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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아노 톰마시 : 고결한 로마의 전설, 겸손한 중원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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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07 16:50:52

[TFT] 다미아노 톰마시 : 고결한 로마의 전설, 겸손한 중원의 마법사

DAMIANO TOMMASI: THE UNASSUMING MIDFIELD MASTER WHO BECAME ROMA’S NOBLEST OF LEGENDS 

 

 

 

 

 

[The Football Times = Tom Griffiths]

  

 

 

검게 헝클어진 머리칼과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을 한 다미아노 톰마시는 이탈리아 축구 선수 협회(AIC)의 회장으로 아주 적합한 인물상이었다. 몇몇 회색빛의 머리칼을 빼면, 그의 외형은 1994년 19살에 나이로 베로나에서 데뷔했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 

 

2011년 다미아노 톰마시는 AIC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사실 그는 20년에 가까운 선수 생활 동안 이 직위에 추대되기 마땅한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톰마시는 현대 축구 선수의 전형을 깨뜨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원칙적이며 이타적인데다 지성을 갖추기까지. 그는 선수 생활 초기부터 도덕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소총을 들고 나라에 봉사하고 싶지 않다"라며 병역 대신 대체복무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2004년 징병제를 폐지하기 전까지 병역을 져야 했고, 대체복무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대체복무자들은 문화유산을 보호하거나 재난 발생 시 긴급 대처가 필요한 분야 등에 투입됐다. 전쟁 발발시엔 대체복무자도 민간인 보호 업무나 적십자 활동에 배정된다.>


프로 데뷔 후엔 팀 메이트들의 징계 벌금 등이 자선 사업에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감독하기도 했다. 선수 생활을 마치고선 꽤 큰 자선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수 생활 마지막 시즌엔 이탈리아 이주민들을 위한 주택 건설에 직접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현재까지도 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톰마시는 연고 클럽인 헬라스 베로나의 유스 아카데미를 거쳤고 견실한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다.

좋은 볼 터치와 그라운드 어디든 공을 보낼 수 있는 패스웍, 강한 집념을 가진 태클러로 세리에 A 팬들에게 각인됐다. 1996년 여름, 이탈리아 대표팀이 유로 96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톰마시가 소속된 아주리니는 개최국 스페인을 상대로 힘겹게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톰마시는 당시 아주리니의 핵심 선수였으며 파비오 칸나바로와 알레산드로 네스타 앞에서 포백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U-21 대회 타이틀을 얻고 세리에 B에서 세 시즌을 보낸 뒤, 그는 로마의 부름을 받고 ‘영원한 도시’로 이적을 결심한다.

 

 

 

 

1996-97 시즌 로마는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치며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했다. 하지만 톰마시는 세리에 A 데뷔 시즌임에도 30경기에 출장했고, 그 시즌 로마의 몇 없는 수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1997년 즈데넥 제만이 로마의 감독을 맡자 이제 로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전술‘을 자랑하는 팀으로 변모했다. 톰마시는 제만의 미친 듯한 공격 전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쟐로로시의 레지스타로 로마판 제만란디아의 북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후방에서 상대 공격의 예봉을 꺾고, 공격에 가담하거나 예리한 패스를 날려 로마 공격의 신호탄을 쐈다. 

 

 

1999년 파비오 카펠로가 로마의 사령탑이 되자 로마와 톰마시는 한 단계 더 진화했고 2001년 스쿠데토를 따내기에 이른다. 톰마시는 카펠로가 베스트 11을 짤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넣는 선수 중 하나였다. 보통 크리스티아노 자네티나 에메르손과 짝을 이뤄 중원에서 더블 볼란치로 나왔으며 왈테르 사무엘, 아우다이르, 조나단 제비나로 구성된 스리백 앞선에서 철벽을 쳤다. 이들의 존재로 좌우 윙백 카푸와 뱅상 캉델라는 마음 놓고 공격에 가담할 수 있었다.

