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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고 사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잘것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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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6-27 05:47:46

[TFT] 아리고 사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잘것없는 사람
ARRIGO SACCHI: THE GREATEST NOBODY OF ALL TIME
 
  
 
 

 [These Football Times = Omar Saleem]
 

 그저 신발 판매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설로 거듭난 사람. 아리고 사키는 축구 전술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감독으로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진열장에 가득한 트로피와 메달은 덤. 축구 연구가 추상적인 구상에 지나지 않고 현실이 되어 성공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을 수많은 혁명가 감독들에게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거장 아리고 사키처럼 축구사에 자신의 유산을 남겨 놓은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미디어에선 쉼 없이 그에 대해 떠들어대고, 아슬아슬하게 인종차별의 선을 넘나드는 발언들, 수뇌부와 언쟁 같은 일들이 있었지만 사키는 무너져가던 AC 밀란을 현대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팀으로 빚어낸 인물이다.
 
사키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지지를 얻고 산 시로에서의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많은 이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한 풀 꺾였다 해도 AC 밀란은 빛나는 역사를 가진 클럽이고 사키는 단 한 번도 세리에 A에서 감독을 맡아본 적이 없는 초짜였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시작된 건 이탈리아 북부 푸시냐노에서 사키가 10대에 불과했을 때 였다. 그는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치시, 요체프 보지크 등이 뛰던 부다페스트 혼베드의 아름다운 축구에 큰 감며을 받았다. 위대한 헝가리 팀이 내뿜는 에너지는 부자연스럽고 세심하기만 했던 당시 이탈리아 축구의 그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당시 매직 마자르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그들이 이룬 업적보다도 훨씬 더 크게 어린 사키에게로 다가왔다.
 
사실, 그 시기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가 카테나치오를 앞세워 칭송받을 만한 업적을 이뤘던 때보다 10년이나 이른 시점이었다. 비록 당시 네레오 로코의 파도바가 카테나치오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당시 이탈리아 축구는 시대를 빛낸 훌륭한 선수들은 많았지만 느린 감이 다분했다. 분명히 말하자면 스타는 많았지만, 썩 재미있는 축구는 아니었단 이야기다.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위대한 감독들이 그러했듯, 사키도 훌륭한 팀의 경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영광스러운 업적을 거둔 레알 마드리드에 매료됐다. 그리고 이탈리아 축구도 그들처럼 강한 압박과 빠른 역습을 펼치면서 철통같은 수비를 펼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후에 현실이 됐다.

 

 

 

 신발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한편, 푸시냐노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연구하는 데 매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약 15년간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푸시냐노 지역 클럽에서 뛰었지만 경력에 큰 발전은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즈음, 사키는 비로소 감독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일단 그는 신발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한편, 푸시냐노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연구하는 데 매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약 15년간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푸시냐노 지역 클럽에서 뛰었지만 경력에 큰 발전은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즈음, 사키는 비로소 감독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사키의 축구 철학은 당시로선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키는 압박을 펼치는 데 있어 4-4-2 포메이션이 적합하다고 믿었다. 그 포진을 통해 대열을 유지하면서도 풀백들이 소유권을 쥐고 경기를 지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키의 이론은 그가 2년 남짓 선수로 뛰었던 벨라리아라는 작은 클럽에겐 너무 복잡하고 심오했다.

 

결국 사키는 팀을 나왔고 완전히 신발 장사 겸업을 포기한 뒤, 바라카 루고라는 클럽에서 감독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는 바라카 루고의 유소년 팀에서 아이들을 지도했던 바 있는데, 거기서 지역 방어, 독창적이고 높은 템포의 운영으로 성공을 거뒀고 클럽은 사키를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사키가 하부 리그 생활을 청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결국 사키는 팀을 나왔고 완전히 신발 장사 겸업을 포기한 

 

 

 

 뒤, 바라카 루고라는 클럽에서 감독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는 바라카 루고의 유소년 팀에서 아이들을 지도했던 바 있는데, 거기서 지역 방어, 독창적이고 높은 템포의 운영으로 성공을 거뒀고 클럽은 사키를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사키가 하부 리그 생활을 청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사키는 그 시절을 “학습 경험”이라고 회상했다. 젊은 감독들 대부분이 커리어 초반에 겪는 일 말이다. 사키는 바라카를 맡을 당시 26세에 지나지 않았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팀 골키퍼는 29세였고 센터백은 32살이었다. 나는 그들을 이겨먹어야만 했다”
 
사키가 바라카에서 배운 ‘사람을 다루는 스킬’은 후에 큰 도움이 됐다. 그가 몇 년 뒤 맡은 밀란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철저한 무명에 지나지 않았다. 원대한 꿈과 철학이 있었지만 경험이 일천했으니까.
 
