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타스포츠
  일정    순위 

1990년대 파르마의 위대한 약진

 
5
  942
Updated at 2019-06-30 02:30:39

[TFT] 1990년대 파르마의 위대한 약진

THE INSATIABLE RISE OF PARMA IN THE 1990S

 

 

 

 

 

[These Football Times = Luca Hodges-Ramon]

 

 

 


중세 이탈리아의 역사는 각 도시 역사를 살피다 보면 파악할 수 있다. 개별 도시는 고유의 사회, 문화, 정치적 특성을 갖는 공동체, 공국으로 취급받았으며 저마다 고통과 환희의 역사를 품었다. 이러한 점은 각 도시의 패권 싸움이 치열했던 르네상스 시기에 두드러진다.

 

이 공국들은 권력욕이 심했던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통치됐는데, 대표적으로 피오렌티나의 메디치, 밀란의 스포르차, 로마의 보르지아 가문 등이 있다. 파르마 공국이 건국된 것은 1545년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그의 사생아인 피에르 루이지에 파르마를 유지로 남긴 것이 시작이었다. 교황을 등에 업은 파르네세 가문의 영향력은 전 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고, 이 파르네세 가문이 파르마의 통치자로 남긴 흔적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파르네세 가문의 유력자였던 라누치오의 아들 피에르 루이지는 유서가 깊은 가에타니 가문과 혼인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후 그의 둘째 아들은 교황 바오로 3세가 된다. 앞서 언급된 피에르 루이지와 라누치오의 아들 피에르 루이지는 다른 인물.>

 

 

왼쪽부터 미노티(주장)-탄치(구단주)-스칼라(감독)-페드라네스키(회장)

 

그리고 1990년대, 탄치 가문이 파르마에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도시는 전에 없는 큰 번영을 맞이했다. 식품업계 공룡기업인 파르마라트의 소유주, 칼리스토 일가의 비호 아래, 파르마는 경제·산업 중심지로 도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리스토 탄치는 그의 위세를 떨치려는 야욕을 ‘파르마 칼치오’에 심었다. 탄치의 부와 전술에 통달한 감독을 등에 업은 파르마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 7공주의 일원이 됐고 ‘Il Grande Parma’, 위대한 파르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동안, 파르마는 UEFA 컵 우승 2회, 컵 위너스 컵, 유러피언 슈퍼컵, 코파 이탈리아 트로피를 3번이나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파르마의 이 전례 없는 성공 가도는 2003년 파르마라트의 파산으로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파르마의 흥망성쇠는 이탈리아 축구계에 있어 지울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캄파닐리스모, 혹은 애향심이라 불리는 것은 거의 모든 파르마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감정이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에 위치한 이 도시는 포 강과 경계를 이루고 토스카나, 리구리아, 롬바르디아, 베네토 주와 인접해있다. 역사적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해 파르마는 꽤 부유한 도시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실 당시 파르마 사람들은 꽤 거만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파르마는 밀란의 라 스칼라 극장과 라이벌리를 형성할 만큼 ‘테아트로 레지오’로 유명하다. 게다가 모데나가 자랑하는 페라리의 숙적, 람보르기니도 있잖은가. 무엇보다도 프로슈토 디 파르마,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치즈다. 유명한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도 파르마 출신인데, 과거 파르마 선수들은 베르디의 ‘Marcia Trionfale’의 곡조에 맞춰 홈구장 엔니오 타르디니의 필드에 입장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전까진 그다지 자랑할 만한 역사는 없지만.

 

 

파르마의 일대 도약은 그들이 세리에 B로 승격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감독은 바로 아리고 사키였다.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4-4-2 포메이션으로 지역 방어와 압박 전술을 가다듬고 있었다. 1986-87시즌엔 단 3의 승점이 모자라 승격에 실패했지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사키는 그의 부름을 받아 로소네리에 합류, 저 유명한 ‘밀란 제너레이션’을 건설한다.

 

사키가 밀란으로 향하자 파르마도 그들의 운명을 바꾼 계약을 체결한다. 에르네스토 체세리니 회장 체제에서 파르마라트와 스폰서십을 맺은 것이다. 그 날로 클럽의 운명은 뒤집혔다. 1913년 창단 후, 세리에 D부터 고작해야 세리에 B를 전전하던 파르마. 이제 그들은 변방 클럽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한 날갯짓을 시작했다.

