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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패배감을 안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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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23 10:47:21

[TFT] 역사는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패배감을 안겼는가

HOW HISTORY DEFEATED A GREAT ERA OF YUGOSLAV NATIONAL TEAM TALENT

 

 

 

 

[These Football Times = Onur Bilgic]

 

 

 

 

몇몇 팀들은 메이저 대회 토너먼트에 그들의 족적을 남겼다. 다만 승리는 다른 팀의 몫으로 넘겨둔 채로. 1954년 헝가리와 1974년 네덜란드는 월드컵 결승에 올랐으나 모두 서독에 패했다. 1982년, 지코와 소크라테스가 있던 역사상 최고의 브라질 대표팀은 파올로 로시의 이탈리아에 깨지지 않았는가? 유고슬라비아 역시 이러한 불운의 팀 반열에 놓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유고 내전이 없었더라면, 유로 92와 1990년대 전체에 걸쳐 그들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허나 그들을 굴복시킨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라이벌 팀들이 아닌 역사였다.

 

1980년 5월 4일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티토가 사망한 날이다. 그리고 유고 연방 종말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날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로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발전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유고 연방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1989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집권과 함께 유고 연방의 몰락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티토 사후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닥쳤고 유고 연방의 다민족 구조는 내전 위험을 초래했다. 자국의 불안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스포츠계에는 전에 없던 황금기가 찾아왔다. 두샨 이브코비치 감독이 이끄는 농구 대표팀은 1988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고 1989년 유로 바스켓과 1990년 농구 월드컵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1990년대 수많은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했고 오랜 기간 WTA 랭킹 1위를 지킨 모니카 셀레스 역시 유고슬라비아인이었다.

 

 

 

 

 

축구를 들여다보자면, 1987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대회는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칠레에서 벌어진 16팀이 벌이는 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순조롭게 결승에 올랐고 베르티 포그츠의 지휘 아래 안드레아스 묄러가 뛰던 서독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청소년 대표팀엔 후에 성인 대표팀에서도 주축이 된 선수들이 많았는데, 로베르트 야르니, 즈보니미르 보반, 다보르 슈케르, 이고르 스티마츠,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프레드라흐 미야토비치 등이 있었다.

 

 <1990년 월드컵 서독전, 왼쪽 위부터 요지치, 스파시치, 카타넥, 불리치, 부요비치, 이브코비치, 하지베지치, 사비체비치, 수시치, 발리치, 스토이코비치>

 

 

1990년 월드컵 지역 예선을 1위로 통과한 유고슬라비아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대표팀은 사펫 수시치, 즐라트보 부요비치 등 경험 많은 선수들과 3년 전 청소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잘 어우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재능으로 불리던 즈보니미르 보반이 빠졌는데, 그는 2개월 전 디나모 자그레브와 레드스타의 경기에서 모종의 사건으로 출장정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 긴장감은 막시미르 스타디움까지 번진 상태였고 그날 피치 위에서 벌어진 일은 몇 달 뒤 벌어질 상황을 담아놓은 듯했다. 당시 레드스타 울트라스의 리더는 후에 전쟁범죄자가 되는 젤코 ‘아르칸’ 라즈나토비치였다. 디나모 자그레브는 1991년부터 크로아티아 정부의 수반이 되는 프라뇨 투지만이 가장 좋아하는 팀이기도 했다. 어쩌면 두 팀 사이 벌어진 사태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경기는 자그레브에서 펼쳐졌지만, 경기장 안전 요원들은 세르비아계 경찰들로 구성돼있었다. 스탠드에서 벌어지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의 폭력사태를 막기는커녕, 경찰들은 세르비아인들 편에 서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자그레브의 주장 보반은 피치 위에서 크로아티아 서포터들을 공격하는 경찰관을 발로 차버렸다. 이 일로 그는 크로아티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 행동은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 있어 큰 타격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는 6개월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결과적으로 보반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디나모 자그레브-레드스타 경기 사건을 여러 면에서 유고 내전의 발화점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았는데, 보반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주장에 힘을 보탰다.

