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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만란디아 : 컬트적이었던 즈데넥 제만, 그리고 그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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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15 16:11:37

[TFT] 제만란디아 : 컬트적이었던 즈데넥 제만, 그리고 그 이면

ZDENĚK ZEMAN’S ‘ZEMANLANDIA’: THE TRUTH BEHIND THE CULT

 

 

 

 

[These Football Times = Blair Newman]

 

 

현대 축구는 하향식 경쟁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리그 순위표는 피할 수 없는 확정 판결과도 같은데,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순위‘라는 지표가 있기 때문이다. 혹여 최하위권 성적표를 받아들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 펼쳐지게 된다.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며, 구단의 재정적인 투자, 역사, 기대감 등 모든 것들이 뒤섞여진 답이 나온다. 감독들은 넋이 나가버린다. 수년간의 경기 분석과 훈련 세션, 이론과 현실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도출된 아이디어 등 모든 것들이 무시되어져 버리므로.

 

결국 이러한 시스템은 감독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과를 꼭 내야 한다면 당연히 부정적인 것들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쁜 결과를 면해야 한다면 실용성이 뒤따르기 마련. 감독들은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최종 승점, 리그 순위 같은 것들에 종속시켜버린다.

 

결국, 축구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이상주의자들조차 묵시적으로 실용주의를 택하고 결과가 부리는 변덕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즈데넥 제만은 달랐다.

 

“0-0은 지루하다고. 그럴 바엔 4-5로 지겠다. 적어도 재미는 있잖아?”

 

이런 면은 그의 보헤미안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스코어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꽤 반골적인 스탠스로 여겨질 만한데, 하물며 1990년대 이탈리아에선 어떠했겠는가? 그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제만은 포지아, 라치오, 로마에서 감독을 맡았고 기존의 축구관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을 펼쳤다.

 

 

 

 

 

제만란디아의 시작

 


 

제만은 프로 축구선수로 뛰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축구를 업으로 삼으려 한 적도 없었다. 프라하에서 나고 자란 그는 16세 즈음 배구와 핸드볼 종목에서 청소년 대표로 뛸 정도의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스하키도 꽤 잘 했는데, 이는 후에 지독하기로 소문난 제만의 훈련 방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여름 제만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으로 가, 삼촌과 4개월을 함께 지냈다. 그의 삼촌은 유벤투스, 파르마, 팔레르모 등에서 뛰었던 세츠미르 바이팔렉으로 갓 감독으로 전업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해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선 알렉산더 두브체크 정부의 자유화 운동, ‘프라하의 봄‘사건이 일어났고 바르샤바 조약군이 제만의 고국을 침공했다. 제만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 시칠리아에 남기로 했다. 아마도 이것이 제만이 선택한 유일한 ’현실적인‘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팔렉은 1970년대 초반 유벤투스를 이끌고 연속 스쿠데토를 이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만을 축구 감독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길을 닦아놓은 상태였는데, 지역 아마추어 팀을 지도하는 한편 팔레르모 대학에서 스포츠 의학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74년 그는 팔레르모 12세 이하 유스 코치를 시작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제만은 1979년 코베르치아노에서 감독 라이센스 과정을 수료했는데, 이때 그의 동기 중 한 명이 바로 그 위대한 아리고 사키였다. 당시 제만과 사키는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축구에서 무명에 가까웠으나, 결국 칼치오를 바꾼 두 명의 이상주의자로 거듭나게 된다.

 

팔레르모 유스 팀에서 4년을 보낸 후, 제만은 리카타에서 첫 감독직을 맡게 된다. 그는 곧바로 즈데넥 제만이라는 감독을 정립하는 두 가지 표준을 정립한다. 바로 화끈한 공격 축구와 젊은 선수들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는 1985년 리카타를 세리에 C2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당시 팀엔 유스 선수들이 대거 포진돼 있었으며 34경기에서 58골을 넣었다.

 

제만은 1986년 리카타를 떠나 포지아를 맡는다. 그곳은 제만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곳이지만, 사실 처음 그 팀을 맡았을 때는 썩 신통치 않았다. 사타넬리를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밀란으로 떠난 사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파르마로 떠난다. 하지만 7경기 만에 경질되고 그에게 1년 계약을 제의한 메시나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팀을 세리에 B 최다 득점팀으로 만들고 다시 포지아의 부름을 받는다.

