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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스쿠데토 : 불문율을 깨고 반란을 일으킨 베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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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04 02:47:44

[TFT] 1985년 스쿠데토 : 불문율을 깨고 반란을 일으킨 베로나

HOW VERONA DEFIED THE ODDS – AND THE UNWRITTEN RULES – TO LIFT THE SCUDETTO IN 1985

 






 

 

[These Football Times = Alan Draper-Lewis]

 

 

 

지난 시즌 유벤투스가 스쿠데토를 들어 올리면서 축구팬들은 기록적인 7연패를 목격했다. 밀란의 두 거인과 로마는 그들의 기록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그들을 멈출 수 있는 팀은 나폴리밖에 없었다. 약간 모자랐지만. 

 

두 팀은 34라운드,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맞붙었고 늦은 시간 터진 칼리두 쿨리발리의 골로 파르테노페이에 약간이나마 희망이 생긴 듯 보였다. 하지만 그 꿈은 이내 깨어지고 만다. 영웅이었던 쿨리발리가 역적이 된 것. 피렌체 전에 퇴장당하며 나폴리는 0-3으로 패했고 세리에 A 타이틀 레이스는 끝나버렸다. 

 

당시 나폴리를 이끌던 마우리시오 사리 감독은 유벤투스가 ‘경기장 밖 어떠한 힘‘으로부터 이점을 누리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주장에 근거는 없는 것은 아니다. 유베는 2006년 칼초 폴리 스캔들에서 가장 엄한 처벌을 받은 구단이었고 세리에 B로 강등되기도 했다. 승부조작 폭로 사건은 축구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지만 사실 그것은 부패와 속임수로 점철된 칼치오의 어둡고 오랜 역사가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칼초 폴리 이전에 이탈리아 축구계에 일어난 첫 번째 승부조작 사건은 토토네로 스캔들이었다. 1980년 이탈리아 경제 재무부 휘하의 사법기관인 'Guardia fi Finanza'는 선수들과 클럽 구성원들에게 금전을 전달하고 경기 결과를 조작한 베팅 조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밀란과 라치오는 2006년 유베가 겪었던 것과 동일한 ‘강등’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대하고 성공한 몇몇 클럽들이 저지른 범죄는 언더독의 도전기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실상은, 부패란 이탈리아 축구의 모든 곳에 퍼져있었다. 단지 빅클럽뿐이 아니었던 것. 아벨리노, 볼로냐, 페루자 역시 토토네로 스캔들에 연루돼 있었고 승점 제재를 받았다. 세리에 B의 팔레르모, 타란토도 비슷한 처벌을 받았다. 나폴리도 처벌 대상이었는데, 승점 감점 징계는 받지 않았으나 윙어 오스카 다미아니가 관련 인물로 지목돼 3개월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기죄로 기소된 사람들의 수는 31명에 달했다.

 

토토네로 스캔들은 1984-85시즌 생겨난 중요한 변화들을 가져온 촉매제가 됐다. 주심들은 이제 패널에 의해 선택되지 않고 임의로 배정됐던 것. 이것은 이탈리아 축구의 이미지를 씻기 위한 시도였으나, 곧 역사상 가장 예기치 않은 우승팀이 배출된 사건과 영원히 얽히게 된다.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서 일어난 칼치오의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헬라스 베로나의 처음이자 유일한 스쿠데토가 바로 그것이다.

 

 






베로나는 베네토 지방의 군소 클럽이다. 1903년 창단됐고 1957-58시즌 처음으로 세리에 A 무대를 밟았다. 클럽 역사는 대부분 1부와 2부를 오간 사실들로 채워져 있고 이따금씩 거둔 성공이 전부였다. 2017년 베로나는 19위에 그쳤고 78실점을 기록하는 동안 득점은 고작 30골에 그쳤다.

 

잔류에는 13점이나 모자랐고 다시금 세리에 B로 돌아갔다. 베로나는 2016-17시즌 승격에 성공했지만 1부 리그에 단 1년을 머무는 데 그쳤다. 이 같은 사실들이 1부와 2부를 오가는 현대 베로나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세리에 B 우승은 세 차례 이뤘으며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도 같은 수다. 하지만 클럽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타이틀은 역시 1984-85시즌 세리에 A 우승이다.

 

사실 베로나는 대성공을 거둔 1985년 외에도 꽤 괜찮은 성과를 거뒀었다. 1984년은 6위로 마감했고 그전 시즌은 4위로 마감했으니 말이다. 1983-84 시즌엔 UEFA 컵에도 출전했는데, 2라운드에서 슈투름 그라츠에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한다. 이 시기엔 베로나는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두 번의 성과를 거뒀는데, 1983년과 1984년 모두 결승에 올랐다.

