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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도리아의 찬란했던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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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9 22:47:15

[TFT ]삼프도리아의 찬란했던 1990년대

SAMPDORIA AND THE GLORY YEARS OF THE 1990S







[These Football Times = Conor Kelly]


 


이전 시즌이 기억에서 희미해져 갈수록, 새로운 시즌을 고대하게 되고 지난 열두 달의 기억들은 더 강렬해질 것이다. 최근 여러 팀들이 한 해 최고 승점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데, 파리 생제르맹과 레알 마드리드가 이 같은 기록을 달성했다. 2014년엔 또 하나의 황금기를 맞이한 스페인 클럽이 있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두 거함들을 상대로 기억에 남을만한 역사를 썼고, 마드리드 라이벌과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나 정말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쳤다. 유럽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장애물을 넘지 못했지만, 로히블랑코스의 라 리가 우승은 2년 반 동안의 부단한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다. 디에고 시메오네는 이적 시장의 중심에 있는 선수라고는 할 수 없는 스쿼드를 이끌며 에너지를 불어 넣고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아틀레티 고유의 수비적이고 질서 있는 플레이를 고수한 채로.





아틀레티의 성공은 상황이 허락하고, 비록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좋은 선수들을 잘 조화시킨다면 고착화된 클럽판 ‘계급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현대 들어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클럽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이들을 무너뜨리기란 훨씬 어려워졌다. 이러한 올리가르히 구단주들의 등장과 천문학적 규모의 상업적 자금들은 축구 클럽들이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야심을 막곤 한다. 


유리 천장을 깨려는 클럽들에게 주어지는 ‘성공의 유통기한’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도르트문트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향하기까지 여정은 전 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구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반도의 중위권 클럽이 한때 이탈리아를 넘어 전 유럽에 열광의 물결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왼쪽 위부터 도세나, 롬바르도, 라나, 카타넥, 팔류카, 펠레그리니, 만치니, 비에르초우드, 보네티, 비알리, 세레조>


1980년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 축구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세리에 A 출범 이래 그 정도로 위상이 높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탈리아에 전 세계 최고의 선수들, 감독들이 가득했다. 1989년엔 지오바니 트라파토니가 이끄는 인테르가 2위를 11점 차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는 나폴리가 사상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어 올렸다. 그 사이 아리고 사키의 밀란은 유러피언 컵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 팀에는 뤼트 훌리트, 마르코 판 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로 이어지는 ‘오렌지 삼총사‘가 있었고, 인테르엔 로타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독일 삼총사’가 있었다. 유벤투스엔 로베르토 바지오가, 나폴리엔 아직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1990-91시즌 스쿠데토는 누구 손에 쥐어졌을까?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삼프도리아였다.


전통적으로 삼프도리아는 클럽 역사의 대부분을 세리에 A와 세리에 B를 오가는 신세로 보냈던 클럽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이 뒤바뀐 것은 1986년 부야딘 보스코프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부터였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보스코프는 페예노르트, 레알 사라고사,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역임했고 로스 블랑코스에선 리버풀에게 패하긴 했지만 유러피언 컵 결승 무대를 밟기도 했던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을 맡았던 이력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성향을 띠는 이탈리아 축구에서 빅 클럽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삼프도리아가 그에게 접근하기 전, 그는 아스콜리를 지도했다.


보스코프가 오기 전, 삼프도리아 클럽의 장식장에는 단 하나의 메이저 트로피, 1985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뿐이었다. 보스코프는 삼프도리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8년 동안 위대한 여정을 펼쳤다. 물론 바르셀로나에 패하기는 했지만, 삼프도리아는 1992년 여름엔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에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삼프도리아는 영연방의 거물들인 트레버 프란시스, 리암 브래디, 그레엄 수네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보스코프는 클럽이 길러낸 유스 선수들로 팀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들은 바로 지안루카 비알리, 모레노 마니니, 피에트로 비에르초우드, 로베르토 만치니였으니, 삼프도리아의 다가올 10년을 떠받칠 재목들이었다. 1986-87시즌을 6위로 마치고, 22세의 비알리는 12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브라질 대표팀의 토니뇨 세레소를 데려오며 팀의 핵심이 되는 미드필더를 세우게 됐다.


