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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마라도나 시대 나폴리의 내리막길 : 천국에서 지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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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8-29 23:56:39

[TFT] 포스트 마라도나 시대 나폴리의 내리막길 : 천국에서 지옥까지

THE DECLINE OF NAPOLI POST-MARADONA: FROM PARADISO TO INFERNO







[These Football Times = Luca Hodges-Ramon]

 

 

로마 가톨릭이 삶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는 나폴리에서 지역 클럽 SSC 나폴리는 신앙이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클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때에는 그 광신도들은 축구와 종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 정도로 헌신적이었으니.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인 나폴리에서 나타나는 ‘신성화‘는 어쩌면 신성모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순은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의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마라도나의 나폴리에서 여정은 1984년부터 1991년까지다. 그는 파르테노페이에 전례 없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두 개의 스쿠데토와 UEFA 컵, 코파 이탈리아, 이탈리아 수페르 코파까지 이뤘으니까. 이 모든 것이 1987년부터 1990년 사이 거둔 수확물이며 그야말로 나폴리 ‘영광의 시대’를 수놓는 트로피들이다. 이 아르헨티나의 작은 거인이 나폴리에서 메시아로 통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라도나 신격화는 그가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기지와 신성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범위는 약물 중독, 탈세, 마피아 조직 보스와 파티 등 어두운 면들에 대한 수용까지 이어진다. 나폴리의 마라도나 추종자들은 그의 신의 경지에 이른 축구 실력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에 수반되는 역설적인 악행까지 포용하는 사람들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이룩한 황금기는 결국 대가를 치렀다. 메시아의 이탈은 앞으로 나폴리가 걷게 될 불행한 여정의 전조였다. 이제 파르테노페이는 마치 단테 알리지에리 작품 '신곡'의 사후 세계 세 곳을 거치는 듯한 행보를 밟는다.

 

단테와는 달리, 나폴리와 팬들은 천국에 닿기까지 연옥과 지옥을 지나지 않았다. 대신 나폴리는 세리에 A라는 천국에서 시작했으며 세리에 B라는 연옥으로 사정없이 떨어졌고 세리에 C라는 지옥, 가장 밑바닥인 파산까지 맛봤다. 이것이 이탈리아 축구 전성기 시절 나폴리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는 탁월한 승자의 승전곡이라기보다는 외려 비참한 쇠퇴의 보고였다. 








제1장 : 천국 (Paradiso)






1987년 5월 10일 오후, 나폴리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도시 변두리를 서성이는 관광객들에겐 마치 갑작스레 도시의 생명이 끊긴 것 같았을 것이다. 으스스할 정도로 도시를 감싼 고요한 기운은 이탈리아 인류학자 아말리아 시뇨렐리가 “세상이 변했다. 유럽에서 가장 고요하고, 가장 열성적이며 가장 혼란스러운 도시는 순간 메말랐다”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폴리는 그야말로 휴면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베수비오 화산 인근 지역 사람들 답지 않게, 나폴리 시민들은 술집, 식당, 그리고 운이 좋은 사람들은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서 그들만의 용암을 분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뭐, 크게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바로 나폴리가 창단 61년 만에 첫 세리에 A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날이었다.

 

조금 전 황폐했던 거리는 몇 분이 지나자 완전히 변모했다. 차, 건물, 테라스 등 모든 곳이 하늘색으로 물들었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나폴리 시민들이 가득했고 이들은 기쁨에 겨워 여름 내내 음주와 탐닉으로 시간을 보냈다. 존 풋은 이를 두고 그들의 자축연은 나폴리 사람들의 성향을 반증한다고 했다. 아이러니, 패러디, 섬뜩한 감정, 외설적이고 신성모독과 같은 것들 말이다.







도시의 묘지 벽에는 ‘Guagliu! E che ve sit pers!(친구들! 너희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를 거야!)‘라는 나폴리 사투리로 된 그라피티들이 있었다. 유벤투스를 위한 행사도 있었는데, 관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키아 시뇨라', 즉 올드 레이디의 죽음을 알리는 가짜 장례식이 마련됐다. 극도의 희열과 풍자, 남의 불행으로 얻는 쾌감 아래, 이런 행사들은 매우 강력한 두 가지 자부심 속에 이뤄졌다. 나폴리탄이라는 자부심과 이탈리아 남부의 자존심.