 

베로나란 클럽의 역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 1982-83시즌, 다시 세리에 A로 올라오기 전까지, 그들은 2부 리그에서도 강등권 싸움을 면치 못했으니까. 1부 리그 최하위로 강등된 1978-79시즌엔 승점 15점 밖에 얻지 못했고, 이는 같이 강등된 아탈란타보다도 9점이나 적었다. 이후 세리에 B에서 두 시즌 동안 13위, 16위에 머무르며 고된 나날을 보냈다.

 

 

 





그들을 구원한 인물은 전 체세나 감독인 오스발도 바뇰리. 그는 지안카를로 카데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아 팀의 빠른 상승세를 이끌었다. 첫 시즌부터 바뇰리는 팀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피사와 삼프도리아를 앞지르고 1점 차로 세리에 B 타이틀을 차지한 것. 아무도 몰랐지만 바뇰리는 세 시즌 뒤 이탈리아 최상위 리그에서도 이 같은 수법을 재현해낸다.

 

하지만 바뇰리 사단이 세리에 A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뒀지만 베로나 팬들에게 스쿠데토라는 꿈은 요원해 보였다. 심지어 다른 축구팬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과도 같았으니까. 그즈음 세리에 A는 유벤투스의 미셸 플라티니, 파올로 로시, 즈비그니에프 보니엑, 로마의 팔카우와 로베르토 프루조가 뛰는 리그였고 인테르에선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와 칼 하인츠 루메니게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수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엔 세계 최고 이적료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나폴리에 당도, 충격적인 데뷔 시즌을 선보일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베로나가 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첫 장은 마라도나로부터 시작된다. 슈퍼스타를 맞이한 파르테노페이는 많은 팡파레와 미디어의 관심 속에 시즌 개막전이 열리는 베네토로 향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가 뽐내며 걷는 것을 보고 싶어 하던 이들은 이내 변방 클럽 앞에서 작아진 마라도나를 보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베로나가 새로 영입한 독일 국가대표 한스 페터 브리겔은 아르헨티나의 숙적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선제골을 터뜨리는 한편 3-1 승리를 이끌며 팀을 순위표 최상단에 올려놓았다.

 

브리겔이 이끈 개막전 승리는 수수께끼 같았던 새 동료, 프레벤 엘케어가 진짜배기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다재다능하고 신체적으로 뛰어난 미드필더 브리겔은 카이저슬라우턴에서 독일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거듭났고, 1984년 쟐로블루로 왔다. 브리겔은 베로나에서 신화를 쓴 덕에 1985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역대 최초로 외국에서 뛰는 선수에게 수여된 것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바뇰리 사단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그러나 진정 스타 영입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엘케어를 얻은 것이었다. 벨기에 로케런에서 베로나로 향해 칼치오판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그는 1984년과 85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각각 3위,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86년 월드컵에서 덴마크 황금세대는 16강에 머물렀으나 그는 브론즈 볼을 수상할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

 

골초였던 엘케어는 그의 훌륭한 축구 실력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 기억될만한 선수다. 그는 훌륭한 기술이 강한 공격 본능과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혼합된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선수였다. 베네토에서 대폭발한 그에겐 ‘Il Sindaco’, 시장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골들이 베로나를 타이틀로 이끌었으니 말이다.

 

 





한정된 예산에도 이뤄낸 발 빠른 두 선수의 영입은 베로나의 우승 시즌을 대표할만한 것이었다. 이들은 명망 있는 세리에 A 클럽의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에 이름값 면에선 못 미칠지 몰라도 재능 면에선 확실히 뒤떨어지지 않는 선수들이었다. 브리겔과 엘케어는 바뇰리가 그전 시즌들을 치르며 맞춰간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과도 같았다. 팀은 건실하고 재능 있는 선수들로 짜여 있었고, 두 외국인 선수가 화룡점정이 되었다고나 할까. 선수단 대부분은 최상위 리그에서 검증받아야 할 선수들이 대다수였고, 더 큰 클럽에서 뛸만하다는 합격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로 선발돼있었다.

 

수비수 루치아노 마랑곤과 주장 로베르토 트리첼라는 각각 로마와 인테르에서 온 선수들이었다. 재능 있는 윙어 피에트로 판나는 유벤투스에서 100경기 이상을 뛴 상태였지만 유망주 시절 기대치만큼 날개를 펴지는 못한 선수였다. 엘케어의 파트너인 젊은 스트라이커 주세페 ‘나누’ 갈데리시는 후에 트리첼라와 함께 1986년 월드컵 스쿼드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비록 두 선수는 아주리 유니폼을 입고 거의 뛰지 못했으나 바뇰리의 주전 플레이메이커인 안토니오 디 제나로는 대회 전경기에 출장했다. 디 제나로는 재간 넘치는 드리블과 패스를 선보이는 선수였고 스태미나를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보이는 미드필더였다. 바뇰리 체제에서 중원의 사령관 역할을 맡은 그는 팀을 영광으로 이끄는 핵심 선수였다.