1988년 삼프도리아는 지난 시즌보다 더 발전했고, 세리에 A 4위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당해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우승하며 큰 성공을 거뒀는데, 클럽의 41년 역사에서 두 번째 메이저 트로피였다. 2007년까지 코파 이탈리아는 결승에 오른 두 팀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2경기를 치렀는데, 당시 삼프도리아는 토리노를 상대로 홈에서 벌인 1차전을 비알리와 한스-페터 브리겔의 활약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했다.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린 2차전에는 토리노가 저력을 발휘하며 동률을 이뤘고, 연장전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연장전의 주인공은 파우스토 살사노. 그는 112분에 결승골을 터뜨리며 블루체르시아티에 우승컵을 선물했다.



코파 이탈리아 우승으로 다음 시즌 삼프도리아는 유럽 무대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988-89 시즌에도 그들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룬 한편, 그들은 후에 유럽 대회에서 ‘높이 올라갔지만 우승컵은 들지 못하는 불운‘의 전조를 경험한다. 처음 진출한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결승에 올랐던 것. 


그 여정 속에 IFK 노르셰핑, 칼 자이스 예나, 디나모 부쿠레슈티, KV 메헬렌을 꺾었고, 결승 상대는 바로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바르셀로나였다. 크루이프 체제 바르샤는 당시 대변혁의 초기 과정에 있었으며 최전방에는 잉글랜드의 게리 리네커가 섰다. 결과적으로 스위스 베른의 방크도르프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에선 바르셀로나가 훌리오 살리나스와 루이스 로페스 헤카르테의 골에 힘입어 우승컵을 차지했다. 삼프도리아가 전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앞서 언급한 나폴리를 상대로 거둔 코파 이탈리아 2연패로 삼프도리아는 다시금 컵 위너스 컵에 나갈 수 있었다. 보스코프는 1989-90 시즌을 앞둔 여름, 대대적인 스쿼드 보강을 단행했다. 첫 영입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유고 연방의 베테랑 수비수 스렉코 카타넥을 데려온 것이었는데, 이후 영입에 비하면 이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이후 6년간 대활약을 펼친 아틸리오 롬바르도가 비알리의 전 클럽, 세리에 B의 크레모네세에서 제노아 땅으로 향했다. 1982년 월드컵 우승 팀의 일원인 베페 도세나도 왔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가 너무 늙었다고 비판했으나 결과적으로 삼프도리아의 도박은 대성공을 거뒀다.


팀의 투자는 1989년 안더레흐트를 상대로 역사에 남을만한 컵 위너스 컵 우승으로 보상받았다. 경기는 0-0으로 마무리됐고 연장으로 흘렀으나, 비알리가 두 골을 터뜨리며 클럽에 사상 첫 유럽 대륙컵 타이틀을 선사했다.







컵 대회 성공과는 대조적으로, 보스코프 체제하 삼프도리아는 세리에 A에서 4위와 6위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모든 것이 뒤바뀐 것은 1990-91 시즌. 당시 세리에 A는 세계 최고 선수들의 집합소였다. 삼프도리아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리라 예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밀란은 백투백 유러피언 컵 챔피언이었으며, 인테르는 세 명의 1990년 독일 월드컵 우승 핵심 멤버를 보유했다. 돈뭉치를 푼 유벤투스는 다시금 그 유벤투스로 돌아왔고 전 시즌 우승 팀인 나폴리에는 여전히 마라도나가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삼프도리아가 유럽 무대에서 보여준 저력은 그들이 세리에 A에서 충분히 우승 경쟁을 펼칠 수 있다는 힌트였다.



시즌 초반 삼프도리아는 주득점원인 비알리가 없는 상태였고, 우승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비로소 제 궤도에 오른 것은 밀란 원정, 산시로에서 펠레의 골로 1-0 승리를 거둔 시점이었다. 몇 주 뒤, 그들은 나폴리 산 파올로 원정을 떠나서도 믿을 수 없는 승리를 쟁취했다. 90분 내내 압도적인 플레이를 펼친 비알리와 만치니는 둘 모두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터뜨리며 4-1 승리를 장식했다. 


하지만 시즌 중반, 토리노와 레체에 연속으로 패하며 5위로 떨어지는 등,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겐 만치니가 있었으니, 파르마전에는 종료 직전 결승골을 터뜨렸고 두 경기 뒤 밀란과의 일전에서도 쐐기골을 넣으며 2-0 승리, 아주 중요한 승점 2점을 가져왔다. (이탈리아에선 1994년 이전까지는 승리 시 승점 3점이 아닌 2점이었다.)


아주 섬세하고 세련된 선수인 만치니는 그야말로 삼프도리아라는 클럽을 규정하는 선수였다. 비알리와 콤비를 이룬 그는 세리에 A 무대를 호령했다. 당해 비알리는 19골로 카포칸노니에레에 올랐으며 이 모든 것은 만치니의 발끝에서 창조됐다. 둘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으며, 후방의 비에르초우드와 골키퍼 지안루카 팔류카 역시 우승에 한몫했다. 