 

 

 

 

네비오 스칼라의 시대, 왕국을 세우다

 

 

‘그란데 파르마‘를 떠올리면 카를로 안첼로티와 알베르토 말레사니 감독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감독들이 팀을 지휘하던 시기엔 터무니없는 재능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가득했으니까. 지안루이지 부폰, 릴리앙 튀랑, 파비오 칸나바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디에고 푸세르, 엔리코 키에사, 에르난 크레스포 같은 이들이 파르마를 대표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팀의 기반을 다지고 세리에 A에 일약 폭풍을 일으킨 이는 네비오 스칼라였다.

 

스칼라는 감독 커리어 초부터 성공 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감독 데뷔 시즌부터 레지나를 세리에 B 승격으로 이끌었으니 말이다. 마지못해 칼라브리아 주를 떠나긴 했지만, 그는 통찰력 있는 인물이었고 파르마의 프로젝트에 잠재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에밀리아 주, 파르마에 당도하자마자 기존의 것들을 버리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베네토 출신의 스칼라는 사키의 독단적인 4-4-2 시스템을 버리고 5-3-2 포메이션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성과는 바로 1989/90 시즌 세리에 A 승격. 시즌 내내 세리에 B 정상권 팀들과 대등히 싸웠고 최종전에서 지역 라이벌 레지아나를 2-0으로 이겨 4위로 승격 막차를 탔다. 1913년 창단 이래 77년 만에 맞는 첫 세리에 A 진출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1976년부터 클럽의 회장직을 맡았던 체세리니는 승격 순간을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나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파르마라트가 클럽 지분의 98%를 사들이면서 파르마가 일으킬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이제 클럽은 낙농업계 거물인 칼리스토 탄치의 품에 안겼다. 이제 파르마라트 로고를 새긴 파르마는 십자군 전쟁을 벌이려 나섰다.

 

 

 

 

 

   

 

탄치는 파르마라트의 동료인 조르지오 페드라네스키에 클럽 회장직을 맡겼다. 파르마는 당시에도 꽤 괜찮은 스쿼드였지만 그 팀을 더 살찌우기 위함이었다. 루이지 아폴로니와 로렌조 미노티 같은 이들이 버티는 수비진에 브라질 대표팀의 골키퍼 클라우디오 타파렐, 벨기에의 스위퍼 조르주 그륀이 더해졌다. 스웨덴 대표팀의 토마스 브롤린, 최전방 공격수 알레산드로 멜리도 팀에 합류했다.

 

한편 스칼라는 새로운 선수들에 맞추어 자신의 전술을 어떻게 하면 리그에서 통하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리베로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5-3-2 포메이션을 3-5-2로 바꿨다. 양 풀백을 윙백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스칼라의 결단은 즉시 효력을 발휘했고, 세리에 A 첫 시즌 5위를 달성, UEFA 컵 예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새로운 전술에 맞는 선수 발굴 작업 계속됐다. 그리하여 팀에 합류한 선수가 안토니오 베나리보와 알베르토 디 키아라였다. 둘은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전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풀백과 윙백을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이 둘 덕에 경기 중에 5-3-2와 3-5-2를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르마 역사상 첫 타이틀. 1992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

 

이처럼 팀의 야욕은 대단했지만, 다음 시즌을 7위로 마무리한 것은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2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꺾자 탄치의 노여움도 풀렸다. 이 승리는 유벤투스와 기나긴 라이벌 관계의 시작이자 앞으로 10년간 펼쳐질 트로피 전쟁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파르마가 승승장구하면서 탄치 일가의 사업 광고 노출도 늘었다. 파르마라트 로고가 박힌 파르마 유니폼은 국제적인 광고 도구로서 역할이 실로 대단했다고. 파르마라트와 파르마의 유착관계가 워낙 깊어 몇몇 외국인 해설자들은 팀을 파르마라트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칼리스토는 기뻐했지만 파르마 팬들에겐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긴 했다.

 

 

 

 

 

한편, 탄치의 지원은 계속됐고 스칼라의 욕심과 식지 않는 열정 덕에 팀도 같이 타올랐다. 파르마의 축구는 열정이 넘쳤고 빠른 역습과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전형을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철통같은 수비벽과 위기 속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자세가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파르마는 선수 수급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창조성과 근면함이 잘 조화되는 팀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전자가 1992년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서 파우스토 아스프리야를 데려왔고 이듬해는 나폴리에서 지안프랑코 졸라를 데려온 것을 대표한다면, 후자는 네스토 센시니와 마시모 크리파를 데려온 것으로 균형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둘은 각각 우디네세와 나폴리에서 팀의 살림꾼 역할을 하던 선수였으니까.

