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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만도 피키-가에타노 시레아, 전설적 리베로들의 환희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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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8-01 23:08:20

 

[TFT] 아르만도 피키-가에타노 시레아, 전설적 리베로들의 환희와 비극

THE TRIUMPH AND TRAGEDY OF ARMANDO PICCHI AND GAETANO SCIREA, THE LEGENDARY LIBEROS WHO DIED BY 36

  

 

[The Football Times = Stuart Horsfield]

 

 

 

 

내게 있어 칼치오라는 단어는 아주리의 상징적인 푸른 셔츠의 상을 떠오르게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물쇠라는 뜻의 ‘카테나치오‘쪽이 더 선명하다. 1930년대 스위스 대표팀을 맡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칼 라판이 처음 고안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전술은 이탈리아에서 더 확실히 다듬어졌다.

 

이탈리아 어휘의 이지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더 탐구해 들어가 본다면, 그것은 카테나치오에서 리베로로의 인지적 도약이라기보다는 그 자물쇠를 열고 닫는 포지션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치오의 역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감독들은 모두 이 리베로라는 포지션을 갈고닦은 인물들이었다. 사실 리베로는 감독의 비전을 그라운드에 구현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는 수비적으로 아주 탁월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 반도에서는 영원히 기억될 이름들이 남았다. 바레시, 칸나바로, 네스타, 말디니, 젠틸레, 보누치, 코스타쿠르타, 파체티, 부르니츠 같은 이름들 말이다. 그러나 두 명의 이름을 더 언급해야겠다. 이들은 저 걸출한 명단들보다도 위에 존재하는 이름들이며 리베로의 상징적인 인물들이자 영광이라는 단어와 동의어 같은 존재들이다. 바로 칼치오의 철통같은 수비의 명맥을 잇는 인물들인 아르만도 피키와 가에타노 시레아다.

 

 

 

 

Armando Picchi

 

 

아르만도 피키는 18세 때부터 이미 일생을 백 번도 더 산 것 같은 앙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흑백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는 이 오리지널 이탈리안 리베로의 외모를 확인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가 그 나이 또래 선수들보다도 훨씬 경험적, 지능적으로 높은 상태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후에 그의 포지션에서 뛰는 후배 선수들의 모든 표준을 만든 피키는 1935년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는데, 마침 그의 고향 클럽의 스타디움이 완공된 해와 같았다. 1990년, 리보르노는 스타디움에 피키의 이름을 헌액하기도 하는데, 그전까지 그는 자신의 모든 후대 수비수들에 수비수로서의 기준을 남겼다.

 

피키에게는 14살 터울의 형, 레오 피키가 있었다. 흔히들 그렇듯, 레오는 아르만도를 이 아름다운 게임에 발을 들이게 한 인물이었다. 1945년, 레오는 고향 클럽인 리보르노에 데뷔해 클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동생을 추천해 길을 닦아 놓았다. 레오가 리보르노를 떠나 토리노로 향했을 때, 동생 아르만도 피키는 리보르노의 프리마베라에 데뷔했다.

 

1954년, 피키는 리보르노 1군에 데뷔했으며 라이트 백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59년 SPAL로 이적하기까지 그는 99경기를 뛰었고 여러 포지션에 걸쳐 발전을 이뤘다. 그 해 27경기를 출장했는데, 해당 시즌 SPAL은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인 세리에 A 5위에 올랐다.

 

전도 유망한 피키는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인테르의 측면을 담당할 수 있는 풀백을 찾고 있던 엘레니오 에레라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그 당시엔 뚜렷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미 ‘그란데 인테르‘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피키의 인테르 입단과 동시에, 에레라가 세운 마스터플랜의 또 다른 한 축, 지아친토 파체티도 스쿼드에 합류했다. 둘은 인테르의 양 사이드 백을 담당했는데, 왼쪽의 파체티는 10년을 앞서간 풀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축구계에서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인 트로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에레라와 피키의 첫 두 시즌은 썩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에레라가 인테르에 부임했을 때 그들은 6시즌 연속 스쿠데토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부임 첫 시즌은 3위, 이듬해는 2위로 시즌을 마쳤다. 인테르의 독불장군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가 고작 이 성적에 만족할리 만무했다. 에레라를 향한 좋지 않은 루머들이 배고픈 독수리처럼 그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주세페 메아차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두 시즌 정도밖에 주어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는 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기 마련. 모라티는 에레라에 조금 더 시간을 주기로 결정했고 그에게 인테르가 너무 공격적인 운영을 펼치며 너무 쉽게 실점한다고 털어놨다.