 

“나는 그날 모든 것을 걸었다. 내 목숨과 커리어, 모든 명예까지 내놓았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크로아티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보반의 부재와 회의감에 빠진 선수들도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는 1990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나 승부차기에서 2-3으로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 대회가 그들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는 아니었지만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선수들이 한 데 모여 출전한 것은 이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바로 1년 뒤 유고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 월드컵에서 꽤 성공을 거둔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유로 92를 조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선에서 덴마크, 북아일랜드, 오스트리아, 페로 제도와 같은 조에 걸렸고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조의 명운을 건 상대, 덴마크를 상대로 코펜하겐 원정을 떠나 메메드 바자레비치, 로베르트 야르니의 골로 2-0 승리를 거뒀다. 첫 세 경기를 모두 승리한 유고슬라비아는 여유롭게 조 선두에 섰다.

 

좋은 소식은 더 있었으니, 레드스타가 1990-91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라스호퍼, 레인저스, 디나모 드레스덴을 꺾었고 4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다. 뮌헨의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열린 첫 경기를 2-1로 이긴 레드스타는 2차전, 홈에서 추가시간에 터진 클라우스 아우겐탈러의 자책골 덕에 2-2로 무승부, 결승 티켓을 거머쥐었다.

 

 

결승 상대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였다. 1991년 5월 29일 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선 승부차기 끝에 레드스타가 유럽의 왕좌에 올랐다. 이는 유고슬라비아뿐 아니라 전 유럽 축구에도 큰 전환점이 됐다. 유고 연방은 물론 동유럽이 마지막으로 유럽 축구사에 남긴 트로피였기 때문이다. 이후 몇 년간 축구계에서는 외국인 선수 영입 제한이 풀리고 축구의 산업화가 일어났고, 이는 소규모 클럽들이 대회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기회를 닫아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레드스타의 성공은 대표팀의 성공과 직결됐다. 루마니아의 미오드라흐 벨로데디치를 제외하면 레드스타 멤버들은 모두 자국 선수들이었고 대부분이 대표팀에서 뛰고 있었다. 유로 92는 단 1년을 앞둔 상태였고 이비차 오심 감독은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 레드스타라는 팀 전체를 대표팀에 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에 발맞춰 유고슬라비아 국적 선수들은 유럽 빅클럽으로 이적하기 시작했다. 첫 사례는 1990년 여름, 보반이 당대 최강팀 중 하나인 밀란으로 이적한 것이었다. 같은 해 드라간 스토이코비치도 마르세유로 향했으며 이듬해는 다보르 슈케르가 세비야로, 야르니는 바리, 프로시네츠키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었다.

 

 

 

 

 

유로 92 예선 기간, 유고슬라비아는 덴마크 원정에서 승리하며 조 1위에 올랐다. 하지만 1991년 여름에 발발한 유고 내전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는 자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국민투표가 열렸다. 몇 개월 뒤 두 국가는 독립을 선언했고 유고 연방에서 탈퇴를 꾀했다. 물론 축구 대표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 선언은 국제적 조약을 통해 인정받았고 이는 발칸반도의 정치적 위기를 고조시켰다. 밀로셰비치 정부는 그 국민투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크로아티아 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의 지원으로 세르비아 군부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내전이 발발했고 1992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유고슬라비아 전 국토에서 총탄이 빗발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촌은 불과 몇 년 전 냉전의 종식과 동유럽에 부는 민주화의 바람을 목격했으나 이제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발칸반도의 피바람이었다.

 

지난 2년간 정치 갈등으로 영향을 받았고 국가대표팀의 분열을 겪은 유고슬라비아였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유로 92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는 했다. 조 추첨에서도 스웨덴, 프랑스, 잉글랜드와 한 조에 걸렸으며 당시로선 그들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팀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는 힘겨운 상황에 처했지만 오심 감독의 지휘 아래 대표팀은 대회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1992년 6월 1일, 대회를 10일 앞둔 시점에 최악의 소식이 유고슬라비아를 덮쳤다. UN은 발칸반도의 유혈사태에 대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강력한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에는 스포츠 대회 출전 금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제재와 맞물려 UEFA는 유고슬라비아를 유로 92에서 제외하기 이른다. 게다가 가을에 시작되는 1994년 월드컵 유럽 예선조차 나설 수 없게 됐다.