 

한편 카펠로는 피치 반대편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프란체스코 토티, 빈첸초 몬텔라와 마르코 델 베키오의 초호화 공격진을 세워 로마를 상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안기는 팀으로 빚어냈다. 톰마시는 전형적인 피치 위의 ‘언성 히어로‘였는데, 공격진이 전방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궂은 일을 도맡으며 팀의 엔진 역할을 했다.

 

로마에서 톰마시와 네 시즌 동안 한솥밥을 먹은 프란체스코 안토니올리는 “우리가 스쿠데토를 들어 올린 그 시즌, 톰마시는 실로 엄청났다. 그는 언제든, 어느 곳에나 있었다. 매 경기 지독한 일을 도맡아 했음에도 끊임없이 볼을 따내고 계속 내달렸다”고 회상했다.

 

아래 영상 20초 부터

https://youtu.be/IYXlR_JFOU4?list=PLnqKtH55qr4dyrZQZ8SVu-Z3BwLnAIeR5

 

톰마시가 얼마나 스쿠데토에 기여를 했는지는 단 한 경기로 함축될 수 있다. 때는 2001년 1월, 당시 3위를 달리고 있던 아탈란타 원정이었다. 이전 경기에서 리그 우승을 두고 다투던 유벤투스와 비긴 뒤, 로마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롬바르디아로 향했다. 장대비가 퍼붓던 베르가모에서, 톰마시는 그야말로 불굴의 사나이였다. 마치 검투사 같았던 그는 중원에서 볼을 받고 내달려 박스로 침투한 끝에 2-0 승리에 방점을 찍는 골을 터뜨렸다.

 


 

 

톰마시는 늘 영웅이 되기를 꺼렸고 자신의 공을 낮추고 다른 이에게 공을 돌리는 그런 선수였다. 1998년엔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됐지만 자신은 아주리에 선발되기엔 부족하다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스쿠데토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펼치자 지오바니 트라파토니가 함장을 맡은 아주리 호에선 선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당시 이탈리아엔 중원에 기술적으로 완벽한 미드필더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톰마시만큼 팀에 헌신하며 투지를 불사르는 선수는 없었다. 트라파토니는 두 명의 미드필더를 선호했는데, 당시 인테르로 이적했던 크리스티아노 자네티와 짝을 이뤄 중원에서 재회할 수 있도록 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톰마시는 엄청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루이지 디 비아죠와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제나로 가투소가 조연을 맡았다면, 톰마시는 단연 주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대안이 될 수 있던 마시모 암브로시니, 알레시오 타키나르디와 부상당한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는 안타깝게도 아주리 승선에 실패했다.

 

 

 

 

2004년 프리시즌을 앞두고 로마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토니 풀리스가 이끄는 스토크 시티와 친선 경기를 펼쳤다. 그 경기에서 톰마시는 게리 타가트의 무자비한 태클에 오른쪽 무릎이 완전히 박살났다. 그 자리에서 잔디로 나뒹굴었고 한눈에 그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검사 결과는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다는 소식. 그는 31세였고 다시는 최고조의 톰마시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2004-05 시즌을 통째로 날린 톰마시는 그라운드에 다시 서고자 하는 일념으로 재활에 매진했다. 그러나 축구 선수로서 적은 나이가 아니었던 그는 회복이 더뎠고, 쟐로로시 선수단이 2005-06 시즌을 앞둔 프리시즌 훈련에 접어들었음에도 팀에 합류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톰마시의 헌신하려는 마음가짐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수술과 재활을 집도했던 외과의는 그의 재활 기간, 놀라운 근력과 복귀를 향한 열망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톰마시의 재계약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의 적지 않은 나이와 치명적인 부상은 로마에게 꽤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당시 로마는 로젤라 센시 구단주 하에 재정을 엄격히 통제하던 시절이었는데, 오랫동안 팀에 헌신해온 톰마시를 지켜야 하는 한편 그가 부상 이전의 기량과 몸 상태를 갖췄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리고 톰마시와 로마 사이 타협안은 1년 계약 연장이었다.