 

에레라는 팀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로 했고, 전통적인 포백을 배치했지만 공격 본능이 꿈틀대는 파체티에게 왼쪽 전 공간을 맡기는 변형 전술을 썼다. 그리고 포백 라인 뒤에 한 명의 스위퍼를 배치했다. 인테르는 네 명의 수비수에 대인 마크를 지시하는 한편, 홀로 남아 있는 선수에게 다른 수비수들이 놓친 선수나 흐른 볼을 맡도록 지시했다. 그 포지션에 위치한 선수는 지능과 평정심, 게임을 읽는 눈과 시야 등이 필요했다. 피키는 이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 정신적 능력들을 함양했고, 피치 위에서 에레라의 목소리와 비전을 담아내는 리베로로 거듭났다.

 

 

 

 

Gaetano Scirea

 

 

가에타노 시레아는 1953년, 밀라노 교외 체르누스코 술 나빌리오에서 태어났다. 시레아가 그의 재주를 연마한 곳은 네라주리나 로소네리 같은 북쪽의 강팀들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신를 알아본 팀으로 향했고, 그의 커리어는 1970년 베르가모의 아탈란타에서 시작됐다. 1969년 피키가 은퇴했으니 그의 뒤를 이어 시레아가 나타난 셈이다.

 

피키와 마찬가지로 시레아도 리베로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커리어 초반 오로비치 감독과 함께하며 미드필더로 뛰었다. 이 경험들은 후에 그가 현대 리베로의 프로토타입으로 거듭나고 리베로 포지션에서 전례 없는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주춧돌이었다.

 

시레아가 19세에 불과했던 시기, 그는 아탈란타 코칭스태프들에 세리에 A에서 뛸 준비가 됐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레아를 동료들과 차별화시킨 것은 전통적인 '흑마술'에 기대지 않는 것이었다. 기존 카테나치오에서 리베로는 동료에게 의지하는 감이 컸지만, 시레아는 그렇지 않았던 것.

 

롬바르디아 주에서 뛴 지 어느덧 2년, 시레아의 재능은 북쪽의 거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74년, 그는 21세의 나이로 토리노의 올드 레이디에게로 떠난다. 당시 유벤투스는 세츠미르 바이팔렉 감독이 짧은 임기를 맡았음에도 연속 스쿠데토를 달성하며 꽤 성공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시레아의 첫 감독은 전 유베 선수인 카를로 파롤라였다.

 

시레아가 토리노에서 맞이한 첫 장애물은 유베에서 12년 넘도록 활약한 수비수 산드로 살바도레의 다소 회의적인 평가였다. 이적 초기 비안코네리 팬들은 아탈란타에서 온 이 야위고 어린 수비수를 탐탁치 않아했지만, 그는 역시 축구는 피지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시레아가 이 의문들을 벗겨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 대에서 나올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축구 지능과 원숙함으로 시레아는 곧 그가 살바도레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팬들의 걱정을 누그러뜨려버렸다.

 

 

피키가 인테르에서 보낸 첫 2년을 헤맸던 것에 비하면, 시레아는 훨씬 훌륭한 2년을 보냈다. 첫 시즌부터 시레아는 커리어 사상 첫 스쿠데토를 들어 올렸고 두 번째 시즌엔 토리노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피키가 인테르 첫 시즌부터 제때 멘토를 만났다고 한다면, 시레아는 1976-77시즌에서야 은사를 만났다. 바로 지오바니 트라파토니다.

 

트라파토니가 유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야말로 시레아와 트랍은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었다. 트랍은 시레아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봤으며 그로 하여금 리베로라는 포지션을 최후방에서 수비에만 전념했던 스위퍼의 역할로부터 팀 전체 공격의 발판이 될 수 있게 해방시키도록 만들었다.

 

 

 

 

 

피키 영광의 나날들

 

1962-63시즌은 에레라의 전술적 혜안과 빠른 변화가 결실을 맺었다. 비록 에레라가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인가는 논쟁거리라지만 분명한 것은 에레라 사단에서 피키가 리베로라는 포지션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레아와 마찬가지로 피키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는 5피트 7인치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기 흐름을 읽는 눈이 뛰어났기에 피 튀기는 볼 쟁탈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신체는 단지 그의 축구적 두뇌에 힘입어 적절한 포지션으로 이동, 상대의 위협을 해치우는 전달자에 불과했다.