 

유고슬라비아 대신 대회에 출전한 팀은 덴마크였다. 그들은 예선에서 유고에 단 1점 뒤진 2위였다. 덴마크는 당시 준비가 덜 된 상태였고 에이스 미카엘 라우드럽은 당시 감독이던 리하르트 닐센 감독과 불화로 대표팀을 은퇴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덴마크는 스웨덴에 이은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네덜란드와 준결승에선 승부차기에서 판 바스턴의 슛을 막아낸 피터 슈마이켈의 활약에 힘입어 결승전에 오른다. 그리고 덴마크는 서독을 2-0으로 누르고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들의 여정은 유럽 축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로 남았다.

 

만약 유고슬라비아가 정상적으로 대회에 나섰더라면 트로피를 향한 숙원을 풀 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유고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UN의 노력에도 전쟁은 1995년까지 이어졌다. 평화를 위한 노력은 짓밟혔으며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데이튼 평화 협정으로 종전이 이뤄졌지만 발칸반도엔 산산조각이 난 나라와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남았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은 남아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가 독립으로 떨어져 나간 채 초라하게 남아 있을 뿐. 티토 체제에선 수십 년간 평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겨우 이름만 부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에는 결국 그 이름마저 잃어버렸다.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명성을 이은 것은 크로아티아라고 할 수 있다. 유로 96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했고 본선 D조에서 포르투갈, 덴마크, 터키와 한 조가 됐다. 그중 두 번째 경기인 덴마크전은 가히 역사적이었다고 할만하다. 전 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대신해 대회에 참가했던 덴마크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나 크로아티아에 0-3으로 패했다. 그리고 득점한 선수는 전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출신인 보반과 슈케르였다. 결국 그들은 4강에서 독일에 패해 탈락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팀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형식적일지라도 내전 종식과 FIFA 제재 해제 덕에 유고슬라비아는 1998년 월드컵 예선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스페인에 이어 2위를 기록한 후 헝가리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본선에 올랐다. 비슷하게 크로아티아도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를 꺾고 프랑스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본선에서 유고슬라비아는 16강에 머물렀다. 강적 네덜란드를 상대로 잘 싸웠으나 92분 터진 에드가 다비즈의 결승골이 뼈아팠다. 그에 반해 크로아티아는 1987년 결승을 재현해냈다. 16강에서 독일을 3-0으로 꺾은 것. 공교롭게도 독일 감독은 포그츠였으며 안드레아스 묄러도 대표팀에 있었다. 물론 크로아티아에도 야르니, 보반, 스티마츠, 슈케르, 프로시네츠키 등 10년 전 멤버들이 대거 포진돼있었다.

 

4강에서는 프랑스를 상대로 리드를 잡았으나 수비수 릴리앙 튀랑이 놀라운 두 골을 터뜨려 패하고 말았다. 크로아티아는 판정 논란과 더불어 열악한 상황에 지원도 부족했지만 그들의 분전은 축구팬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미하일로비치, 스토이코비치, 미야토비치, 사비체비치와 유고비치 같은 선수들이 그들과 뛰었다고 상상해보라. 이들은 유고 연방을 넘어 전 유럽에서도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다. 유고슬라비아가 1994년, 1998년 두 번의 월드컵 중 단 한 번이라도 한 팀으로 나갔더라면 우승후보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내전은 1995년 12월에 끝났다. 그러나 산산조각 난 나라를 여전히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한 위기는 끝났다고 할 수 없었다. 1998년 3월 코소보 지역에서 다시 전투가 일어났다. 내전 재발을 막기 위해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UN이 개입, 코소보 지역을 장악했다.

 

2000년 10월 유고슬라비아에 새 정권이 들어섰고 밀로셰비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보이슬라프 코슈투니차가 자리를 대신했다. 2년 뒤 네덜란드의 하흐에서 밀로셰비치의 전범 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그는 재판이 채 끝나기도 전인 2006년 3월 옥사했다.