 

 

 

 

 

 

2 - 8

 

 

제만은 결코 패배를 면해야만 한다는 이탈리아식 축구 개념에 신경 써본 적이 없다. 그는 2012년 ‘The Blizzard’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감독들은 경기에서 패하는 것이 곧 경질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대부분의 팀들이 자기 자신의 플레이를 하기보다 상대의 플레이를 막으려는 경향이 있지. 그들은 지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내 철학과는 썩 거리가 있지만 말이다”

 

사실 경질에 대한 두려움은 최소한 제만에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지도. 어쩌면 1992년 5월 24일, 파비오 카펠로의 밀란과 일전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 경기는 1991-92 시즌의 최종전으로 밀란은 이미 스쿠데토를 확정 지은 상황. 게다가 로소네리는 33경기 연속 무패를 달려오며 시즌 내내 한 경기도 패하지 않았다. 반면 포지아는 지난해 승격에 성공한 후, 공격적인 경기 운영을 바탕으로 세리에 A에 갓 터를 잡은 상태였다.

 


유동적인 4-3-3 시스템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풀백, 침투가 잦은 중앙 미드필더와 전방의 스리톱까지. 특히 그 스리톱은 좌우 윙과 스트라이커가 아닌 세 명의 스트라이커로 이뤄졌다. 사타넬리는 1990-91 세리에 B 최다 득점팀이었으며 67득점으로 2위인 우디네세와는 무려 14점 차이나 났다.

 

세리에 A에서도 포지아의 색깔은 ‘닥공’이었고 시즌 내내, 프리 시즌조차도 그랬다. 제만식 이상주의가 그라운드로 발현된 축구. 그것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가끔은 잔혹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축구계에는 ‘너무 큰 점수 차 승리는 지양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승리가 확보되면 상대를 심하게 두들겨 팰 필요까진 없단 것으로, 양측은 큰 소모 없이 경기를 끝내는 게 효율적이란 이야기다. 패한 팀은 체면을 세울 수 있고 승리한 팀은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으니.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이 팀에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암묵적인 룰은 1992년 5월 24일, 스타디오 피노 자케리아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제만 축구의 어두운 부분을 이해하기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5분 정도 되는 짧지 않은 영상인데, 기회가 있으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마지막 푸세르의 골이 터지기 전, 꽤 재밌는 장면이 있네요.

 

카펠로의 밀란은 시대의 아이콘이었지만 그날 전반전만큼은 제만의 포지아가 더 나았다. 사타넬리는 제만이 자랑하는 쌍포, 쥐세페 시뇨리와 프란체스코 바이아노의 골로 전반을 2-1로 마친 상태. 밀란은 포지아가 멋스럽게 패스를 돌리는 것을 구경하고만 있었고 상대의 이상한 흐름에 휘말려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무패행진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포지아 입장에서 후반전 45분은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그들은 잔뜩 판돈을 올리고 으스대는 밀란을 당해내지 못한 채 7실점, 2-8로 패배했다. 스코어보드는 파올로 말디니, 뤼트 훌리트, 마르코 판 바스텐, 마르코 시모네, 디에고 푸세르 등 밀란 선수들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포지아의 홈이었음에도 참 이상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경기로 제만의 이상향을 향한 도전이 꺾이기는커녕, 외려 도전 그 자체의 순수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포지아는 대패를 당했지만 제만의 이상향이 수정되는 일은 없었다.

 

포지아는 1991-92 시즌을 9위로 마감했다. 58득점을 해낸 포지아보다 더 많은 골을 넣은 클럽은 밀란(74) 밖에 없었으며, 포지아의 58실점보다 더 많은 점수를 허용한 팀은 리그 최하위인 아스콜리(68)가 유일했다.

 

이후 포지아는 세리에 A에서 두 시즌을 더 머물면서 가장 재밌는 축구를 펼치는 팀으로 이탈리아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포지아의 축구 스타일은 쾌락주의와 마조히즘 사이에서 평행을 이뤘으며 '결과'는 제만란디아의 대담한 여정에 있어 그저 순간의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젊은 선수들

 

 

 

“최근 많은 감독들은 선수를 길러내려 하지 않고 그냥 팀을 꾸리려고만 한다. 결국 좋은 감독을 만드는 것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선수를 다듬어내는 감독은 거의 없다. 물론 나는 그 거의 없는 감독군에 속하지”

 

제만란디아는 젊은 선수들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제만의 감독 경력 출발점부터가 팔레르모에서 유망주들을 1군으로 올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리카타에서와 마찬가지로, 포지아 시절에도 젊음의 혈기라는 부분은 그의 철학을 녹여낸 팀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제만이라는 사람을 이야기해보자. 터치라인에서 꽤 차분한 편이었고 애연가에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관행을 무시하는 쿨한 사람이었다. 강렬한 인상을 내뿜은 채 동유럽의 히피 감성이 그득한 수트까지. 그는 때때로 파괴적이었지만 이탈리아 축구의 이성적인 면이 아주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상명하복, 하향식 권력을 부리며 독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팔랑귀들에겐 그의 철학을 때려 박는 타입의 인물이었다.