 

사실, 톰마시는 여러 곳에서 로마의 제안보다 더 좋은 오퍼가 왔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오히려 그가 로마에 역제안을 했는데, 최소 급여인 월에 고작 1500유로를 받는 조건으로 사인하겠다는 것이었다.

 

톰마시에게 돈은 문제가 아니었고 진정 그가 중요히 여긴 것은 그가 여전히 최고 수준 경기에서 뛸 수 있느냐였다. 재활 기간 스스로와 정신적, 신체적으로 사투를 펼쳤지만, 한편으론 팀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연봉을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지난 10년간 로마에 충성을 다했고 클럽에 빚진 것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톰마시에게 있어 이 문제는 명예 회복을 위해선 꼭 풀어야만 하는 과제였다.

 

 

 

 

그의 행동은 축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일은 축구계의 어떠한 상식선을 초월하는 행동이었고, 톰마시는 여러 면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몸소 실천하는 가톨릭 신자인 그는 오랫동안 독실한 신자로도 유명했고, 바티칸에서는 다음과 같은 축복을 내리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수 백, 수 천만 유로를 벌어들이고 있고 재계약으로 과도한 액수를 요구하는 시대에, 톰마시는 흔치 않은 결정을 내렸다”

 

2005년 10월, 톰마시는 마침내 다시 로마 유니폼을 입었고 아스콜리, 메시나, 유벤투스전에 교체 출전하며 카메오로 나섰다. 그를 대표하는 17번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선발 출장했던 것은 피오렌티나와 경기에서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상을 당한지 17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약간의 두려움을 안은 채 경기에 나섰던 톰마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장장 17개월에 달하는 재활을 거친 뒤였으니 그 스스로 그의 무릎이 세리에 A 수준에서 버텨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을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https://youtu.be/fXXqNn75_QY 

 

그리고 톰마시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금방 떨쳐낼 수 있었다.

 

톰마시는 경기 시작 20초 만에 왼쪽 측면에서 피렌체 수비수 토마스 위팔루시와 볼 경합 끝에 볼을 따냈고 프리킥을 얻어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로마는 피오렌티나 진영에서 볼을 따냈고 빠르게 전개된 볼은 우측면에 비어있던 안토니오 카사노에게 향했다. 그는 페널티 박스로 쇄도하던 톰마시를 향해 지체 없이 땅볼 크로스를 날렸고, 때맞춰 당도한 톰마시는 위팔루시를 간발의 차로 따돌리며 골네트를 갈랐다.

 

 

겸손하기로 이름난 톰마시조차 그 순간 터져 나오는 기쁨을 절제할 순 없었다. 이 순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쟐로로시 동료들이 그를 덮쳤다. 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있었다. 그는 장장 17개월에 걸친 여정 동안 그와 함께 했던 팬들을 향해 스타디오 올림피코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를 힐난할 수 없었다.

 

비올라전 이후로 톰마시는 다시 중용 받기 시작했다. 그 시점부터 로마의 남은 세리에 A 31 경기 중 두 경기를 제외한 총 29경기를 뛰었다. 또한 UEFA컵 16강과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을 거두는데도 일조했다. 아쉽게도 인테르에 2차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톰마시에게 이 시즌 성과는 클럽과 서포터들에 진 마음의 빚은 어느 정도 떨쳐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정도였다.

 

 

 

 

결국 2006년 여름, 마음의 평화를 찾은 톰마시는 로마와 결별했고 스페인의 레반테에서 2년을 보낸 뒤 잉글랜드의 퀸스 파크 레인저스와 중국 톈진 테다 등을 전전했다. 그는 30대 중반까지 유럽에서 뛸 만한 경쟁력을 유지했고, 극심한 부상에서 돌아와 다시 로마에서 중요한 선수로 올라섰다. 이런 점에서 톰마시의 신체 회복력과 정신적 강인함은 많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낼 만하다.