 

나폴리의 첫 타이틀은 단순히 축구사적 관점에서 역사적이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정치·사회적 의미들을 담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북부 동맹이 정권을 쥐고 있었으며 이 정당은 지역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한편, 남부 지방에 대해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나폴리의 성공은 정치·사회적으로 상징적인 반항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칼치오는 북부와 남부 간 경제적 격차를 반영해왔다. 1970년 칼리아리의 스쿠데토를 제외하면 로마 이남 지역에서 세리에 A 우승팀이 나온 것은 나폴리가 처음이었다.

 

나폴리는 일시적이지만 북부 팀들의 스쿠데토 독점을 깨뜨렸으며 이탈리아 전역에 메조지오르노(이탈리아 남부)산 축구 폭풍을 일으켰다. 나폴리의 메시지는 확실했다.

 

“1987년 5월, 이탈리아는 죽었다. 새 제국이 태어났다”





물론 나폴리발 역모의 주동자는 그들의 10번,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그의 초라한 배경과 저항정신으로 똘똘 뭉친 성격은 곧바로 나폴리탄들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단정하지 못한 외모는 터무니없는 천재성을 감출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울 만한 실력과 인간으로서 방탕한 모습. 이분법적인 마라도나의 모습을 두고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언론인인 지아니 브레라는 ‘숭고한 낙태’라 칭할 정도였다.

 

1987년 스쿠데토 시즌, 그는 10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였으며 유벤투스의 미셸 플라티니, AC 밀란의 마르코 반 바스턴, 인테르 로타르 마테우스, 우디네세의 지코 등을 제치고 리그 최고 선수로 선정됐다.

 

나폴리는 4년간 탄탄대로를 걸었고, 마라도나 그 중심에 있었다. 파르테노페이는 이 흐름을 유럽 대륙으로 이어갔고, 1989년 UEFA컵에서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슈투트가르트를 꺾으며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1년 뒤에는 다시 세리에 A 타이틀을 탈환했으며 이 시기엔 북쪽의 또 다른 강자,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AC 밀란을 무너뜨렸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16골을 터뜨린 마라도나였고 나폴리는 그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춰댔다. 





마라도나가 세리에 A 팀들에 공포를 선사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종종 마라도나의 등 뒤에 어마어마한 팀 동료들이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1986-87시즌에 거둔 성공의 배경에는 강력한 수비진이 있었다. 페르난도 데 나폴리, 살바토레 바그니 중원 듀오의 비호 아래 주세페 브루스콜로티, 모레노 페라리오, 알레산드로 레니카, 치로 페라라가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했다.

 

전방으로 고개를 돌리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격수들인 브루노 조르다노(5골)와 안드레아 카르네발레(8골)가 마라도나가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공격진에는 지안프랑코 졸라와 브라질 출신의 카레카가 합류해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는데, 후에 카레카는 마라도나, 조르다노와 함께 그들의 이름 첫 자를 딴 ‘Ma-Gi-Ca’, 마법의 삼각편대라는 뜻의 ‘마지카 트리오’로 불렸다.

 

이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오타비오 비앙키와 알베르토 비곤의 지도 아래 끈끈하게 결집돼 두 번의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팀은 마라도나의 팀이었고, 그가 축구 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 팀도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제2장 : 연옥 (Purgatorio)





아무리 반짝이는 별이라고 한들, 한 개인에게 희망과 꿈을 모두 거는 것은 결코 이상적이고 건강한 팀 운영이라고 할 수 없다. 브레라는 마라도나를 두고 ‘숭고한 낙태’라고 칭했을지 모르지만 나폴레타니들에게 마라도나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눈높이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폴리에서 뛰는 동안 그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산 제나로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벽화들을 남겼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성자의 품에 안겨 있는 마라도나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뭐 사실, 그는 매우 인간적이었으므로 육체의 유혹에 더 잘 빠지기는 했지만.


마라도나는 코카인을 비롯해 여러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고 그가 가담한 모종의 단체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는 나폴리의 범죄 조직인 카모라와 긴밀한 관계였고 지역 언론은 그가 욕조에 빠진 사진을 희화화하여 마라도나가 범죄 조직 보스들과 자쿠지에서 파티하는 사진을 싣고 ‘뜨거운 물’에 빠져 있다며 방탕한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도했다.