 


제만이 추구하는 강한 압박과 높은 수비 라인은 타고난 끈기,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일 수 있는 스태미너와 의지를 필요로 했다. 골키퍼들 또한 루즈볼 처리를 위해 언제든 페널티 박스 밖으로 뛰쳐나올 준비가 돼있어야만 했고 빌드업에도 깊게 관여해야 한다. 전방에서 뛰는 선수들은 포지션에 대한 집단적 이해, 유동성, 연계를 갖춰야 하며 꺾이지 않고 돌파하려는 마음가짐, 반복된 훈련을 통한 움직임 등도 요구된다.

 

때문에 제만은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의 선수들은 모두 그의 트레이닝 세션을 소화해야만 했다. 힘들기로 소문난 그의 훈련 방식에 의문부호가 달리기도 했는데, 제만은 “훈련 때문에 죽은 선수는 없는걸?”이라고 답했다.

 

이 덕인지 제만이 길러낸 선수들은 훗날 어느 팀에서 뛰든 잘 융화될 수 있는 높은 전술 이해도와 기술 수준을 갖췄다.

 

 

“제만에게 그만의 ‘미기후’가 없었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2009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제만란디아’의 감독 쥐세페 산소나가 한 말이다. 미기후는 주변 환경과 다른 국소 지역의 특별한 기후나 지표를 뜻한다.

 

“제만은 전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선수들의 배후에 있었죠. 선수들은 그에 의지해야만 했어요. 때문에 제만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선수보다는 어린 유망주들을 지도할 때 더 시너지 효과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1990년대 초반 포지아의 성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89년 제만이 포지아로 재부임했을 때, 당시 20세였던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제만에 의해 주전 골키퍼로 낙점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 특이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제만란디아에서 골키퍼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 아니라, 공이 올 때 반응하는 것이 아닌, 미리 흐름을 읽고 자유자재로 소유권을 이어갈 줄 알아야 했다.

 


만치니 앞에는 19세에 주전 센터백으로 뛰게 된 파스콸레 파달리노가 있었다. 포지아가 세리에 A로 승격하면서 21세의 살바토레 마트레카노가 그의 파트너로 영입됐다. 그는 직전 시즌을 세리에 C2의 투리스에서 뛰었던 풋내기에 불과했다. 한편 공격 삼각편대는 23살 동갑내기 시뇨리와 바이아노, 그리고 1989년 팀에 입단한 로베르토 람바우디로 이뤄졌다.

 

이 선수들은 포지아의 생존에 있어 중요한 선수들이었고 이후 세리에 A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선수들이었다. 만치니는 나폴리로, 마트레카노는 파르마로 향했다. 파달리노와 비아이노는 피오렌티나에서, 람바우디와 시뇨리는 라치오에서 뛰었으며 이들 넷은 아주리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이들은 제만에게 젊은 선수들의 에너지와 피지컬적인 것들뿐 아니라 탁월한 전술 흡수력으로 제만란디아를 구현할 동력을 제공했다. 제만과 애제자들은 전술적 시야를 공유했고 몇 해에 걸친 훈련을 통해 '맛있는 축구'를 그라운드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컬트적인 팀으로 남았다.

 

 

 

 

 

 

1994년 제만은 라치오로 떠났고 람바우디, 시뇨리와 재회했다. 첫 시즌부터 그는 한 우아한 기풍의 10대 센터백에게 기회를 줬으니, 바로 그의 세대에서 최고의 수비수로 기억될 알레산드로 네스타였다.

 

“나는 첫날부터 네스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라치오 프리마베라에서 뛰고 있었지만 거의 1군과 함께 훈련했다. 보드진은 그를 세리에 C로 임대 보내길 원했지만 난 그들을 설득해 네스타를 팀에 남기기로 했다”

 

선수로서 능력들이 형성될 시기, 네스타는 제만의 존재로 큰 수혜를 누렸다. 제만은 네스타의 정제된 테크닉과 볼을 다루는 능력을 한눈에 알아봤고 망설임 없이 그를 세리에 A 무대에 내놓았다. 19살 즈음, 네스타는 라치오의 주전 수비수가 됐다.