 

톰마시가 로마에서 존경받는 인물임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2015년에 그는 AS 로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쟐로로시에서만 약 350경기를 넘게 뛰며 헌신한 보답이랄까. 하지만 그는 헌액 연설에서도 ‘그 다움‘을 보였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은 너무도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건 꼭 말해야겠는데, 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제가 같은 곳에 높이에 설 수 있다곤 생각이 들질 않네요. 로마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들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은 꼭 영웅들과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지만 다미아노 톰마시는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영웅, 롤모델로 여겨졌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톰마시를 향해 진정으로 고결한 축구 선수였노라고 말해도 좋겠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9/01/17/damiano-tommasi-the-unassuming-midfield-master-who-became-romas-noblest-of-leg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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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진 머리칼과 수염으로 유명한 톰마시 이야기입니다.

 

톰마시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기술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한 패스웍을 보유했던 전천후 미드필더이기도 하죠. 톰마시의 1년 월 1500유로 재계약 이야기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선사업까지 널리 행하는 선수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렇게 스스로 낮추기 좋아하고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는 선수도 참 드물 것 같습니다. 로마의 전성기를 모두 함께했던 톰마시인데, 말년이 조금 아쉬웠죠. 로마에서 못해도 2-3년은 더 뛰었어야 하는 선수인데... 당시 로젤라 센시의 행동이 참 이해가 안갔었는데 이 글에서는 딱히 꼬집고 있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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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7-07 16:49:42

토마시도 약간 데로시같은 스탈이었나보네요

OP
2019-07-07 17:09:16

제만이 지도하던 시기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제만이 여러 팀에서 레지스타들을 썼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답이 나올 듯 합니다.

카펠로 시기에는 꽤 침투도 잦고 오히려 데로시가 미군시절에서 점점 후방으로 갔다면, 톰마시는 후방에서 조금씩 전방으로 갔다고 봐야할 것 같기도 하네요

 

수비력도 뛰어나서 태클러였음에도 카드도 많이 안 받았었고 스태미너도 좋은데, 전진성도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수라 그런지 단점을 좀 꼽기가 힘드네요 ..ㅎ

 

그래도 여기저기서 모두 제 몫 이상 해내고, 롱런한 데 로시가 더 좋은 선수라고 생각은 듭니다


2019-07-07 17:03:10

ㅠㅠㅠ간지..

OP
1
2019-07-07 17:11:15

이렇게 겸손한 면이 있는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냥 투지 넘치고 견실해서 좋아했었는데 인품까지 갖췄다니 그야말로 간지가..

2019-07-07 20:24:47

로마라는 팀을 좋아했던 이유중 하나였습니다.
토티, 데로시, 톰마시, 맥세같은 선수들이요.
오랜만에 이렇게 글로 보게되니 반갑고 아련하네요

OP
2019-07-08 01:56:04

저는 로마에서 유독 델 베키오를 좋아했는데 닉네임을 보니 반갑네요 ㅎㅎ

장신에 재간까지 갖춘 선수들을 참 좋아라했는데

그때는 비에리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하나였네요

Updated at 2019-07-08 05:24:51

지금도 선수협회장으로서 세리에의 인종차별에 맞서 고군분투하는즁 ㅠㅠ

로마 올드팬들중 많은분들이 애정순위 탑3안에 꼽을듯

2019-07-08 08:38:33

 근본갑 ㅠㅠ

20
21441
22-02-07
49
25413
21-04-06
31
17585
20-12-31
37
13679
21-03-03
65
14169
21-04-09
62
6495
20-07-30
59
6252
20-03-29
46
4669
20-01-15
28
2163
21-02-08
33
2661
21-02-04
32
5568
21-01-26
31
6079
20-11-09
29
2533
20-10-30
32
2593
20-10-10
35
4263
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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