 

 

‘인생은 아름다워’식의 자기애와 눈부신 축구 실력을 갖춘 아스프리야. 그는 파르마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컵 위너스 컵 8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 비센테 칼데론에서 홀로 두 골을 터뜨리며 역전승을 일궜던 게 크게 작용했다. 파르마는 여세를 몰아 결승까지 진출했고, 웸블리에서 로얄 안트워프를 격파하며 사상 첫 유럽 대륙컵 타이틀을 따냈다.

 

국내 무대에선 1992-93 시즌을 3위로 마무리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비오 카펠로가 이끄는 AC 밀란이 58경기 무패를 달리던 보기 좋게 깨버린 사건이었다. 스칼라는 유러피언 슈퍼컵 결승에서도 밀란을 격파하며 카펠로의 천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디노 바죠의 1994-95시즌 UEFA컵 결승 2차전 동점골

 

하지만 스칼라 임기의 정점은 1994-95시즌이었다. 이 시즌은 새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유벤투스와 일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파르마는 3개 대회에서 유벤투스와 맞닥뜨렸다. 당시 마르첼로 리피가 이끄는 유베는 이제 막 왕조를 건설하려던 참이었다. 파르마는 리그에서 유벤투스에 10점 차이로 압도하면서 3위에 머물렀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도 비안코네리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UEFA 컵 결승에서는 달랐으니, 전 유베 소속이었던 디노 바죠의 대활약에 힘입어 파르마가 1,2차전 합계 2-1로 우승을 차지했다.

 

디노 바죠는 파르마에 당해 여름에 합류해 결연한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고, 엔니오 타리디니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밀란의 산 시로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도 동점골을 터뜨려 우승을 결정지었다. 스칼라는 노련하게 리피를 압도했고 지안루카 비알리-파브리치오 라바넬리-로베르토 바죠의 유베 삼각편대를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솔직 담백하고 현실적인 스칼라는 “우리에겐 스쿠데토를 따낼 수 있는 멘탈, 스태미나, 회복력 그 어느 것도 없었다”라며 파르마가 리그에선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단기전이라면 우리는 그 어느 팀보다도 잘 싸울 수 있다”라며 팀의 경기력을 높게 평가했다.

 

 

 

 

 


아마도 스칼라의 가장 큰 업적을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굉장히 신경 썼던 부분인 ‘꾸준함’이라고 할 수 있다. 철통같은 5-3-2 포메이션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는 부단한 노력을 했으며 여러 유혹들과 선택들을 뿌리쳐야만 했다.

 

하지만 칼리스토 탄치 같은 큰 야욕을 가진 구단주들은 점점 더 큰 마키아벨리의 갈증(지배 욕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탄치는 구단 운영에 끊임없이 간섭했고, 결과적으로 스칼라가 팀을 떠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탄치는 빅네임 영입을 원했다. ‘퓨오리클라쎄’, 그야말로 한 번의 볼 터치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선수 말이다. 결국 탄치가 원한 것은 스쿠데토였다.

 

불가리아 출신의 전 발롱도르 수상자,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바로 탄치가 원하던 유형의 선수였다. 그는 전성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선수였지만 파르마는 10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적료를 지불했다. 물론 스토이치코프 영입이 파르마라트의 동유럽 시장 진출과 맞물려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계산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탄치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와 결부 지어 생각했고 당시 파르마 팬들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의 탐욕엔 끝이 없었다.

 

 

졸라(왼쪽 첫번째)와 스토이치코프(왼쪽 세번째)의 동상이몽

 

스토이치코프 영입은 구단주의 뜻에 따른 보강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전술을 수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칼라는 완고했고 구단주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세 명의 포워드를 세우는 전술을 고려하지 않았고, 제아무리 스토이치코프라 하더라도 파르마에서 졸라가 발휘하는 효율보다 대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리그를 6위로 마감하고 아무런 타이틀도 얻지 못하자 칼리스토 탄치는 큰 결심을 한다. 네포티즘(족벌주의)에 근거해 그의 아들인 스테파노 탄치에게 페드라네스키 대신 구단 회장직을 맡긴 것. 만년 하부리그 팀이었던 파르마를 이끌고 컨텐더까지 올려놓았던 스칼라였지만 그도 탄치의 눈 밖에 나고 말았던 것.