리그 네 경기를 앞둔 시점에 사실상 타이틀 레이스는 끝이 났다. 삼프도리아는 리그 2위였던 인테르를 멋지게 격파했다. 인테르는 24개의 슛을 때렸고 삼프도리아는 단 6개에 불과했지만, 그 수치는 경기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팔류카는 홀로 14개의 슛을 막아냈고, 그 가운데는 로타르 마테우스의 페널티 킥도 있었다. 삼프도리아는 홈인 스타디오 마라시에서 레체를 3-0으로 잡고 스쿠데토를 확정 지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어느 삼프도리아 팬조차 스쿠데토를 꿈꾸진 못했을 것이다. 보스코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꽤 멋진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삼프도리아와 함께 이룬 스쿠데토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가장 달콤했기도 하고. 왜냐면 가장 어렵고, 균형 잡힌 리그였으니까. 클럽에게는 창단 후 반세기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같다고나 할까. 근데 사실 난 우승 때가 더 기쁘던걸?”

 

 





1991-92시즌에 접어들었고, 이 시즌은 보스코프가 삼프도리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또한 그가 클럽 감독으로 유럽컵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삼프도리아발 태풍은 유러피언 컵을 강타했고 로젠보리와 혼베드를 물리쳤다.

 

 

유러피언 컵 대회가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되기 전 마지막 대회, 삼프도리아는 토너먼트에서 안더레흐트,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파나티나이코스를 뚫고 결승전까지 치고 나갔다. 삼프도리아 클럽 사상 첫 유러피언 컵 결승전이 열리는 웸블리에는 친숙한 상대, 바르셀로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살리나스, 미카엘 라우드럽과 펩 과르디올라가 포진된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보스코프의 언더독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경기는 연장으로 흘렀다. 크리이프는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수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라고 말했지만 실제 경기는 긴장감이 넘쳐흘렀으며 내용 역시 그에 걸맞게 팽팽하게 흘러갔다. 




승부가 갈린 것은 연장 112분. 로날드 쿠에만의 벼락같은 프리 킥이 삼프도리아에 비수를 꽂았다. 바르셀로나는 사상 첫 유러피언 컵을 들어 올렸으며 미래에 다가올 성공 가도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이 또한 삼프도리아가 하향곡선을 타는 기점이 됐다.

 

 





이후 비알리는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1250만 파운드에 유벤투스로 떠났고 감독 보스코프는 라이벌 팀 로마로 향했다. 만치니는 팀에 남았고 뤼트 훌리트, 데이비드 플랏 같은 굵직한 선수들이 제노아 땅으로 왔지만 전과 같은 블루체르시아티의 강력함은 볼 수 없었다. 



90년대 후반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아리엘 오르테가, 클라렌세 셰도르프, 크리스티앙 카랑뵈 같은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이적하기 전 삼프도리아에서 뛰기도 했다. 그러나 삼프도리아는 파올로 만토바니 회장이 사망하고 리그에서 잇단 실패를 겪은 뒤, 끝내 1999년에 강등돼 2002년까지 세리에 A에 올라오지 못했다. 최근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과 강등을 모두 경험하는 등 성적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보스코프는 2014년 4월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틀레티코는 스페인의 두 거함을 따돌리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비록 보스코프와 저 스페인 클럽 사이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아틀레티의 파란은 삼프도리아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스타일 면에서 차이는 있을지라도, 제노아의 작은 클럽이 칼치오의 거인들을 상대로 일으킨 역모가 수십 년이 지나 스페인 땅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5/01/11/remembering-sampdorias-glory-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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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8-10 09:42:56

잘읽었습니다!! ㅎㅎ

OP
2019-08-10 12:37:31

감사합니다!

2019-08-10 14:19:00

 깔끔하게 정리해서 읽기 편했네요 

OP
2019-08-10 16:27:42

ㅎㅎ 제가 쓴건 아니고.. 원문 번역해서 살짝 자료들에 맞게 교정한 수준입니다.
90년대 초반에도 세리에A 세븐시스터즈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던 모양인데, 그 중 하나였던 삼프도리아 관련 글이 있어 가져와보았습니다

2019-09-04 09:54:39

글 잘 읽었습니다.

OP
2019-09-04 23:41:48

감사합니다. 매번 댓글 남겨주시는데 큰 힘이 되네용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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