당시 이탈리아엔 사키만큼 선수 경력이 적은 감독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감독들은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유럽 대륙에 걸쳐 널이 퍼져있었다. 그리고 1985년, 파르마가 사키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에게 선입견을 깨부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잠시 피오렌티나에서 유스팀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지역 방어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이트한 맨 마킹이 주류를 이뤘던 이탈리아에서 말이다. 어린 선수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을 갖추기도 했다. 그리고 세리에 C1에 머물던 파르마는 당시 36세였던 사키가 팀을 프로 레벨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키는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파르마는 사키가 보잘것없는 선수에서 선구자적인 감독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의 마지막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키는 즉시 팀에 ‘범용성’이라는 철학을 주입시켰다. 모든 선수는 어느 포지션에서나 뛸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맞는 기술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피오렌티나 유스팀 감독 시절 이 같은 접근법으로 성공을 맛봤고 리미니에서 감독을 할 때도 그랬다. 그는 게임 내내 선수들을 여기저기 로테이션으로 돌려썼고 모든 선수들은 그야말로 ‘컴플리트 플레이어’가 돼야만 했다.
 
하지만 앞으로 배울 것이 많은 어린 선수들은 쉽게 습득하는 반면, 성인 선수들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기존 플레이 스타일과는 아주 다른 식의 축구에 적응해야만 했다. 압박은 구역을 나누어 사방에서 에워싸는 형태로 해야 했으며, 역습은 초당 5-6m를 전진할 수 있어야 했다. 볼 소유는 가급적 상대를 빠른 시간 내에 뚫어낼 수 있도록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했다.
 
이러한 사키의 철학은 파르마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쟐로블루(파르마의 애칭)는 세리에 C1 타이틀을 따내며 쾌속 순항했고 이듬해엔 세리에 A까지 단 승점 3이 모자라 승격에 실패하기도 했다. 긴박한 국면에 이르렀고 결국 세리에 B에 머물렀음에도 그들의 돌풍은 서포터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이 시즌, 사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코파 이탈리아에서 AC 밀란을 상대한 것이었다. 베를루스코니의 AC 밀란이 연달아 두 번이나 지자 그 파장은 산 시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1987년,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결국 사키를 AC 밀란의 감독으로 앉히기에 이른다. 예상대로 사키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밀란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AC 밀란에 자신의 철학을 뿌리내렸고 팀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클럽으로 만들었다.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란으로 가면서 사키가 맞닥뜨린 암초들 중, 가장 거대한 것은 아마도 여전히 그가 무명이었다는 점이었다. 산 시로에 갓 부임했을 때, 그는 선수 경력이 일천하고 유명 선수들을 지도해본 적도 없는 감독계의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선수 출신 감독만이 훌륭한 감독이 된다는 이야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사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기수가 되기 위해 말이 될 필요는 없다”

사키가 밀란을 맡은 첫 시즌, 이탈리아의 프랑코 바레시와 마우로 타소티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아주리의 미래로 평가받는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같은 선수들도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네덜란드인, 뤼트 훌리트와 마르코 판 바스턴이 있었다. 사키가 감내해야 할 또 하나의 역경은 이런 스타들을 구워삶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2년 전, 바라카 루고에서 했던 것처럼.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은, 그가 파비오 카펠로와 위대한 닐스 리트홀름 같은 인물들이 버텼던 무게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도 밀란에서 트로피를 따내지 못했으니. 그가 검증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승 트로피뿐이었다.


밀란 시절 사키가 부임 초기 훈련장에서 했던 것은 ‘그림자 훈련’이라고 불리는, 오늘날 널리 행해지는 훈련법이었다. 이 훈련은 선수들을 한 조로 구성하고 공 없이 행해지는 것이었는데, 선수들은 대형을 유지한 채 상대의 플레이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역할을 바꿔야 했다.
 