 

그를 대신한 인물은 레지오 에밀리아 주 토박이인 카를로 안첼로티였다. 스칼라는 떠나는 날까지도 클럽을 사랑하고 파르마에 충성했다. 리그 우승을 향한 투쟁심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탄치의 리그 우승을 향한 열망이 그것을 앞질렀을 뿐. 이것은 처음으로 탄치의 부도덕하고 치명적인 야욕이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첼로티와 말레사니 : 파르마의 흥망성쇠

 

 

전임 페드라네스키 회장에 비해 스테파노 탄치는 좀 더 직접적이고 교묘한 방법을 택했다. “꿈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지난 시즌 실패를 스칼라 탓으로 돌리지 않는 한편, 안첼로티가 스쿠데토 레이스를 펼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튀랑, 칸나바로, 키에사, 크레스포, 마리오 스타니치 등이 팀에 합류했다. 부폰이 유스에서 1군으로 올라온 것도 이 시즌이다. 전술적으로 안첼로티는 4-4-2를 중심으로 삼았고 이따금씩 스칼라의 5-3-2도 섞어 썼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첼로티 시절은 실패로 가득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숙적인 리피의 올드 레이디를 꺾지 못한 게 컸다. 당시 리피의 유벤투스는 유럽 챔피언이었고 파르마가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으니까. 리그 4경기가 남은 상황, 밀란과 유베 연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 파르마에겐 너무도 뼈아팠다. 결국 그들은 승점 2 차이로 유벤투스가 1996-97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광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안첼로티의 스쿠데토 도전 실패엔 그의 책임도 있었다. 스테파노 탄치가 AC 밀란의 로베르토 바지오와 계약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과도 연결고리가 있다. 회장은 슈퍼스타 영입으로 보는 맛을 더하길 원했고 자신의 스쿼드에 바지오를 더하고 싶어 했다. “파르마에선 말이지, 단순히 스쿠데토를 따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아름다운 축구까지 곁들여져야 한다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보는 맛‘은 그저 관중의 입장일 뿐이었다. 전임 스칼라가 그러했듯, 안첼로티도 슈퍼스타 영입이 능사는 아니라고 믿었다.

 

 

 

 

 

 

탄치의 자만심은 곧 참을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도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자 탄치는 안첼로티의 자리를 알베르토 말레사니에게 맡긴다. 이 결정은 팀을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것뿐 아니라 탄치가 찾던 ‘보는 맛’까지 곁들이기 위함이었다. 피오렌티나를 맡았던 말레사니는 활기차고 허풍이 심한 데다 뒤가 없는 공격적인 축구를 펼치기로 유명했다. 그의 호탕한 성격은 터치라인에서 괴짜 같은 행동을 할 때와 열정 넘치는 셀러브레이션을 펼칠 때 특히 잘 드러났다.

 

여러 선수들이 독특한 축구를 하는 두칼리에 합류했고, 새 감독 말레사니는 스칼라 시절 청사진을 다시 재현하겠노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999년 UEFA컵 결승전 선발 라인업. 왼쪽 위부터 센시니-튀랑-바놀리-보고시앙-베론-바죠-부폰-키에사-칸나바로-크레스포-푸세르

 

부폰이 버티는 골문에 튀랑, 센시니, 칸나바로가 중앙 수비벽을 쌓고 있어 파르마는 가히 철의 장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로시아티’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푸세르와 파올로 바놀리까지 영입해 측면을 강화했던 것. 여기에 알랭 보고시앙과 디노 바죠가 앞선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했고 그 앞에 아르헨티나산 판타지스타 베론이 섰다. 최전방엔 크레스포와 키에사라는 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공격진이 발톱을 세우고 있었다. 이 라인업이 탄치 시대, 그란데 파르마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1998-99시즌은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코파 이탈리아와 UEFA 컵, 두 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특히 UEFA 컵 결승에선 마르세유를 3-0으로 격파하며 그야말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아래 영상 40초부터

 

https://youtu.be/4LQ8B1BrVSY

 

마지막 골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몇 차례 볼을 돌리던 파르마는 튀랑이 후방에서 미드필드로 뛰어들었다. 그는 두 명의 마르세유 선수를 지나 오른쪽 윙으로 빠져 있던 베론에게 볼을 건넸다. 그는 페널티 박스 안쪽의 에르난 크레스포를 봤고 재빨리 크로스를 올렸다. 수비진이 그에 집중된 사이, 크레스포는 볼을 그대로 흘렸고 키에사는 놓치지 않고 골 망 상단을 향해 그물을 찢을 듯한 발리슛을 쐈다. 말레사니는 터치라인에서 춤을 췄고 파르마의 비상은 이제 정점에 달했다.