 






바뇰리의 지도 아래 다재다능하고 기술을 갖춘 선수단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강한 집중력으로 가득 찬 견고하고 응집력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또한 그의 선수 관리 능력과 이적 시장에서 빠른 판단력 역시 크게 작용했다. 베로나 선수단은 상호보완적인 선수들로 꾸려져있었으며 그런 색깔이 팀 영입 방침의 큰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베로나를 맡기 전까지 감독 경력은 하부 리그를 지도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겸손한 바뇰리는 그 스스로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갖춘 현대적인 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세심하게 팀을 준비하고 상대 전술을 분석하는 그의 학구적인 성품은 충직한 베로나 팬들이 그를 스위스인이라는 뜻의 ‘Lo Svizzero’라는 별명을 붙이게 했다.

 

바뇰리의 베로나는 리베로를 맡은 주장 트리첼라를 위시한 끈질긴 수비진을 중심으로 역습 위주 카테나치오 진형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트리첼라 앞에는 실바노 폰톨란이 합을 맞췄고 좌우 측면은 견실한 마우로 페로니와 루치아노 마랑곤이 버티고 있었다. 골문엔 다소 특이한 스타일로 이름을 날린 민첩하고 믿음직한 골키퍼 클라우디오 가렐라가 지켰다. 이들이 내준 실점은 단 19골 밖에 되지 않았고 당해 최저 실점팀으로 거듭나며 세리에 A에서 가장 견고한 수비라인을 이뤘다.

 

그들 앞엔 브리겔과 도메니코 볼파티가 중원에 철책을 만들었고 디 제나로가 레지스타로 뛰었다. 빠르고 교묘한 판나는 주로 오른쪽 윙 자리에서 20골을 때려 넣은 엘케어와 갈데리시 듀오를 지원사격했다. 각 선수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경기 중 상대 전술에 맞춰 바뀐 전술에도 어려움 없이 맞춰 반응할 수 있는 전술적 범용성을 갖추고 있었다.

 

 



개막전에서 마라도나의 나폴리를 깨부순 바뇰리 사단은 순조로운 출발을 이어나가며 개막 이후 14경기 무패행진을 달렸다. 이 기간에 얻은 힘겨운 사투 끝 승리와 무승부들은 베로나에게서 묻어나는 견고함과 강한 정신력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9_ddhlScBA

위 영상 35초부터

 

하이라이트는 유벤투스전 거둔 2-0 승리였는데, 엘케어는 이날 그를 상징하는 골을 터뜨렸다. 아니 어쩌면 이 괴짜 덴마크 공격수 뿐 아니라 이 시즌 베로나가 거둔 성공을 함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왼쪽 측면에서 볼을 잡은 엘케어는 힘차게 내달려 유벤투스 수비진 사이로 파고드는 사이 두 번의 태클을 피한다. 그 와중 오른발 축구화는 벗겨져 잃어버렸지만 다시 안쪽으로 한 번 치고 맨발인 오른발로 골망을 갈랐다. 이 골은 그야말로 기괴하고 예기치 못했으며,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단호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기인’이라 불릴만한 공격수와 꾸밈없는 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베로나의 첫 패배는 아벨리노에 당한 2-1 패배였는데, 사람들은 바뇰리 사단의 쿠데타가 곧 잠잠해질 것이며 순위표에서도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의 결연한 의지는 시즌의 남은 경기에서 오롯이 드러났다. 우디네세전이 좋은 예가 될 것인데, 쟐로블루는 3-0으로 이기고 있었다가 3-3 동점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동요하지 않고 두 골을 더 넣어버리며 승리를 굳혔다. 마지막 골은 엘케어가 장식했다.

 

우디네세전을 멋지게 승리한 뒤, 베로나는 6명의 주전 선수가 부상으로 쓰러진 상태로 인테르를 만난다. 알토벨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끌려갔지만 베로나는 브리겔의 천금 같은 동점골에 힘입어 중요한 승점을 챙긴다. 그다음 라운드 상대도 우승 후보인 유벤투스라는 어려운 상대였지만 베로나는 이번에도 무승부를 일궈낸다.