나폴리는 이런 일들을 묻으려 했다. 심지어 1969년부터 나폴리 회장이던 코라도 펠라이노는 제멋대로인 이 아르헨티나인을 감시하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렇지만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마라도나는 어떠한 규율이나 매니지먼트보다도 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의 당돌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고, 사실 마라도나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 그는 그라운드 밖에서 무슨 행동이든 할 자유가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이런 병적인 관계는 장기적 관점에서 팀 케미스트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마라도나는 바리전 이후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였고 15개월 정지 처분을 받았다. 나폴리의 구세주는 이제 볼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클럽이 재기하는 데까지 20년이 걸렸다.


1991-92 시즌 대부분을 마라도나 없이 치른 나폴리였지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지도 아래 재능을 만개한 지안프랑코 졸라가 눈부신 활약을 펼쳐 신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그 해 졸라는 12골을 넣었고 팀을 4위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듬해 마라도나가 완전히 팀을 떠나고서는 나폴리는 연옥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마라도나는 클럽의 성공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마라도나 스스로 자초한 파멸이 나폴리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폴리 구단과 팬들은 지나치게 마라도나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가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클럽을 위해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데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나폴리는 1984년 마라도나를 그들의 10번으로 앉혔을 때 세계 최고 이적료인 69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이는 나폴리 지역 정치인인 빈첸조 스코티가 은행과 자신의 관계를 이용해 나폴리의 보증을 서 이뤄진 것이었다. 사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통틀어 나폴리의 이 투자는 엄청난 성공을 몰고 왔지만, 그들은 이런 지출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마라도나가 떠나고 몇 년 동안, 나폴리는 그래도 아직은 세리에 A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여력은 있었다. 1993-94시즌을 6위, 1994-95시즌을 7위로 마친 것. 이는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인 우루과이 출신 미드필더 다니엘 폰세카, 자국 유망주 파비오 칸나바로와 베니토 카르보네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이 시기 라니에리, 마르첼로 리피, 부야딘 보스코프 같은 능숙한 지략가들이 파르테노페이를 거쳐 가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사실들조차 클럽의 재정 붕괴를 가릴 순 없었다. 1992년 이탈리아 사법부는 나폴리의 펠라이노 회장이 당시 이탈리아 정치권을 뒤엎은 탄젠토폴리 스캔들(마니 풀리테, 90년대 초반 이뤄진 이탈리아의 부정부패 척결 작업)에 연루되었음을 밝혔다. 그야말로 클럽은 엄청난 타격을 맞이했다. 나폴리는 엄청난 빚더미에 앉았고, 1년 뒤 펠라이노가 돌아와 나폴리의 파산을 막아보려 백방으로 힘썼지만 결국 그에겐 클럽의 가장 큰 자산들을 파는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졸라와 칸나바로는 식품 재벌 칼리스토 탄치의 지원을 등에 업은 파르마의 혁명에 가담했고, 페라라는 리피 감독을 따라 1994년 유벤투스로 향한다. 1년 뒤 카르보네도 인테르의 네라주리 유니폼을 입었다. 결국 나폴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칼치오 무대에서 힘의 균형이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새로 부임한 지지 시모니 감독은 1996-97시즌 전반기 14경기를 치르는 동안 나폴리를 2위에 올려놓으며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팀의 폼은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펠라이노는 시즌 종료 후 시모니가 인테르 감독직을 맡는 것을 미리 합의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결국 시모니는 시즌을 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내쳐지고 만다.


결국 남은 시즌은 유소년 팀 코치 빈첸조 몬테푸소의 손에 맡겨지게 됐고, 팀은 남은 16경기에서 단 2경기만을 승리하며 13위로 시즌을 마친다. 강등권과의 승점 차는 단 4점. 하지만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나폴레타니들은 원통하겠지만, 펠라이노는 또 한 번 팀의 재능들을 팔아치운다. 파비오 페키아는 챔피언 유벤투스로, 안드레 크루스는 밀란으로, 알랭 보고시앙은 삼프도리아에 새 둥지를 튼다. 이번 핵심 선수 이탈로 나폴리 스쿼드는 구멍이 송송 뚫린 상태로 시즌 개막을 맞이하게 된다. 나폴리 수비는 미래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장이 되는 로베르토 아얄라의 분투에도 불구, 평균 2점 이상을 내주며 완전히 무너졌다.