그 당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밀란을 상대하는 팀의 스카우트 한 명이 밀라넬로(밀란의 트레이닝 센터)의 수풀 속에 숨어 사키의 오전 훈련 세션을 염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곤 돌아가, 팀 감독에게 ‘사키가 선수들로 대형을 만들고 훈련을 하긴 하는데... 볼 없이 훈련하더라’라고 설명했다. 그 스카우트가 미쳤다고 느낀 감독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보내버렸고, 밀란전 대비 훈련을 계속했다. 결국 그들은 졌고, 밀란은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사키는 자칭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끈끈한 팀 케미스트리를 유지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좋은 팀을 만드는 방법은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팀 게임을 할 수 있는 선수들을 모으는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설령 무언가 해낸다 하더라도 오래가진 못 할 것이다. 난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을 인용하곤 하는데, 바로 ‘유대감이 화합을 낳는다’는 이야기다.”

 

 

 

사키가 밀란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 논할 때면, 그가 유럽 굴지의 스타들이 모인 그의 팀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을 지녔다는 부분이 간과되기도 한다.
 
대개 사람들은 그의 철학에 요점을 맞추지만, 베를루스코니가 사키의 일천한 경험에도 그에 영감을 받아 ‘불길한 항해’를 맡긴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키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선수들을 융화시켰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베를루스코니의 결정은 옳았다. 사키가 밀란을 지도한 4년 동안, 사키는 8개의 타이틀을 따냈으니까. 스쿠데토는 물론, 유러피언 컵 연속 우승과 두 번의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도 이뤘다. 사키의 강도 높은 압박은 라인을 내리고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치는 세리에 A 팀들보다 유럽 대회에 나오는 팀들을 상대했을 때 더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사키는 세간의 의견을 불식시키고 밀란을 이탈리아의 모든 팀들이 부러워하는 클럽으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팀들은 공격을 이끄는 능력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서서히 엘레니오 에레라와 닐스 리트홀름의 유산인 수비축구는 사키에 의해 바스러지고 있었다.
 
 
 

 
 
바레시는 사키의 훈련 방식과 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점을 높게 평가하며 1990년 유러피언 컵 파이널을 예로 들었다.
 
 
벤피카의 센터백들은 경기내내 마르코 판 바스턴을 강하게 마크했고 득점을 위해선 다른 해법이 필요했다. 사키는 벤피카 수비수들이 판 바스턴을 견제하기 위해 깊이 딸려나오는 것을 포착했다. 그는 판 바스턴에게 더 깊이 내려와 수비를 끌어들일 것을 주문했고 레이카르트에게 그 빈 공간으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내려오는 판 바스턴을 따라 수비가 딸려나오자 후방에만 있던 레이카르트가 최전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링커였던 판 바스턴의 원터치 패스는 정확했고, 레이카르트는 결승골을 넣었다. 후에 사키는 경기를 앞두고 이런 움직임을 30번 이상 반복해서 훈련했다고 회고했다.
 
ESPN에서 존 브루인은 “4-4-2는 높은 수비라인을 수반하며, 상대는 자신의 진영 깊이 웅크려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게 된다. 높은 벽이 쳐진 밀라넬로의 훈련장에선 어마어마한 체력이 요구되는 압박 훈련이 이뤄진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여전히 사키를 기념하는 장소로 그 자리에 있다. 이탈리아 축구는 조심스러운 수비를 펼쳤다. 사키가 오기 전까진 말이다”라고 말했다.

 

 

 

1991년 사키가 밀란을 떠난 것은 정말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스타가 가득한 스쿼드에서 불화가 없기란 참으로 힘든 일. 이 내부 문제는 점점 심화됐다. 스쿠데토를 따내지 못하자 밀란 수뇌부도 그의 운영에 의문부호를 품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가 사키가 팀을 떠나기 알맞은 시기였을 것이다.
 
그는 선수들과 일대일로 눈을 맞대고 경기 내 세부사항은 물론, 정신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지도 철학을 고수해왔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지쳤을지도. 그는 훈련장부터 TV 세트장까지, 어디에나 있었고 이제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장 큰 무게를 지닌 일만이 남았다. 바로 아주리 감독직이었다.
 