 

내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은 2003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까지 8년이나 명맥을 이어갔다. 2006년 5월 21일엔 몬테네그로가 독립해 그 이름마저 사라졌다.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고 훌륭한 스쿼드로 이뤄진 국가대표팀. 그들은 최후까지 몸부림쳤으나 곧 녹아 없어져 버렸다. 더 이상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없으니까.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7/10/12/how-history-defeated-a-great-era-of-yugoslav-national-team-t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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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유고슬라비아 글보다 더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네요. 원래는 두 글을 묶어서 같이 올리려고 했는데 번역해놓고 보니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냥 따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내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 즈보니미르 보반의 저 킥은 두 나라의 전쟁의 시작으로도 많이 비유됐었죠. 

 

현역인 선수들 중에도 유고 내전을 피부로 겪은 선수들이 꽤 되는 걸로 압니다. 가깝게는 에딘 제코와 데얀 로브렌은 다큐멘터리 필름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네요.

 

미하일로비치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섞여 사는 지역인 부코바르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가 세르비아인, 어머니가 크로아티아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외삼촌은 미하일로비치의 아버지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죽이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하일로비치의 어릴적 친구는 그의 사진에 총을 쏘고 집에 방화를 하는 행동까지 저질렀다고 하죠.

 

지난 2014년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알바니아-세르비아 간 유로 2016 예선 도중, 코소보 전쟁 관련 문구가 쓰인 드론이 경기장으로 날아들자, 세르비아의 미트로비치가 이를 치웠고 알바니아 선수들과 다툼 끝에 세르비아가 몰수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코소보와 알바니아는 종교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스위스와 세르비아의 대결 중 코소보계 알바니아 혈통을 지닌 샤키리와 쟈카가 골을 넣고 알바니아를 상징하는 독수리 날개 세레머니를 하고 징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쓰고 보니 드는 생각인데, 관련 글들에서 많이들 가정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가 유로 92나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연방 시절 스쿼드로 대회를 치를 수 있었다면 우승할 수 있었을까요? 

 

유로 96이나 1998년 월드컵의 전력이 오히려 더 좋아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수비 문제가 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공격 자원은 넘쳐난다고 해도 미하일로비치가 원래 윗선 포지션이기도 했고 수비로 이름을 날린 선수는 아니라서.. 후방에서 시즈모드의 원조격이라고는 하지만요. 1990년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레드스타도 유일한 외국인 선수가 루마니아의 전설적인 수비수 미오드라흐 벨로데디치라고 하네요.

 

미로슬라프 듀키치나 슬라벤 빌리치, 이고르 스티마츠 이런 선수들이 전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비수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1990년대 초반 A매치들을 둘러봐도 평가전이라고는 하지만 체코, 스웨덴, 브라질, 네덜란드한테 모조리 패하고 유로92 예선에서 덴마크와도 사실 1승 1패씩을 주고 받은 셈이네요. 1990년 월드컵 직전 평가전에서도 잉글랜드, 스페인, 네덜란드에 모조리 패하고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에선 서독에 1-4로 깨졌네요. 

 

솔직히 이 글을 번역하기 전까진 와 저선수들 모였으면 참 대단했겠다 싶었는데 막상 데이터를 보니 그런 생각이 조금은 사라지는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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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9-07-23 15:39:37

냉정하게 유고연방 자체가 세르비아의 야심 주도하에 만들어졌는데, 문화적으로 이질적이었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세르비아의 중심의 유고연방과 세르비아 특유의 선민의식이 맘에 안들었고 결국 갈라선거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랜 세월을 보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반항심만 강해진 세르비아가 서로 연합한 그 순간부터 오래 갈 수 없던 나라의 운명이었다고 봅니다. 그걸 티토 개인의 역량으로 어찌어찌 끌고갔을 뿐이죠.

OP
2019-07-23 16:03:48

세계사에 어두워 유고 연방이 있기까지 과정을 잘 몰라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왔네요. 덕분에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세르비아는 다른 대부분 유고 연방 국가들과는 달리 독립적인 세르비아 왕국으로 운영되고 있었군요

2019-07-23 16:47:56

세르비아 자체도 여러 외부인이 많은데 그와중에 세르비아 제일주의를 외친거 보면 딱하죠... 단적으로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땅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세르비아 땅이 되었고, 코소보 분리 독립 후에는 이곳이 세르비아로부터 떨어져 나갈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2019-08-03 15:50:31

좋은 역사 정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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