 

“모든 어린 선수들은 제만에게 지도 받길 바랄 것”

 

네스타가 은퇴 즈음에 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프란체스코 토티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로부터 되풀이됐고,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제만은 1997년 라치오 팬들이 증오하는 라이벌인 AS 로마로 떠났다. 논란이 일기도 했던 결정이지만, 제만은 그곳에서 그의 경력에서 일생일대의 만남을 갖는다.

 

프란체스코 토티는 제만이 오기 전까지 세 시즌을 주전으로 뛰고 있었지만 아직 두 자릿수 득점은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만이 사령탑을 맡은 후, 그는 1997-98시즌 14골, 이듬해는 16골을 넣었고 로마의 10번 셔츠와 주장 완장까지 찼다. 그리고 그는 2013년 은사를 향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제만은 내 프로 경력과 인간으로서 성장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아름다운 패자

 


제만의 끈질긴 이상주의는 그가 성과에 초연하다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다. 오늘날까지 감독 즈데넥 제만이 거둔 가장 큰 성공 사례는 1990-91 시즌 포지아의 세리에 B 우승이 전부다. 20년 후에도 페스카라에서 옛 영광을 재현하기도 했지만. 두 로마 클럽을 맡는 동안 그는 세리에 A에서 성공했다고 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아쉽게도 스쿠데토까진 손길이 닿지 않았다.

 

 

라치오에서 첫 시즌인 1994-95시즌, 비안코셀레스티는 경기당 두 골 이상(34경기 69득점)을 터뜨렸다. 직선적이고 스피드 넘치는 람바우디, 약은데다 기교까지 갖춘 시뇨리, 페널티 박스의 여우 카시라기까지. 제만의 시그니처 4-3-3 포메이션은 훌륭한 공격력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팬들 매료시키는 연계 플레이, 지역 방어까지 펼쳐 보이며 진정한 제만란디아를 펼쳤다.

 

그들은 경기를 이길 때면 아주 크게 이겼다. 5-1로 나폴리와 파도바를 찍어 눌렀고 제만의 전 클럽 포지아는 7-1로 대파했다. 피오렌티나는 2-8이라는 치욕을 당했고, 이는 1952-53 시즌 유벤투스전 이후 비올라의 두 번째 8실점 경기였다.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에게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0-4 패배의 굴욕적인 장소로 남았다. 유벤투스는 심지어 홈에서 0-3으로 졌고, 인테르는 홈, 어웨이 합산 1-6으로 패했다.

 

 

1995년, 라치오는 2위라는 높은 순위로 보상받았다. 1995-96 시즌 3위, 1996-97시즌을 4위로 마감한 것에 비하면 첫 시즌 성적이 가장 좋았다. 이후 제만은 같은 수도 팀인 AS 로마로 옮겨가 12위까지 떨어졌던 팀을 4위로 끌어올렸고 두 번째 시즌엔 5위로 마감, 로마를 다시 세리에 A에서 경쟁력 있는 팀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축구 철학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서 이 모든 걸 이뤘다. 젊은 선수 기용과 팬들을 들뜨게 하는 축구 둘 다 놓치지 않고 말이다.

 

제만은 피치 밖에서도 더 의미가 깊은 무언가를 향한 탐색을 이어나갔다. 로마 재임 중이던 1998년, 그는 ‘레스프레소‘지와 인터뷰에서 “약국에서 꺼져라”라며 칼치오가 상업에 종속돼버렸고 곳곳에서 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며 성토했다.

 

그것은 바로 당대 '논외의 팀'으로 불리운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축구에 만연한 약물 도핑에 연루돼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의혹은 7년 반에 걸친 긴 싸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2004년 11월 비안코네리의 팀 닥터 리카르도 아그리콜라는 집행유예 22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항소심을 거쳐 2007년 형이 확정됐다.