 

에레라의 인테르는 1963년에 첫 스쿠데토를 따냈는데, 34경기에서 단 20점만을 내줬다. 에레라가 새롭게 고안한 인테르 수비진은 클럽뿐 아니라 이탈리아 수비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피키는 경기장 위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팀을 지휘하는 등, 그야말로 그라운드 위의 감독이었다. 그는 타고난 수비 본능을 지녔는데, 에레라가 지시한 대로 피키는 하프라인 너머 상대 지역에 머무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축구 저널리스트인 지아니 브레라는 경기장을 아우르는 피키의 지휘 능력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던 적이 있다.

 

“피키는 수비진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패스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고 훌륭한 시야를 가졌다”

존 풋의 ‘칼치오’란 책에는 피키의 이 훌륭한 게임 지배 능력 덕에, 인테르에는 감독의 지시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라는 일화가 담기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쯤, 어느 한 경기에서 에레라는 피치 밖에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실망한 에레라는 사이드라인으로 한 선수를 불러 피키에게 패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에레라는 그 선수에게 “피키가 뭐라고 하던?”이라고 물었고, 그는 거의 사과하는 어조로 “염병할이라고 말하면서 감독님한테도 그렇게 말해보라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인테르는 연전연승했다.

 

에레라가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우수한 병사와도 같았던 피키에게 늘 의지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피키가 그런 일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피키는 거의 수비 임무에 치중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경기를 펼쳐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볼을 걷어내려는 유형의 선수는 아니었으니, 볼을 살려내 빠르게 내보내는 플레이를 즐겼다. 비록 상대 진영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지만 피키는 공격을 개시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1963-64시즌, 피키와 네라주리는 스쿠데토 타이틀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볼로냐와 승점이 동률이었고, 플레이오프를 펼쳤지만 패했던 것. 하지만 그들은 이탈리아반도에서의 실패를 유러피언 컵으로 보상받았다.

 

피키가 이끄는 인테르는 결승에서 거함 레알 마드리드를 침몰시키며 첫 대륙컵 성공을 이뤘다. 이 유러피언 컵 우승이라는 단편적으로 큰 영광이기는 하지만, 에레라와 피키에게 있어 카테나치오 시스템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실제로 인테르는 잉글랜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독일, 스페인 챔피언들을 상대로 벌인 9경기 동안 단 5점 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해가 바뀌고 유럽의 왕위에 오른 에레라와 피키는 스쿠데토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인터 밀란에는 더 큰 압박과 여러 불안한 기류들이 흘렀으나 에레라 사단은 이제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와 인터컨티넨탈 컵을 두고 싸우러 나섰다. 1차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0-1로 패하긴 했으나, 밀란에서 벌인 2차전에서 2-0으로 승리, 이제 인테르는 세계 최정상에 섰다.

 

1964-65시즌은 그란데 인테르라 불리던 시절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아르만도 피키는 시즌 내내 단 두 경기만을 내주고 인테르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종종 그렇듯, 다수의 트로피에 도전하는 여정에는 심한 에너지 소모가 뒤따르고 대부분의 팀들은 중간에 퍼져버린다.

 

 

하지만 인테르는 아니었다. 피키와 에레라는 강력한 네라주리가 오래도록 이어지게끔 했고, 이제 두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인테르는 유러피언 컵 내내 단 5골만을 내줬다. 특히 결승전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축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는데, 네라주리는 벤피카를 상대로 리드를 잡고서 남은 42분을 완벽하게 버텨냈다. 피키는 정확히 그가 원했던 경기를 펼쳤는데, 거의 인테르 진영을 떠나지 않으면서 에우제비오를 위시한 포르투갈 삼각편대를 봉쇄해버렸다.

 

이 작은 리베로는 또 한 번 인테르를 정상에 세웠지만, 그가 이 밀란의 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1965-66시즌 인테르는 인디펜디엔테와 한 번 더 인터컨티넨탈 컵 정상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이번엔 두 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합계 3-0으로 또다시 세계 정상에 섰다.

 

그란데 인테르 시대의 마지막 트로피는 1965-66시즌 스쿠데토였다. 2위와 4점 차로 우승한 인테르였는데, 역시나 그들은 무너뜨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시즌 내내 70골을 폭발시키면서 단 28점만을 허용했다. 센세이셔널했던 네 시즌 동안 그들은 7개의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아르만도 피키는 네라주리를 전례 없던 성공으로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아르만도 피키는 아주리 유니폼을 입을 기회를 거의 받지 못했다. 심지어 1966년 월드컵에는 선발조차 되지 않았는데,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의 눈에 피키는 너무 수비적으로 보였나 보다. 1966년 7월 19일, 이탈리아가 에이섬 파크에서 북한에 0-1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파브리는 인테르의 불굴의 리베로를 반드시 뽑았어야 했다.

