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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후이 코스타 : 말끔하게 머릴 빗어 넘긴 왕자, 이탈리아에서 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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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Updated at 2019-06-25 05:03:18

 

지난 번에 피오렌티나에 관한 글을 썼는데, 후이 코스타에 관한 글이 있어 또 길지만 번역해봤습니다. 상당히 장문인데요, 꽤 좋아했던 선수라 추억할만한 장면들이 많아 영상도 첨부해봤습니다. 

 

영상도 많고 글도 쓸 데 없이 깁니다...

 

 

 

 

[TFT] 후이 코스타 : 말끔하게 머릴 빗어 넘긴 왕자, 이탈리아에서 왕이 되다

 

 


RUI COSTA: THE SLICK PRINCE WHO BECAME A KING IN ITALY

 

 


 

 

 

 

[These Football Times = Edd Norval]

 

 

 

 

 

 

마누엘 후이 코스타의 축구 인생은 한 골과 몇몇 순간으로 함축할 수 있다. 1996년 8월 리스본, 벤피카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다 루스에서 피오렌티나와 프리시즌 경기를 가졌다. 사실 큰 의미가 있는 경기가 아니긴 하지만, 이 날이 후이 코스타가 처음으로 벤피카를 ‘원정 경기 선수’로 찾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후이 코스타는 경기가 끝날 즈음, 박스 모서리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게 공을 건네받았다. 그는 옛 동료들인 엘데르 크리스토방과 디마스 테셰이라를 살며시 제치고 살짝 찍어 차 슬라이딩하는 벨기에 골키퍼 미셸 프뢰돔을 넘겼다. 공과 그 사이는 단 몇 인치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하단 링크 2분 경.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감각적인 플레이를 펼친 후이 코스타. 하지만 득점한 뒤 그의 행동은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았다. 그의 동료들은 동점골을 축하하려 한 데 모였지만, 그것보다 후이 코스타에겐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그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가 5살 남짓 됐을 때부터 벤피카는 그의 삶과도 같았다. 그리고 골을 넣은 뒤 그는 마치 집을 나와 처음으로 수화기 너머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 같았다. 마치 익숙하고 편한 목소리에 휩싸인 듯 말이다.
 
바로 그 순간. 골부터 눈물,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비올라 셔츠와 대비된 벤피카의 셔츠까지. 그 한 미장센에 후이 코스타를 상징하는 주춧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축구를 꿰뚫는 시야, 스타일, 열정, 그리고 충성심까지.
 
올리브색 피부와 말끔한 머리를 한 코스타는 그 순간 어떤 멜랑꼴리나 열망, 향수 같은 감정들이 함축된 포르투갈식 표현인 'Saudade'를 느낀 듯했다. 그는 그의 옛 팬들로부터 더 아픔을 느끼기 전에, 곧장 무뚝뚝하게 피오렌티나 진영으로 돌아갔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아래서 재능을 만개했던 그 팀 말이다.
 
 
 
평소 코스타의 겸손한 성품은 어린 시절 그가 리스본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가량 떨어진 도시인 아마도라에서 자란 데서 기인한 바가 크다. 그곳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로 코스타의 어린 시절과 크게 변함이 없다.
 
거친 동네에서 괴팍한 인물이 난다는 것은 그리 틀인 말이 아니다. 어린 헤나투 산체스나 나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후이 코스타의 부모님은 그 나라, 심지어는 세계 어디든 호화로운 곳에서 살 수 있었지만 여전히 코스타가 태어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알프레가이드에 살고 있다. 이는 코스타의 성품이 주변 환경에서 비롯됐음을 뜻한다.
 
충직한 성품도 마찬가지다. 1972생인 후이 코스타는 1977년부터 벤피카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축구를 시작했다. 사실상 그 클럽에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셈. 그는 5살 때부터 벤피카와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선수인 에우제비오의 눈에 띄었고 13년간 유스 시스템을 거쳤다. AD 파페로 1년간 임대를 다녀오고 곧바로 벤피카의 필드를 누볐다.  
 