 

베로나는 4월까지 흐름을 이어갔고, 이들을 저지하고 우승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승점권엔 인테르와 토리노뿐이었다. 그리고 홈에서 토리노에 1-2 패배를 당하며 승점차는 6에서 3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그들이 스쿠데토를 확정 지은 시즌을 단 한 경기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29라운드 아탈란타전, 엘케어는 1-1로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동점골을 터뜨렸고 이 시즌 베로나의 아이콘이었음을 확실히 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둔 베로나는 로마와 유벤투스가 우승컵을 차지했을 당시 승점과 똑같은 승점 43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탈리아의 두 거인과 비교해 보잘것없는 스쿼드였고 바뇰리는 단 17명의 선수만을 썼음에도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다.

 

베로나 선수단과 바뇰리 감독은 베네토로 금의환향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베로나라는 변방 클럽을 새겼으니, 베로나의 영웅이 아닐 수 없다. 베로나의 우승은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대도시 클럽이 아닌 군소도시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 이룬 마지막 스쿠데토로 남아있다.

 

슬프게도 바뇰리 사단의 항해는 거기까지였다. 1984년과 85년 사이, 클럽은 엄청난 상승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나아갔으나 이내 비슷한 하향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1985-86시즌, 유벤투스와 함께 유러피언컵에도 출전했으나 오래 못가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다시는 전과 같은 높은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바뇰리는 많은 팀들로부터 구애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팀에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애제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니, 마치 최근 모나코처럼 한 꺼풀씩 옷을 벗는 스트리퍼 클럽 같다고나 할까. 쟐로블루의 스타들은 이후 몇 시즌에 걸쳐 하나 둘 빠져나갔다. 가장 먼저 떠난 선수는 판나로, 인테르에 합류했고 브리겔과 가렐라, 갈데리시는 각각 삼프도리아, 나폴리, 밀란 유니폼을 입었다. 엘케어는 조금 더 머물렀지만 결국 그와 바뇰리도 앞서 떠난 이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클럽이 세리에 B로 강등당하자 바뇰리도 제노아로 향한다.

 

1985-86 시즌 스쿠데토가 다시 유벤투스의 품에 안기면서 타이틀 레이스는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정상적’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속에는 무작위 심판 선정 제도가 한 시즌 만에 파기됐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베로나의 영광을 논할 때 심판 선정 과정에 너무 크게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분명 불공정하고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선수들과 천재적인 코치의 지휘 아래 나온 축구적 성취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로나가 거둔 이례적인 승리를 이탈리아 축구 역사성을 감안하고 보면, 위와 같은 이슈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힘들다.

 





많은 이들에게 쟐로블루의 우승은 칼치오가 더 깨끗하고 정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미래의 본보기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축구가 외적 요소가 배제됐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오로지 스포츠적인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기울어지지 않은 필드 위에서 말이다. 사실 1985년의 이 사건은 이탈리아 축구 협회가 토리노, 밀란, 로마의 빅 클럽들과 짝을 지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의혹을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이후 수년 만에 베로나는 본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 헬라스 베로나가 거둔 외로운 승리는 왕년에 이탈리아 축구에는 부정부패와 외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유산으로 남겼다. 곧 스포츠가 정말 깨끗하면 좀처럼 보기 힘든 업셋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다시 전통을 자랑하며 때론 논란이 있고, 강력한 토리노, 밀란, 로마의 클럽들에게로 향하겠지만, 그 누구도 베로나의 스쿠데토를 빼앗을 순 없다. 아마 칼치오 역사상 가장 ‘진정한 승리’로 남아있을 테니.




원문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8/07/24/how-verona-defied-the-odds-and-the-unwritten-rules-to-lift-the-scudetto-in-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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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04 09:37:14

 무작위 심판 선정 왜 파기된거죠...ㅠㅠ

OP
2019-11-04 19:05:06

좀 찾아봤는데 이렇다할 이유를 찾기 힘드네요. 위키에도 해당 시즌이 유일하게 심판 임의 배정을 했던 시즌이라고만 돼있고..

Updated at 2019-11-10 20:14:09

글 잘 읽었습니다. 84/85시즌 베로나 우승은 97/98시즌 카이저슬라우테른 우승, 15/16시즌 레스터 시티 우승만큼이나 동화같은 우승같아요.

2020-08-08 12:43:46

이런 일도 있었군요.. 이탈리아가 괜히 판정에 예민한게 아닌듯

20
21448
22-02-07
49
25423
21-04-06
31
17590
20-12-31
37
13682
21-03-03
65
14170
21-04-09
62
6495
20-07-30
59
6253
20-03-29
46
4669
20-01-15
28
2163
21-02-08
33
2661
21-02-04
32
5568
21-01-26
31
6079
20-11-09
29
2533
20-10-30
32
2593
20-10-10
35
4263
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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