 

페루지오 발카레지는 아주리의 세계적인 명성을 회복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고, 1968년 유로 대회 예선에 피키를 선발한다. 하지만 불가리아전에 당한 심각한 골반 부상으로 피키의 아주리 커리어는 끝나버렸다. 국내 무대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피키였지만, 그가 단 12번의 국제무대에 나선 것엔 참담함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팀들, 이를테면 유벤투스나 셀틱에게 1966-67시즌은 꽤 기쁜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만 인테르는 아니었다. 모라티, 에레라, 피키의 기준에서 세리에 A 2위와 유러피언 컵 준우승은 그란데 인테르의 종식과도 같았다.

 

 

이제 인테르 캡틴이 보여줬던 강력한 리더쉽과 그 정서적인 기억들은 주세페 메아차에 더 머물 공간이 없었고, 1967년 여름, 피키는 바레세로 팔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키는 인테르의 위대한 주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가 인테르 시절 기록한 골은 단 한 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정도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피키에 의해 리베로라는 포지션의 정의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피키의 선수 생활은 이제 황혼기에 다다랐고, 그가 선수 시절 보여준 분석적인 면과 축구에 대해 배우려는 자세 탓인지, 가까운 미래에 감독으로 피키를 만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바레세에서 뛴 두 시즌, 피키는 선수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피치 위에서 감독의 목소리를 내는 선수였던 그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피치 밖에서도 그 자리에 오를 작정이었다. 1969시즌을 마치고 피키는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감독으로서 그의 자질을 알아본 곳은 고향 클럽이었고, 첫 번째 감독 커리어는 리보르노에서 시작되었다.

 

혹자는 그의 선수 경력이 빠르게, 그리고 일약 성공을 거둔 채 지나갔다고 말하지만, 그의 감독 경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시즌만에 세리에 A 최고의 팀이 그를 불렀던 것. 리보르노에서 단 한 시즌을 감독한 뒤, 유벤투스는 피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고 1970-71시즌 ‘위대한 캡틴’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감독직이라 할 수 있는 비안코네리의 함장이 됐다.

 

 

 

 

 


시레아 영광의 나날들

 

 

가에타노 시레아는 트라파토니의 지휘 아래 첫 시즌부터 스쿠데토를 따냈다. 피키의 커리어와 대칭을 이루듯, 시레아 역시 1976-77시즌 단 20점만을 실점하는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했다. 하지만 피키와는 약간 달리, 시레아는 전방으로 나설 수 있었다. 인테르에서 피키는 그의 수비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상대 진영으로 향하는 경우가 적었지만 트라파토니는 시레아로 하여금 리베로의 새 바람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중원과 수비 지역 어디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완고했던 피키와는 달리, 시레아는 감독의 주문에 잘 부응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의 동료, 팬들, 감독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시레아를 조용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경기에 임하는 침착함의 화신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언론인 다윈 파스토린은 그를 두고 ‘신사 스위퍼’라고 일컫기도 했다.

 

 

당시 칼치오의 기조는 시레아의 스타일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피치 속에서, 아주 고요한 선수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팀 동료들은 시레아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와 시레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상대가 시레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와중, 그는 적재적소에 그의 강점을 발휘해 인터셉트를 해내곤 했다.

 

피키가 리베로를 새로이 정의하면서 수많은 트로피들을 인테르에 가져다줬다면, 시레아는 여러 측면에서 리베로 포지션의 전임자인 피키를 능가했다고 할 수 있었다.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에서 거의 10년을 감독으로 있었고 매 시즌 시레아는 트랍의 수족이었다.

 

피키가 가진 극악의 신체조건이 그의 스타일을 완벽히 대표한다고 한다면, 시레아는 아주 우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느릿느릿하고 햇볕에 탄 팔다리와 꼿꼿한 뼈대,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은 항상 평정을 유지한 그를 상징했다. 평정심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사나이, 시레아. 그가 피치에 나설 때면 선수들, 심지어 감독조차 감사 기도를 올리곤 했다. 유벤투스의 리베로가 그들을 모두 지켜볼 것이니까.