축구공보다 작고 무거운 공을 써서 바운드가 적고, 5명이서 실내 경기를 벌이는 풋살은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대중화돼있다. 풋살로 선수들은 패스나 퍼스트 터치 같은 기본 스킬을 연마할 수 있다. 좁은 공간에서 펼치기 때문에 풋살은 더 지저분하고 정적인 편이다. 따라서 퍼스트 터치가 매우 중요한데, 풋살에선 한 평의 공간이 부동산으로 치면 금싸라기 같은 땅과 같기 때문이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게임을 풀어가는 데 있어 패스는 핵심적인 도구가 된다. 풋살에서 패스는 정교해야 하며, 역동적인 데다 다이렉트 플레이로 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펠레는 축구 발전에 있어 풋살이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풋살은 선수가 빠르게 생각하고 플레이하게 만든다. 풋살이 아닌 축구로 치면 모든 게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풋살의 한계가 있다면, 한 번의 실수가 큰 대가를 치른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풋살이 후이 코스타에 미친 영향은 그가 포르투갈에서 보낸 젊은 시절부터 이미 나타났다. 그의 발에 공이 닿으면 공이 무거워진 듯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발을 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날아갔다. 이러한 면은 풋살의 영향을 받은 여러 선수들에게서도 보인다. 메시와 호나우지뉴, 쿠티뉴, 그리고 두 명의 호나우두 같은 이들 말이다. 그가 벤피카의 유스 선수일 때부터, 그는 포르투갈이 배출한 가장 흥미롭고 유망한 선수로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피오렌티나는 어마어마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향에서, 잠자는 거인은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했다. 비올라가 브라이언 라우드럽, 프란체스코 바이아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세리에 A로 승격을 넘어 타이틀을 노릴만한 조각들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후이 코스타가 온 피렌체는 다시 날갯짓을 시작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피오렌티나는 그들만의 르네상스를 열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리에 A는 걸출한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로베르토 바지오의 등번호를 물려받은 코스타는 지네딘 지단과 더불어 월드클래스 10번으로 떠올랐다. 묘한 매력의 우아함과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기교를 갖춘 그는 완벽한 플레이메이커였다. 종이와 테이프로 궁전을 짓는 건축가라고나 할까. 팀은 수비가 약했고 중원이 강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바티스투타와 코스타는 리그의 흐름을 뒤엎는 비범한 듀오였다.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 같았던 그들의 호흡은 금방 둘을 세리에 A를 대표하는 듀오로 만들었다. 완벽한 9번과 10번의 상징이라고 해도 좋다. 영국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듀오, 앤디 콜과 드와이트 요크의 호흡 같달까. 그들은 축구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거장들이자, 킬러 본능을 갖춘 전우였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축구는 보수적이며 수비 중심적인 경향이 있지만, 1990년대 중반 피오렌티나는 공격으로 성공을 거뒀다.
 
그들은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 타이틀과 수페르코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코스타는 그가 이룬 것들보단 어떻게 이뤘느냐고 기억될만한 선수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경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연습과 13년의 유스 아카데미 생활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탈리아 사람들은 매우 노력하거나 신경을 쏟은 일을 마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해내는 것을 ‘Sprezzatura’라고 부른다. 경기 전,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젤로 빗어 넘긴 머리에, 무릎 아래엔 테이프를 한 줄 감고, 말아 내린 양말과 반은 집어넣은 셔츠 말이다.
 
 
꼭 이탈리아 축구 스타일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특유의 무모한 기운을 풍기며 필드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이에 속했다. 후이 코스타는 마치 종교처럼 매주 주말 TV 앞에 앉아 축구를 시청하고, 공원에서 그를 흉내 내려 하는 그 나이 또래 어린 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의 스타일은 꽤 도움이 됐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피치엔 본능적인 감각에서 나오는 천재의 춤사위가 그러졌다. 경기 전 후이 코스타의 루틴은 마음을 비우고 마치 그가 축구장에서 무의식적인 상태에 도달한 듯 뛸 수 있게 만들었다.
 
런 태연함과 경기장에서 내뿜는 그의 열정과 합쳐져, 후이 코스타는 피오렌티나에서 헌신적인 숭배자들이 뒤따르는 불가사의한 선수가 됐다. 과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고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통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플로렌스의 왕자’로 널리 알려진 후이 코스타는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축구로 전술적 기교와 우아함의 극치를 선보인 후이 코스타는 2000년 바티스투타가 로마로 떠나자 주장의 왕위를 하사받았다.
 
후이 코스타는 그가 볼을 가지고 있을 때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 불가능한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의 정곡을 찌르는 패스는 예측하기도 전에 날아오는데, 그 엇박 때문에 수비수들과 골키퍼들은 이미 떠난 볼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유로 2000, 포르투갈이 잉글랜드를 상대했을 때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포르투갈은 전반 20분이 되기도 전에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코스타는 마법 같은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누노 고메스를 꿰뚫어 본 세 번째 작품은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에 있어 이집트 피라미드에 비견될만한 작품이었다.