 

2002년에도 두칼리는 피에트로 카르미냐니 감독 체제에서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루는 등 소기의 성공을 거두긴 했다. 하지만 리그 성적이 너무도 처참했는데, 무려 10위까지 떨어졌다. 바로 탄치의 시대에 재정적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레니엄에 다다르고 파르마는 팀의 자랑이었던 자산들까지 팔아치워야만 하는 상태에 놓였다.

 

2000년, 베론과 크레스포는 둘이 합쳐 9000만 유로 이상(베론이 35m, 크레스포는 현금에 마티아스 알메이다와 세르히오 콘세이상이 얹힌 딜로 57m 규모)에 라치오로 팔렸고 튀랑과 부폰도 9000만 유로(튀랑 41.5m, 부폰 53m)가 넘는 가격표에 유벤투스로 향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탄치 일가가 저지른 재정 비리의 정확한 규모가 밝혀진 것은 2003년이었고, 그 즈음 파르마라트는 ‘유럽판 엔론’(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기업 파산 사태)이라 불리는 회계 부정 스캔들로 완전히 붕괴돼 버렸다.

 

 

칼리스토 탄치

이탈리아에서 8번째로 큰 규모에 이탈리아 GDP의 1%를 차지하는 대기업, 파르마라트는 총 200억 달러에 달하는 빚더미에 깔렸다. 칼리스토 탄치는 파산 사기, 횡령, 기타 범죄들로 17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르마라는 클럽의 명운은 파르마라트와 글자 그대로 일심동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클럽은 2007년까지 법원이 지정한 파산 관재인, 엔리코 본디에 의해 운영됐다. 그란데 파르마 시대가 막을 연지 10년이 지나고, 클럽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기라르디 구단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파르마 팬들

 

사실 파르마의 비상과 추락은 나폴리의 흥망성쇠와 아주 닮았다. 두 팀 모두 소유주의 미심쩍은 사업 계획의 희생자였고, 이탈리아 축구에서 영광스러운 시기를 장식했지만 위험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시대를 대표하는 팀들이니까. 

 

90년대 파르마의 성공 가도는 탄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부패한 비리, 그리고 몰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하지만 팬들은 쟐로블루가 이탈리아와 유럽의 강자로 군림했던 시절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캄파닐리스모‘, 애향심은 파르마가 장식한 영광들과 함께 드러났다. 이후 뒤따른 혼란과 고통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파르마 팬들은 그 시절이 다시 되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사실 오랫동안 엔니오 타르디니를 지킨 파르마 서포터 지오바니 두갈은 탄치 일가가 부도덕한 방식으로 팀을 소유했던 시절 경험했던 고난과 재판들 덕에 클럽에 대한 애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고 말한다.

 

 

 

 

몇 년 뒤, 파르마 팬들은 또 다른 사기꾼이라고 할 만한 토마소 기라르디에게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광의 시기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다.

 

스칼라와 말레사니가 거둔 성공의 향수를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파르마의 약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렇지만, 파르마 지역 방언 속담엔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다.

 

 

“나무를 오를 때, 높이 오를수록 나뭇가지가 얇아지고 땅에서 멀어진다는 점을 기억하라”

 

 

 

 

원문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6/11/22/the-insatiable-rise-of-parma-in-the-1990s/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글의 가독성을 위해 의역이 많이 가미됐고 정보의 부족으로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에 90년대 피오렌티나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들여다보니 파르마의 경우는 피오렌티나보다 더 심각하군요. 한 번 더 파르마라트 스캔들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인데, 지난 번에 포스팅했던 피오렌티나의 몰락에 관한 글과 비교해서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3
Comments
2019-06-30 10:33:10

글 잘 읽었습니다.

OP
2019-06-30 14:55:02

감사합니다!

2019-07-02 21:18:32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20
21438
22-02-07
49
25407
21-04-06
31
17584
20-12-31
37
13678
21-03-03
65
14168
21-04-09
62
6495
20-07-30
59
6252
20-03-29
46
4669
20-01-15
28
2163
21-02-08
33
2661
21-02-04
32
5568
21-01-26
31
6079
20-11-09
29
2533
20-10-30
32
2593
20-10-10
35
4263
20-03-22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