사키가 밀란을 떠난 이유는 펩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를 떠났을 때와 비슷했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단에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점이 너무 많았다. 사키도 마찬가지. 그는 21년 전에도 그랬다.

판 바스턴은 끊임없이 부상에 신음했는데, 사키는 이 확실한 골잡이의 영향력을 무척이나 필요로 했다. 사키는 강도 높은 압박 속에서도 기회를 창출해내는 판 바스턴의 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월드 풋볼지의 축구 평론가인 스티브 아모이아는 사키의 자서전을 리뷰하는 글을 통해 밀란에서 사키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어렸던 주제 무리뉴에게 바비 롭슨 경과 루이 판 할이 있었다고 한다면, 베를루스코니는 사키로 하여금 축구라는 종목을 훨씬 더 큰 세계로 인도하게 만든 멘토였다”
 
“베를루스코니는 사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보잘것없었던 무명의 사키에게 기회를 줬다”
 
“그 결과 4년 만에 8개의 트로피가 밀란의 손에 들어왔고 축구의 신전에 밀란의 이름을 아로새겼다. 사키는 유러피언 컵을 연달아 들어 올린 마지막 감독으로 남아있다”

 

 

 

이제 사키는 아젤리오 비치니의 뒤를 이어 아주리의 함장이 됐다. 1년 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을 3위로 마친 이탈리아 대표팀은 대성공을 거둔 밀란의 여러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유명한 오렌지 삼총사는 없지만. 이제 사키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파올로 로시가 일군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팀을 제대로 구을 해야 했다.
 
사키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보여준 또 하나의 뛰어난 능력은 단기간 내에 선수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그의 철학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해오던 밀라넬로에서의 그림자 훈련과 고강도 체력 훈련은 이제 없을 것이다.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캠프에서의 간헐적인 훈련이 있을 뿐, 사키는 이제 단기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도 방식으로 바꿔야만 했다. 결국 사키가 대표팀 감독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만든 것은 그의 적응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대표팀을 맡는 동안에도 수많은 논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스쿼드에 지안루카 비알리, 로베르토 만시니, 주세페 베르고미와 왈테르 젱가를 제외했다. 사람들은 그의 결정에 의문을 품었고 그가 밀란 선수들을 선호하며 다른 빅클럽 선수들을 기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사실, 사키는 자신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선수단을 꾸리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행할 수 있는 선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네 선수들의 재능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사키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유로 92 지역 예선에서 노르웨이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원정 1-2패, 홈 1-1 무)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사키는 자신의 철학을 바꿔야만 했고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당시 세계에서 승부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선수로 평가받았던 로베르토 바지오에게 전술적 자유로움을 부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키는 바죠로 하여금 압박 의무를 덜어주는 한편, 개인 능력으로 상대 빈 공간을 뚫거나 팀의 공격을 선도할 수 있도록 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했다. 밀란에 판 바스턴이 있다면, 아주리엔 바죠가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판 바스턴이 상대 진영에서 직접적으로 골문을 겨냥하는 빈도가 높았다면, 바죠는 마무리와 공격 작업 모두 도맡다시피 해야 했다는 점. ‘Il Divin Codino(신성한 말총머리)’의 어깨에 지워진 짐은 매우 무거웠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주리는 첫 경기 아일랜드에 일격을 맞고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이후 사키가 다시 팀을 일으키고 결승까지 이끄는 과정은 감독으로서 그의 자질과 팀을 추스르고 결집시키는 능력을 확인 시켜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이 대회로 사키는 선수 선발 논란을 불식시켰을 뿐 아니라 바지오를 향한 확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사키는 유로 96까지 감독을 맡았으나 실패로 점철됐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축구계에서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했다. 마지막까지도 그의 혜안은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사키는 축구계에서 감독들에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흐름에 대해 “이제 감독들은 팀을 잘 만드는 것보다도 결과가 우선인 것 같다. 하루아침에 고층 빌딩을 세울 순 없지 않은가. 판잣집은 세울 수 있을지 몰라도”
 
