든 이들이 코스타를 반겼고 그는 즉각적으로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등을 데려왔다. 많은 팬들은 그가 영원히 클럽에 남길 바란다. 심지어 회장이 되길 바리기도.
코스타는 현대 축구의 거인들 사이에서 간과당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사실 역대 최고의 선수를 거론할 때 코스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선수긴 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나오면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진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얼마나 축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그 어떤 시스템과도 맞지 않았던 선수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적인 축구를 선사했으며,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도 행복했으니 그만이지 싶다. 그가 에스타디오 다 루스를 마지막으로 걸어 나왔을 때,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 마누엘은 몇 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선수였구나 싶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7/02/20/rui-costa-the-slick-prince-who-became-a-king-in-italy/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코스타에 관한 글을 쓰고 또 그에 맞는 사진을 찾다가 알게 된 사실들이 꽤 있는데, 코스타가 플라티니를 아이돌로 삼았다는 점 입니다. 글에도 언급됐듯 신가드가 드러날 정도로 스타킹을 내려 신는 선수인데요, 플라티니가 이런 패션을 자주 선보였죠. 그 시절엔 플라티니 말고도 저렇게 신는 선수도 많았지만요.
후이또, 후이가 굉장이 유한 선수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동안 퇴장 한 번 없었고, 자신의 세대에서 최고의 10번이라고 자부할 만한 선수였음에도, 본인의 베스트 일레븐을 짜면서 10번 자리에 카카를 넣고 "나는 그저 이 축구를 바라만 보는 것 만으로도 좋다"라며 다시 한 번 겸손한 자세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지단과 코스타 사진을 찾다가 우연히 한 해외 커뮤니티를 보게 됐습니다. 지금의 축구판 레딧과 비슷했는데, 2001년에 지단과 코스타를 비교하며 갑론을박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이후 둘의 커리어는 꽤 차이가 나지만 2001년 당시엔 후이 코스타가 지단보다 위로 평가 받기도 했단 사실은 과장이 아닌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런 글은 etc로 해야 하나요??
2019-06-25 08:46:23
감사히 읽었습니다
2019-06-27 00:44:05
이형땜에 대항해시대2에서 루이코스타 얻을려고 발악발악..
2021-02-05 17:35:04
뒤늦게봤지만 좋은 글 번역 감사합니다 |
글쓰기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