 

시레아가 토리노에서 10년 넘도록 뛴 동안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는 트랍의 ‘조나 미스타’라고 불리는 카테나치오의 각색판을 내놓은 덕에 더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비안코네리가 성공 가도는 당시 그들이 이탈리아 축구의 스테레오 타입인 ‘투박하지만 거친 수비’외에도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했던 것에 기인한다. 시레아는 이 둘 모두를 완벽히 해낼 수 있는 몇 없는 선수 중 하나였다. 트라파토니라는 명장의 믿음과 시레아의 재능이 바로 그 증거인데, 당시 유벤투스는 이 볼 플레잉 리베로를 중심으로 의심의 여지없는 세계 최고의 수비진을 구축했다.

 

 

디노 조프, 클라우디오 젠틸레, 안토니오 카브리니, 시레아로 이뤄진 유벤투스 수비진은 7년 동안 올드 레이디의 심장으로 작동했다. 특히 젠틸레는 시레아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니, 비단과 철의 조화, 그야말로 완벽한 Vice-versa의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골라인에는 경험이 풍부한 조프의 존재로, 유벤투스는 10년 동안 골라인에서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팀으로 군림했다.

 

시레아는 비안코네리와 함께 우승컵을 마음껏 들어 올렸다. 7개의 스쿠데토와 2개의 코파 이탈리아를 비롯, UEFA 컵, 컵 위너스 컵, UEFA 수퍼컵, 인터컨티넨탈 컵과 유러피언 컵까지. 그는 역사상 UEFA와 FIFA에서 주관하는 클럽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특히 유러피언 컵 우승은 1985년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그 운명을 맞이했는데, 리버풀에 1-0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장식됐다. 역사는 그날을 비극적인 날로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양 팀의 주장, 시레아와 필 닐이 서포터들에게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이 참사의 순간에 진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트로피는 나무 상자에 담겨 유벤투스 드레싱 룸으로 향했다. 비록 시레아는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을 남기진 못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시 유벤투스 팀을 상징하는 시레아에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혼란으로 가득한 밤, 시레아의 침착함과 목소리는 이탈리아 팬들에게까지 닿았을지도.

 

 

 

 

 

피키와 시레아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있다면, 푸른색의 아주리 유니폼을 입었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 피키의 국가 대표팀 커리어는 입장 차이와 부상으로 점철된 반면, 시레아는 1982년 7월 11일, 마드리드에서 서독을 3-1로 꺾고 월드컵 우승을 들어 올렸다.

 

그 대회는 이미 이탈리아 팬들에게는 익숙하겠지만,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한 달에 걸쳐 아주리 축구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창이었다. 시레아는 선수 경력 최전성기에 있었고 클럽 동료들인 조프, 카브리니, 젠틸레와 함께 토너먼트 내내 전형적인 이탈리아 축구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마르코 타르델리의 골 셀러브레이션이 월드컵의 이미지를 정의한다고 한다면, 그 골에서 시레아가 기여한 부분은 궁극적인 리베로가 무엇인지를 각인시켰다.

 

시레아는 자기 진영 모퉁이에서 볼을 탈취한 뒤, 고개를 들고 선택지를 확인한 뒤 전방으로 내달렸다. 캐스터 존 모스턴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지금 시레아를 보십시오”라고 운을 뗐다. 

간단한 패스로 볼을 내준 뒤, 그는 계속해서 스트라이커 파올로 로시를 넘어 서독 페널티 지역까지 도달했다.

“로시가 볼을 잡습니다. 그리고 시레아에게” 그는 능숙하게 로시에게 백힐 패스를 줬다. “베르고미, 다시 시레아가 볼을 잡습니다. 오프사이드를 어필하는데요, 불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마르코 타르델리에게... 골! 이탈리아가 2-0으로 리드를 잡습니다”

 

이탈리아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절망적인 수비를 펼쳤고 시레아는 이후 대표팀 커리어를 마감했다. 2년 뒤 1987-88시즌 단 6경기만 출전한 시레아는 클럽 커리어도 마쳤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리베로로 뛰었고 클럽과 국가 대표팀 모두 최상위 레벨에서 경쟁한 ‘신사 리베로’는 단 한 번도 레드카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시레아를 몸보다는 머리로 수비하는 수비수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4년을 올드 레이디를 위해서 헌신한 뒤, 가에타노 시레아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디노 조프의 수석 코치로 벤치에 앉는다. 피키처럼 시레아도 분석가적인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뛰었는데, 유벤투스는 이를 특별하게 여겼다. 그의 지적 능력은 세리에 A에서 감독들에게 요하는 전술적 역량에 알맞았다.