 

그의 도핑 의혹 제기가 어떤 사실이나 거짓, 혹은 그 사이의 것들에 기초하고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든 간에, 중요한 것은 제만이 또 한 번 ‘실용적인 노선‘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침묵이라는 전략적인 수단을 활용해 그의 감정을 숨기고 ’고발자‘라는 타이틀을 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후에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수뇌부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후 내 커리어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 나는 밀란, 인테르, 혹은 레알 마드리드를 맡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소 클럽들을 맡으며 커리어를 이어가기 전까지 터키 클럽 페네르바체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따지고 보면 제만은 늘 제값을 치러왔다. 포지아 시절부터 제만란디아가 이탈리아 축구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기까지, 그는 위계질서라는 개념을 파괴하면서 나아갔다. 그는 오히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축구에 관한 아이디어나 시각들을 밀고 나갔으며 대부분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면서도 2-8 참패, 텅 빈 트로피 진열장,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축구 속 실용주의 같은 것들에 한 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론 단 한 번도 강등권 사투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제만은 그가 지도한 선수들뿐 아니라 보는 관중들에게도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자 하는 열렬한 광신도로 남았다. 특히 구시대적인 것을 휘저어버리고 새롭고 아름다운 축구를 창조하는 것과 그 탄생의 순간을 즐기려는 관중들에게 말이다. 이런 미학적인 면에서 리그 순위는 거의 의미가 없었고 결과보다는 골이 더 사랑받았다. 이런 강렬한 감정적 요소들이 제만의 항해에 연료가 된 셈이다.

 

 

2012년, 제만의 축구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팬들이 내가 꾸린 팀의 경기를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한 정서적 파동을 남길 수 있길 바라지”

 

로마 팬이자 이탈리아 가수인 안토넬로 벤디티는 1999년, ‘La Coscienza di Zeman’이라는 헌정곡을 냈다. 아주 적절하게도 이 곡은 “Perche non cambi mai”라는 가사가 반복되면서 끝난다. 왜? 제만, 당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니까.

 

 

 

원문 링크 

 | https://thesefootball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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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본 축구 감독들 중 가장 개성 넘치는 인물이 아닐지...

개인적으로 제만은 지금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트로피나 클럽에서의 성공과는 별개로 축구사 전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 축구에 큰 파동을 일으킨건 분명하죠.


최근에야 측면에 날개자원 대신 공격수를 기용하는 4-3-3이 꽤 일상적으로 나오지만 저 당시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다고 하죠. 바르샤에서 메시-샤비-알베스가 펼치던 카테나 컴비네이션도 제만 축구에서 꽤 자주 나타나고 있고, 스리백이 득세하던 시기에 스리톱으로 당대 강팀들을 깨부쉈었죠. 별개로 제만은 포제션은 무익하다.며 티키타카에 대한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었습니다만...

 

본문에 언급된 네스타나 토티 뿐 아니라 파르마에서 유스인 아폴로니를 끌어 쓰기도 했고, 포지아에서도 약관의 디 비아죠를 주전으로 기용했었죠. 라치오의 오른쪽을 책임진 네그로도 제만의 작품이랄 수 있고 로마에서도 캉델라, 톰마시를 제대로 터뜨렸습니다. 페스카라는 말할 것도 없구요. 물론 제만을 못 견디고 그를 떠난 선수도 꽤 되기는 합니다.

 

본문에서처럼 트로피 진열장은 초라할지라도 40년이 넘도록 축구계에 몸담는 동안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것에도 리스펙하고 싶구요. 물론 이런 부분 때문에 메머드급 클럽에선 제만을 부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칼치오의 진화와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은 것이 지금의 제만을 있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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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7-14 20:18:10

    제일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ㅜㅜ

    사나이축구!!

    OP
    1
    2019-07-15 00:41:32

    닉네임 옆에 아이콘을 보니 제만이 더 떠오르네용~

    1
    2019-07-14 23:38:01

    정서적 파동... 크...
    요새 단지 닥공축구를 추구했다고만 언급되지만, 당시만해도 드물었던 전방압박시스템을 잘 구축한 감독이니 전술사적으로도 족적을 남긴 감독이 아닐까 싶네요

    OP
    1
    2019-07-15 00:38:51

    저도 그런 부분 때문에 제만을 높게 평가합니다. 어쩌면 제만이 바랬든 파동이 한국 땅까지 울린 걸지도...

    1
    2019-07-14 23:55:49

    좋은글이네요. 추천합니당

    OP
    1
    2019-07-15 00:40:06

    감사합니다. 제가 쓴 글은 아니고 해외 칼럼을 번역해서 올린겁니다. 

    90년대 이탈리아 축구 감성에 관한 글들이 많더라구용

    1
    2019-07-19 15:24:54

    이런 해외 칼럼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OP
    1
    2019-07-19 15:36:17

    These football times 라는 곳입니다. 글 말미에 원문 링크 적어두었습니다~

    1
    2019-07-19 18:50:12

    아.. 죄송합니다 ㅜㅜ

    1
    2019-07-15 00:53:16

    epl에서 감독 한번 했으면 재밌었을텐데..