1997-98시즌, 펠라이노는 바톨로 무티, 카를로 마초네, 지오바니 갈레오네와 몬테푸스코까지 한 시즌에만 4번이나 감독을 갈아치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즌 단 2승만을 거두며 승점 14로 최하위로 떨어진 나폴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세리에 A에서 33년 연속으로 살아남았던 나폴리지만 이제 그들은 두 번째 스쿠데토를 달성한지 8년이 되는 해, 세리에 B로 강등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이 결과엔 클럽 파산이라는 악재가 뒤따랐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제3장 : 지옥 (Inferno)






왈테르 노벨리노 감독의 부단한 노력 끝에, 나폴리는 2년 만에 세리에 A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승격은 불쌍한 나폴리 팬들에게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들 중에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승격에 성공하기 조금 전, 미디어계의 거물 조르지오 코르벨리는 클럽의 지분 절반을 사들여 펠라이노와 함께 공동 구단주가 됐다. 코르벨리는 부임 즉시 “나폴리를 유럽 무대로 되돌려 놓겠다"라는 허황된 꿈을 팔았다. 노벨리노 감독은 분투했지만 코르벨리는 오락적인 측면을 중시했고 즈데넥 제만이라는 보헤미안 감독을 선호했다. 코르벨리는 제만을 데리고 오면서 그의 요청에 따라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모루소, 윙백 마렉 얀쿨로브스키를 영입했으며 파비오 페키아를 다시 불러들였다.


제만은 그만의 공격축구 스타일을 지독하게 고수하는 감독이었다. 코르벨리가 바랬던 대로 피 튀기는 액션 영화 같은 축구를 구사할 수 있는 감독이었던 것. 하지만 나폴리에서 제만은 그야말로 재앙 같은 성적을 남겼고, 임기도 짧았다. 그는 시즌 시작 후 6경기 만에 경질됐으며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그동안 14골을 내줬고 볼로냐와 경기에서는 홈에서 5실점하며 패하기까지 했다.




나폴리는 에밀리아노 몬도니코로 노선을 틀었다. 그는 ‘빵과 살라미’라는 철학으로 대표되는 감독으로, 단순 명료하고 자유분방한 축구를 했으며 제만과는 아주 달랐다. 몬도니코는 1992년 토리노를 UEFA컵 결승으로 이끈 것으로 유명하며 어려움을 겪는 클럽이나 변방 클럽을 맡아 성공을 거두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는 라치오, 인테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며 피오렌티나는 홈, 원정 모두 이기며 즉각적인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나폴리는 12위부터 17위간 격차가 승점 2점밖에 차이 나지 않는 불운 끝에 강등되고 만다.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은 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불거진 계산 착오였다. 나폴리는 강등을 면하기 위해 애썼고, 파르테노페이는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에드문두와 아마우리의 변덕스러운 브라질 듀오를 영입했다. 하지만 이 도박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고 이번에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나폴리 사람들에겐 ‘스카라만티치’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는데, 달리 말해 미신을 잘 믿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아가 팀을 떠난 뒤 나락을 향해 치닫는 클럽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신이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 신성모독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일까. 2001년 9월엔 홍수로 낙후된 산 파올로 스타디움의 콘크리트 벽에 구멍이 뚫려 남쪽의 작은 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한편 클럽 수뇌부의 급격한 변화는 팀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코르벨리와 그의 새 사업 파트너인 요식업 재벌 살바토레 날디는 펠라이노의 클럽 지분을 완전히 청산하고 소유권을 장악했다. 이후 2002년, 코르벨리는 텔레비전 판권 매각과 관련된 스캔들로 체포됐고, 클럽은 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파르테노페이는 계속해서 세리에 B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2004년 8월 나폴리 시민 재판소가 총 7900만 유로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파산 선고를 하면서 불우한 말로를 겪던 나폴리는 결국 숨통이 끊겼다. 영화 제작자 겸 현직 사장인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가 클럽을 3400만 유로에 사들여 ‘나폴리 사커’라는 새 이름으로 세리에 C에서 새 출발을 하기 전까지 파르테노페이는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까지 했다. 나폴리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세리에 C까지 내려간 적이 없었고, 이제 그들은 세리에 C라는 지옥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장은 나폴리의 위신과 팬들의 충성심을 다루기 위해 준비해봤다. 이 최악의 순간에도, 나폴리의 산 파올로에는 여전히 5만 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할 정도였고, 나폴리는 세리에 C 최대 관중 동원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4번째로 사랑받는 이 클럽의 가슴 아픈 종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폴리는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고, 클럽의 비참한 경기력은 나폴레타니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클럽 수뇌부들은 늘 압박감에 시달렸고 선수들이 위협받는 일도 꽤 많았다. 심지어 미드필더 레나토 올리브는 칼을 들고 그를 위협하는 젊은 팬들에게 둘러싸이는 등, 개탄스러운 일도 있었다. 위대한 이 클럽이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4장 : 사치 (Extravagance)