 

 

 

 

 

 

 

2001년, 전 시즌 피오렌티나의 감독이었던 파티흐 테림은 AC 밀란으로 떠났고 4400만 유로에 코스타와 재회하고자 했다. 피렌체의 재정 상황을 생각하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당시 바티스투타는 필리포 인자기와 스왑될 수 있었고 코스타는 지네딘 지단과 바꿀만한 선수였다. 인자기는 새 클럽과 사인하는 코스타를 두고 지단보다 더 낫다고 평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단과 코스타 논쟁은 끝없는 수수께끼다. 마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그것처럼. 코스타와 지단은 비슷한 역할을 맡았고 지단이 천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세리에 A에서 전성기를 보낸 둘을 보면, 코스타가 좀 더 번뜩이는 감각이 돋보이기는 했다. 지단이 머리로 플레이했다면, 코스타는 가슴으로 뛰었고 이 사실은 이탈리아 팬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탈리아 축구는 수비에 죽고 수비에 산다는 이야기는 엘레니오 에레라 시기부터 만들어진 철학이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지아니 브레라 같은 축구 평론가들이 수도 없이 떠들어댄 이야기다. 파울로 말디니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등이 버티는 밀란의 수비는 견고했고, 그 저명한 수비수들의 기개에 공격 재능까지 가미시키는 것이 코스타의 일이었다. 밀란은 이제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에 후이 코스타까지 보유했디. 번쩍이게 도색된 그는 굉음 같은 엔진 소리를 내며 수비수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밀란에서 그는 별명을 하나 더 얻었으니, 바로 '마에스트로'였다. 이름하여 클래식 앙상블이나 오페라의 지휘지가 아니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는 클래식 지휘자 쪽보다는 즉흥 재즈 뮤지션 쪽이긴 하다. 그는 지난 10년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전통적인 10번이니까. 그라운드 전역을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중앙 공격에 무게를 실었다.

 

밀란에서 후이 코스타가 입단 당시 받았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워낙 밀란의 스쿼드가 찬란했고, 그가 마지막 조각같이 여겨졌으니까. 하지만 결코 그가 실패했단 의미는 아니다. 그는 2003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포함, 여러 우승컵을 경력에 추가했다.

 

조별리그에서 후이 코스타는 이제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사단의 중심이 된 지단과 맞닥뜨렸다. 결과부터 말하면 밀란은 홈에서 거둔 1-0 승리를 앞세워 그룹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팬들이 사랑하는 후이 코스타의 아름다운 어시스트 덕에 말이다.



 

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센터 서클 뒤 쪽에서 볼을 건네받은 코스타는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안드리 셰브첸코를 포착했고 대지를 가르는 스루패스를 내질렀다. 그 패스가 셰바의 발에 닿기까지 네 명의 레알 선수 사이를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치 그는 상대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는 선견지명이 있는 듯했고 그 순간 지구 최고의 패서로 군림했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 재발이 그의 발목을 잡는 등 불운이 따랐다. 그리고 카카의 영입 또한 크게 작용했다. 카카는 공격 일선에서 코스타 보다 더 나았고, 이제 코스타는 더 뒤쪽으로 내려앉아 안드레아 피를로와 함께 후방에서 플레이메이킹을 돕는 역할을 받았다.

 

 

여전히 코스타는 출전할 때마다 영향력을 보이는 선수였지만 꾸준하진 못했고 강한 밀란 스쿼드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다. 코스타는 밀란을 떠날 때까지 65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후에 그가 인정했듯, 골문 앞에서 침착하지 못했고 피를로만큼 레지스타 자리에 잘 녹아들지 못했다.

 

효율적인 득점을 위해선 밸런스와 방법론적 접근이 필요한데, 이 부분들은 코스타의 스타일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의연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축구를 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곧 꾸준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냥 지켜보기엔 더없이 좋긴 하다. 코스타는 사자의 공격을 피하는 유연한 영양처럼 자이브를 추듯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선수가 아닌가? 사냥감도 언젠가 사냥꾼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코스타는 늘 상대의 집중 견제를 받지만 꼭 한 번은 불가능한 패스를 성공시키거나 천재적인 골을 넣을 수 있는 불세출의 선수였다.

 

코스타는 루이스 피구, 주앙 핀투 등과 더불어 포르투갈 골든 제너레이션 멤버였다. 성인 대표팀에선 유로 96에서 8강을 시작으로 유로 2000 4강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홈에서 치른 유로 2004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8강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90분 혈투 끝에 1-1, 연장전에 돌입했다. 하프라인을 살짝 넘어 잉글랜드 진영에서 볼을 받은 코스타. 역습 상황에서 공격과 수비 5대5로 빠르게 역습을 해볼 만하지만 볼을 줄 데가 없다. 볼을 딱 붙인 채 페널티 박스 구석 쪽으로 돌진을 해본다. 순간적으로 시망을 봤지만 마크가 너무 타이트하다. 그리고 코스타는 단호하게 오른발로 강력한 슛을 날렸다. 로켓처럼 솟구친 공은 크로스바 하단을 때리고 그대로 데이비드 제임스를 뚫어버렸다.