위 같은 이야기는 사키가 AC 밀란을 이끌고 거둔 성공이 카펠로 체제 때보다도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1994년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깨부수고 1991년부터 5시즌 동안 4번의 스쿠데토를 들어 올린 그 카펠로 말이다. 밀란을 더 투사들의 집단으로 만든 카펠로의 공로를 부정할 순 없겠지만, 사키가 카펠로의 성공의 발판이 되는 길을 닦아놓았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사키는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과 리누스 미헬스로부터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토탈 풋볼은 바르셀로나 칸테라와 성인 팀이 거둔 성공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탈루냐의 재건을 이끈 과르디올라와 아약스의 프랑크 데 보어에 등이 사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게다가 사키가 남긴 유산은 위르겐 클롭, 주제 무리뉴, 라파 베니테즈 같은 유럽의 일류 감독들에게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키를 정리하자면, 피치 위 선수들에게 그의 철학을 주입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현상 유지를 거부해왔으며 오로지 감독으로서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해 살아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제 현대 축구계에선 많이 사라져버렸지만.그는 일개 신발 장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역사가 증명하는 챔피언이자 무수히 많은 후계자들의 롤모델로서 퇴장했다.
 
그는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압박 축구 패러다임과 오프사이드 트랩과 같은 개념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팀을 운영하는 데 있어 멘탈적인 부분에 주목한 것 역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 공수 간격이 25m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이상적이었다는 게 밀란과 이탈리아의 경기들을 통해 무수히 많이 증명됐다. 그리고 이 점들은 수많은 훈련 끝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사키의 지도력을 반증하기도 한다.

 

 

 



  

사키가 은퇴하고 난 뒤, 그는 스스로를 좋은 감독이었다고 생각할까? 사키는 좋은 감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수한 감독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만 한다. 피상적이거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좇아선 안 된다”
 
“빵을 사기 위해 빵집에 가야지, 제빵사를 보기 위해 가선 안되지 않겠나?”
 
“진정한 마에스트로는 철저함을 추구하고 최고만을 찾아 나서야 한다”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성격 탓에 그의 말년엔 많은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사키는 불과 10년 만에 이탈리아 축구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또 본궤도를 찾지 못하고 겉돌던 밀란을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클럽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잘것없는 자’였다.
 
 
 
 
원문 링크
 | https://thesefootballtimes.co/…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축구사가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 번의 큰 물결이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물결을 몰고 온 이가 바로 아리고 사키죠.
 
오늘은 위대한 선구자이자 혁명가,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사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그 같은 감독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모자란 번역이라 의역과 오역이 가득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
Comments
1
2019-06-27 11:47:27

 잘 봤습니다!!

저 그림자 훈련이라는 거 되게 궁금해지네요. 술래잡긴가

OP
1
2019-06-27 14:13:40

저도 글만으론 이해가 잘 안가서 영상이 있다면 첨부하고 싶었지만.. 공 없이 진행되는 훈련인 모양입니다 shadow play라고 나와 있네요

1
2019-06-27 11:55:20

94월드컵부분은 동감 안가긴하네요.

덕분에 매번 글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OP
1
2019-06-27 14:24:41

저도 94년은 바죠가 그냥 멱살 잡은 대회 같네요. 예전에 클럽박스에서 조별리그 노르웨이전, 스페인전, 결승 이렇게 세 경기 정도만 봤는데 딱히 이탈리아감독 역량이 두드러진다 이런 느낌은 못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결승전 말디니 슈퍼 태클이랑 스페인전에 엔리케 코피 흘리는 것만 떠오르네요

1
2019-06-27 19:15:49

유익한 글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세번의 물결이라.. 최종이 사키이고 중장이 미헬스라면 처음 한번은 누구일까요?? 본문에서 말하는 에레라의 카테나치오일지...

OP
1
2019-06-27 22:09:51

그 세번의 물결이라던가 패러다임의 전환 이런 것들을 나누는 기준은 그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샤의 티키타카를 패러다임에 놓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죠. 저는 그러지는 않는 편이지만

 

영국 쪽에서는 WM 포메이션과 헝가리의 포지션 체인지 등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놓기도하고,


이탈리아에선 카테나치오가 축구에 방법론적인 접근법을 바꿔 놓았다며 이기기 위한 방법 자체를 바꿔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카테나치오, 토탈풋볼, 컴팩트사커를 모두 패러다임의 전환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더 전환점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많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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