    그러기엔 원하는 팀이 없었으려나

    지금 은퇴했나요 제만?

    OP
    1
    2019-07-15 15:51:36

    2017-18시즌 페스카라 재부임 이후론 소식이 없는 것 같네요 ㅠ

    1947년생이시다보니..

    1
    Updated at 2019-07-15 10:38:44

    개인적으로 두번째 로마 감독 시절 제만 축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시원시원하고 역동적인 축구는 정말 드물었거든요.

    제만 전술 특성상 애초에 거대규모 빅클럽 감독직을 맡는게 힘들었겠지만, 제만의 단점은 최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시켜줄수있는 정상급 선수들로 이뤄진 최상위권 클럽에서 저 전술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드네요.
    현재 리버풀이나, 호날두 라모스가 함께 있던 시절 레알같은 클럽들이요.

    OP
    1
    2019-07-15 15:57:52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제만이 당대 유럽 최정상 팀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팀들도 감독 과도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서, 제만이 잠잠했던 2000년대 초반 레알이나 바르샤 같은 클럽들을 맡았으면 참 볼만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1
    2019-07-15 12:30:18

    재미있는 글이네요..뭔가 향수에 빠지게되는..

    잘봤습니다~!

    OP
    1
    2019-07-15 15:58:53

    감사합니다. 

    저도 제목만 보고 제만 이야기라면 그 향수가 떠오르겠다 싶어서 번역해봤습니다. 

    1
    Updated at 2019-07-15 12:47:26

    이름부분 만치니, 치타델라 (이건 발음상이긴 한데)

    파달리노는 오타인듯요.

    참고로 당시 세랴가 스리백이 득세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세랴 최상위권팀들은 대부분 시기 4백 기반이었습니다. 당시 우승권인 밀란, 인테르, 유베, 삼프도리아, 나폴리 등등. 파르마가 좀 예외적이었다고 할까요.

     

    항상 덕분에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OP
    1
    2019-07-15 16:09:09

    항상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음, 오타 이야기는 파달리노는 분명 블로그엔 제대로 쓴 것 같은데 여기는 왜 그렇게 썼을까요 ㅠㅠ Mancini는 예전에 영화 대부에서 본 기억 때문에 제가 늘 만시니 만시니 이렇게 쓰는 것 같아요 ㅠ 치타델라는 글에는 없는 것 같지만 저도 시타델라로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 이탈리아어 발음을 C를 시옷으로 쓸 것이냐 치읓으로 쓸 것이냐, 또 'gn' 뒤에는 ㅑㅛㅠ 같은 이중모음들이 오는 걸 한 번씩 생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90년대 자료가 구하기 쉽지 않아서 예전 세리에매니아 클럽박스가 운영되던 시절에 저 즈음 경기들을 몇개 다운받아 보고 유튜브 영상들도 참고했었는데, 제가 오판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네요. 제만의 스리톱이 5백/스리백과 맞붙어 격파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그런지...

    1
    2019-07-15 17:51:20

     가능성 제로에 수렴하지만

    아시아 국대 한 번 맡아보는거 보고싶음

    우리나라나.. 이란이나..

    1
    2019-07-15 19:31:55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간지남 그자체..

    1
    2019-07-15 21:19:03

    예전에 대한민국에 필요한 감독이 바로 제만이 아닐까란 글을 블로그에 쓴적 있는데.. 그때 생각도 나면서 참 좋네요 ㅜㅜ 제마니즘ㅜㅜㅜ

    1
    2019-07-15 22:54:45

    제만 대신에 본프레레...... ㅜㅜ

    1
    2019-07-16 09:49:00

    글 잘 읽었습니다.

    OP
    1
    2019-07-16 13:11:16

    감사합니다잇!

    1
    2019-07-16 11:40:55

    잘 읽었습니다.
    아마 부치니치와 보지노프도 제만을 만났을 때 만개했던 걸로 기억해요. 페스카라 삼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플로렌치의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끌어낸 것도 제만이었죠. 그때 플로렌치 플레이 참 좋아했는데

    OP
    1
    2019-07-16 13:10:52

    둘이 아마 레쳬였던가 그랬었죠?

    1
    2019-07-16 15:33:04

    개인적으론 컬트적인 인기 때문에 과대평가된 감독이라 생각..

    OP
    1
    2019-07-17 03:06:42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이지만, 사실 제만이 이뤄놓은 성과에 비하면 그의 명성은 과대평가 됐다고 말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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