 

결국 포르투갈은 승부차기 끝에 잉글랜드를 꺾었고 결승에서 그리스에 패했다. 코스타도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대표팀 유니폼을 벗는 순간까지 10번의 자존심을 세웠고, 관중들을 환희로 물들이는 스타였다.

 

코스타는 축구화를 벗기 전에 리스본으로 돌아와 벤피카에서 뛰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2006년, 그 약속을 지키기 적절한 시기가 찾아왔다. 아직 밀란에서 460만 유로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고사하고 벤피카로 돌아왔던 것. 코스타 같은 천재 유형의 선수들은 보통 빠르게 저물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꾸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코스타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10년이나 최정상에서 불타올랐다. 아직 벤피카에서 태울 불꽃이 코스타에게 남아있었을까?

 

 

순전히 축구적으로 봤을 때, 코스타의 최고의 전성기는 그가 플로렌스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코스타가 선수 생활 황혼기에 벤피카로 돌아왔을 때, 마치 백색왜성 같았다. 그가 늙은 행성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단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밝게 타올랐단 의미다. 컴백 첫 시즌, 그는 시즌 내내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벤피카가 포르투와 스포르팅 CP에 이어 3위로 마치는데 공헌했다.

 

 

2007-08시즌이 시작할 때쯤, 코스타는 FC 코펜하겐전에 두 골을 터뜨렸고 팀을 챔피언스리그로 인도했다.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락을 겪었던 벤피카의 암흑기가 끝나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팬들은 코스타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즌 시작과 함께 그는 해당 시즌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렸고, 매 경기, 매 득점 후마다 팬들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은퇴 후, 후이 코스타는 벤피카의 단장이 됐다. 전임이던 조르제 제주스는 “후이 코스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벤피카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 클럽의 모든 이들이 코스타를 반겼고 그는 즉각적으로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등을 데려왔다. 많은 팬들은 그가 영원히 클럽에 남길 바란다. 심지어 회장이 되길 바리기도.

 

 

 

코스타는 현대 축구의 거인들 사이에서 간과당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사실 역대 최고의 선수를 거론할 때 코스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선수긴 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나오면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진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얼마나 축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그 어떤 시스템과도 맞지 않았던 선수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적인 축구를 선사했으며,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도 행복했으니 그만이지 싶다. 그가 에스타디오 다 루스를 마지막으로 걸어 나왔을 때,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 마누엘은 몇 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선수였구나 싶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7/02/20/rui-costa-the-slick-prince-who-became-a-king-in-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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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에 관한 글을 쓰고 또 그에 맞는 사진을 찾다가 알게 된 사실들이 꽤 있는데, 코스타가 플라티니를 아이돌로 삼았다는 점 입니다. 글에도 언급됐듯 신가드가 드러날 정도로 스타킹을 내려 신는 선수인데요, 플라티니가 이런 패션을 자주 선보였죠. 그 시절엔 플라티니 말고도 저렇게 신는 선수도 많았지만요.

 

 

 

  후이또, 후이가 굉장이 유한 선수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동안 퇴장 한 번 없었고, 자신의 세대에서 최고의 10번이라고 자부할 만한 선수였음에도, 본인의 베스트 일레븐을 짜면서 10번 자리에 카카를 넣고 "나는 그저 이 축구를 바라만 보는 것 만으로도 좋다"라며 다시 한 번 겸손한 자세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지단과 코스타 사진을 찾다가 우연히 한 해외 커뮤니티를 보게 됐습니다. 지금의 축구판 레딧과 비슷했는데, 2001년에 지단과 코스타를 비교하며 갑론을박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이후 둘의 커리어는 꽤 차이가 나지만 2001년 당시엔 후이 코스타가 지단보다 위로 평가 받기도 했단 사실은 과장이 아닌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런 글은 etc로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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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6-25 08:16:02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9-06-25 08:46:23

감사히 읽었습니다

2019-06-25 10:16:28

레알전 셰바에게 넘겨주는 저 패스는 진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9-06-25 19:02:12

저 당시에 세리에에서 공미 자리 뛰던 선수들은 역대급으로 끗발 날리던 선수들이었고, 그중에 원투 달리던 선수였으니...아이러니하게도 만약 카카가 아니었다면 좀 더 역사에 남지 않았을까 합니다ㅋㅋ

2019-06-27 00:07:55

브라질에서 왠 기독교 청년이 한명 오는데.. ㅠ ㅜ 

 

루이옹 넘나 좋은것 ㅠㅠ 

2019-06-27 00:44:05

이형땜에 대항해시대2에서 루이코스타 얻을려고 발악발악..

2021-02-05 17:35:04

뒤늦게봤지만 좋은 글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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