나폴리의 별칭인 파르테노페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가는 동안 그를 바위 위로 유인하려 했던 사이렌의 이름인 파르테노페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혹에 실패한 파르테노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폴리 근처 해안으로 떠밀려왔다고 한다. 비록 오디세우스는 그 스스로를 배 돛대에 매달면서 파르테노페의 노랫소리에 저항했을지 모르지만 이탈리아 축구의 황금기 시절, 많은 클럽들은 단기적인 영광을 위해 유혹에 깊게 빠져든 그들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폴리의 몰락은 많은 칼치오의 거물들이 부실 경영으로 무너질 징후라고 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자본을 등에 업은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매료시켰고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맛을 내는 축구를 펼치고 있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그라운드를 수놓는 축구 천재들의 향연일 뿐 아니라 뻔뻔한 사치의 현장이었다. 


부도덕한 구단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방탕한 소비를 일삼았다. 돈은 소비되고, 차용되고, 어디선가 나타났다. 아주 부도덕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는 한때 남부 최후의 보루였던 나폴리를 비롯, 칼리스토 탄치의 파르마, 세르지오 크라뇨티의 라치오, 지안 마우로 보르사노의 토리노, 비토리오 체키 고리의 피오렌티나 등 수없이 증명된 바 있다.




이 사건이 나폴리가 아닌 리버풀에게서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라. 그들은 파산했고 잉글랜드 3부 리그까지 떨어진다. 사실, 나폴리의 성공은 리버풀의 그것과 비교해선 국내 무대는 물론, 유럽 무대에서의 성과는 더 초라하기만 하다. 하지만 나폴리의 독특한 문화적, 지리적 정체성이 파르테노페이를 만들었고, 이탈리아의 남북갈등이라는 사회적인 부분까지 더해져 리버풀과 비견될 만한 위치에 오르게 만들었다. 결국 이 이탈리아 남부의 거인을 물리친 것은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폴리가 데 라우렌티스의 비호 아래 다시 태어나기는 했지만, 연옥을 거쳐갔던 그들의 기억은 쉽게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 지옥까지 여정을 목격한 나폴레타니들은 그들이 AC밀란과 유벤투스 같은 팀들을 무너뜨렸던 시절에 대한 추억을 나눌 것이다. 단테는 “슬픔에 잠길 때, 행복했던 시절을 유념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SSC 나폴리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이탈리아 축구의 황금기 동안 펼쳐졌던 이야기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9/08/15/the-cecline-of-napoli-post-maradona-from-paradiso-to-infe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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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9-09-01 13:33:18

글이 엄청 시적이네요 ㅋㅋㅋ 뭔가 거대한 서사시를 보는 느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P
2019-09-04 23:41:12

아무래도 원문에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 연옥 지옥을 바탕으로 썼다보니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네욯ㅎ

Updated at 2019-09-03 17:49:04

글 잘 읽었습니다.

OP
2019-09-04 23:41:20

감사합니다!

2019-09-05 07:34:05

부정부패한 구단주들이 나폴리를 많이 지나쳐갔군여.

그나저나 칸나바로 지키면서 아얄라까지 있었으면 겁내 ㅎㄷㄷ했을듯.

OP
2019-09-05 16:05:54

아얄라가 밀란에 있었단 건 알고 있었는데 나폴리에서 뛰었는지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칸나바로는 이탈리아에서 본인이 거친 클럽들 대부분이 몰락하는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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