 

 

 

 

 

죽음

 


 

 1971년 2월 16일, 피키가 유벤투스를 맡은 지 겨우 7개월 남짓했던 시점, 유벤투스는 갑작스럽게 '아르만도 피키가 무기한으로 클럽에서 떠나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암 투병 소식이 그 이유였다.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은 암 말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35세 생일을 불과 세 달 지나, 피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리는 즈데넥 제만의 삼촌이기도 한 세츠미르 바이팔렉이 대신했고, 그는 가에타노 시레아를 유벤투스로 불러들인 인물이다.

 

피키의 선수 경력이 칼치오에 전술적 발전을 이끌고 인테르 서포터들에게는 비길 데 없는 성공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면, 피키의 감독 경력은 실현되지 못한 잠재력이라고 부를만하다. 

 

 

최고의 나날들은 인테르에서 보냈지만, 피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클럽, 리보르노는 인테르의 위대한 주장을 기리는 기념비를 남겼다. 1990년 리보르노 스타디움은 피키의 이름으로 명명됐다. ‘스타디오 아르만도 피키’. 리보르노 시민들 그리고 클럽의 팬들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모방하는데 그쳤던, 전설적인 선수가 한때 리보르노라는 클럽의 역사 속에 있었다는 것을 영구히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키가 이후 남긴 기억들보다도, 올드팬들에 의해 구전되고 있는 이야기들이 그가 더 특별한 선수로 남을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는 수비를 예술의 경지로 만들었고 축구계 혁명의 근원지에 있던 인물이었다.

 

 

 

 

 

 

희고 검은 비안코네리 유니폼을 입은 사나이, 시레아는 단순하지만 냉정한 사나이였으며 리베로의 역할을 그대로 함양한 수비수이자 주장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 위대한 두 선수의 커리어가 마치 공생관계처럼 이어지듯, 가에타노 시레아 역시 제 명을 다 살지 못했다. 1989년 9월 3일, 축구화를 벗은지 겨우 1년이 지난 시점에 시레아는 폴란드를 방문했다 돌아오는 중,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는 36세에 지나지 않았고 이탈리아 축구는 아직 칼치오에 가져다줄 것이 많은 거인 한 명을 잃었다.

 

전 세계 팬들은 시레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비탄과 금치 못했다. 그들은 때 이른 시레아의 요절에 애도를 표했고 위대한 유벤투스 수비수의 죽음을 기리는 데는 어떠한 편견도 존재하지 않았다. 2005년, 아주리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끈 감독, 엔조 베아르조트는 아주리에서 시레아의 6번 셔츠를 영구결번할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후에 유벤투스는 그를 기리기도 했는데, 새로 지어진 유벤투스 스타디움의 홈 팬 좌석, 쿠르바 수드를 ‘쿠르바 시레아’로 명명했던 것이다.

 

 

아르만도 피키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들은 가에타노 시레아의 유산을 기리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이에는 시레아 특유의 외유내강과 신사적인 경기 스타일뿐 아니라 현대적 리베로를 규정한 업적이 담겨있다. 그는 필요할 때면 피키 스타일의 수비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공격 재능을 가졌고, 수비진 밖으로 나가 공격을 전개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난 리베로의 지평을 열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축구 역사는 예술적인 차원으로 거듭난 수비에 기초하고 있다. 아주리는 수많은 월드 클래스 수비수들을 배출해냈고 수비적인 축구 철학이 경기를 승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피키와 시레아, 이 위대한 두 선수는 유벤투스에서 서로 맞닿을 수 있는 거리 속에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둘 모두 피치 위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뒀고 수비를 예술의 경지로 올렸다. 하지만 둘에게 바쳐진 모든 영광과 헌사들에도 불구하고, 둘을 묶는 것은 슬프게도 선수 경력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때 이른 죽음이었다. 칼치오의 장대한 역사를 관통하는 두 가닥의 명주실은 결코 느슨하게 잘리거나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원문 링크

 | https://thesefootball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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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8-01 23:15:35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OP
1
2019-08-01 23:16:44

감사합니다. 저도 ITALIA10님의 글들로 많이 배우곤 합니다

1
2019-08-03 15:54:06

이탈리아는 예전부터 전투적인, 공격적인 걸출한 수비수가 참 많이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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