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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칼치오 사이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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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8 04:31:14

[TFT] 무솔리니와 칼치오 사이 상관관계

THE RELATIONSHIP BETWEEN MUSSOLINI AND CALCIO









[These Football Times = Greg Lea]




축구란 본질적으로 소모적인 오락거리이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숙명의 라이벌인 자말렉과 알 알리 서포터들이 맺은 일시적인 휴전은 ‘아랍의 봄’에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축출시킨 것이 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두 나라 간 월드컵 예선전이 펼쳐지기 전 폭동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의 위력을 베니토 무솔리니만큼이나 잘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악명 높은 파시스트로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를 지배한 그 사람 이야기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더뎠던 이탈리아 경제는 4년이나 진행된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황. 본래 이탈리아반도에는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난립했고 이 시기는 하나의 이탈리아로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행정적으로도 불완전한 상태였다.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위엄을 회복하고 이탈리아를 전 세계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국으로 재건시키겠다는 거대한 야심을 품었다. 무솔리니는 이러한 일은 내부 통합을 이뤄야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는 축구가 자신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20년대 초반, 무솔리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축출하고 지배권을 얻었을 때, 축구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당시 축구 조직에 대한 운영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두 개의 리그가 존재했는데 하나는 이탈리아 자국민만을 위한 리그였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의 참가를 허용하는 리그였다. 그리고 둘은 각각 지역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두체’ 무솔리니는 축구가 가진 잠재력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때까지 일관성이 없었던 축구 리그 운영을 조직화하는 한편, 축구를 이탈리아 내에서 비교의 대상이 없는 보편적인 여가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26년 파시스트 당원이자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 회장인 란도 페레티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FIGC)도 맡아 전반적인 축구 운영을 개조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 과정에는 지도층의 상당한 개입이 있었다.


후에 공개된 ‘카르타 디 비아레지오’라는 문서에 따르면, 축구선수는 ‘비 아마추어’로 규정돼 전문성을 갖추게끔 했으며 각 클럽은 스쿼드에 2명의 외국인만을 보유토록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세리에 A는 현재와 같이 전국적인 형태로 틀을 갖췄고 파시스트적인 인상을 주는 경기장들이 건립됐다. 제노아, 밀란, 인테르와 같은 구단들은 클럽명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꿔야만 했다.






무솔리니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국가 대표팀이었다. 이러한 국내 개혁은 대체로 대표팀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이뤄졌던 것이었으니까. 무솔리니는 우수한 이탈리아 선수들을 길러내기 위한 구조를 만들어 아주리가 올림픽과 초기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이탈리아가 강하고 어려운 상대이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 대회에서의 선전은 내부적으로도 이점이 있었다. 만약 이탈리아인들이 축구로 청, 백, 적의 삼색기 아래 하나로 뭉친다면 축구 외에도 어디에서나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무솔리니는 스포츠계 성과가 새로운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국민들이 그것을 통해 더욱 집단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 카타르의 월드컵 유치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탈리아 당국은 정치적 입김을 불어넣어 1934년 월드컵 개최권을 따낸다. 무솔리니는 2회 월드컵 개최가 가져다줄 위신과 자부심에 크게 취해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축구가 가진 힘을 당 선전에 이용하고자 했다. 존 풋이 그의 저서 ‘Calcio’에서 밝힌 바, 당시 이탈리아의 새 경기장들은 ‘파시스트 집권기 이탈리아의 공업 수준’을 보여준다고 했고 무솔리니 통치하 빠른 경제 성장의 증거라고 했다. 또 한 번 축구가 성장하는 이탈리아의 부와 혁신을 세계에 보여주는 최적의 도구로 활용된 셈이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했듯 무솔리니도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는 데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이러한 집착은 축구와는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았는데, 스포츠는 항상 우연이라는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월드컵 대관을 위해서 여러 부분들을 조작하고 사전에 큰 틀이 계획될 수도 있지만, 필드 위에서의 일은 예측 불가능한 부분이 컸다. 이 부분은 무솔리니 체제에게는 꽤 취약한 부분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주세페 메아짜,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등 위대한 선수들이 뛰고 있는 재능 있는 팀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가능한 변수들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대표적인 혐의 중 하나는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와 준결승전 전날 주심인 이반 에클린트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일이었다. 이탈리아는 파울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논란의 승자가 됐고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눈물을 흘렸다.


스페인과 8강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거친 플레이에 스페인 선수가 세 명이나 부상으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결승전도 2-1로 힘겹게 승리하긴 했으나 독재자의 실각을 외치는 이들을 침묵시킬만한 경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증거물이 바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쥘 리메 상보다 6배나 더 컸던 ‘코파 델 두체’라는 상이었다. 이 상은 우승한 이탈리아 선수들을 위해 제작됐고, 폐막식에서도 강렬한 이탈리아식 민족주의를 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뇌물과 부정부패로 만들어진 챔피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물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로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으나(불안한 동맹인 무솔리니-아돌프 히틀러 사이에서 그에게로 관심이 몰린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겐 1938년 대회가 정말로 중요한 대회였다.


아주리 군단은 대회가 열리는 프랑스로 향했으나 그다지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코의 뒤를 봐주고 있었고 경기장 밖과 도심에서 반 파시스트 시위를 벌이고 있던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굽히지 않고 대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선수단에게 상하의가 완전히 검은 유니폼을 입으라고 지시했고 파시즘의 상징인 ‘파시오 리토리오’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프랑스 관중들은 엄청난 야유를 보냈고 비토리오 포쪼 감독은 선수들에게 경기 전 관례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그들을 향해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한 것들과는 별개로, 아주리 대표팀은 4년 전 이룬 위업의 진위에 대한 의구심들을 완전히 날려버리며 노르웨이, 프랑스, 브라질, 헝가리를 차례로 꺾으며 연속 우승에 성공한다.


당시 대표팀의 성공은 ‘오리운디’의 존재. 이탈리아 혈통이 흐르는 이민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언뜻 아르헨티나 태생의 몬티, 오르시, 엔리케 과이타 같은 이들은 이탈리아 순혈주의를 주창하는 당시 방침에는 잘 맞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리에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으며 사실 ‘널리 뻗어나가는 디아스포라’를 포함하는 광범위하고 식민지 시대 이탈리아, 파시스트적 이상과 멋지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오리운디들이 무솔리니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문서가 있는데, 그들은 이탈리아의 승리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 선발됐을 뿐이며, 1934년 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순혈 이탈리아 선수들에게만 지급된 기념 메달을 수여받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피치에서 그들은 가능한 파시스트적인 방식으로 경기에 임했다. 포쪼는 노력과 희생, 단결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감독이었고 선수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합숙을 시키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Inverting the Pyramid’에서 조나단 윌슨은 비록 포쪼의 방식은 깨끗하진 않았으나 “그는 당시 만연해있던 군국주의를 활용해 아주리 군단을 압도적인 팀으로 만들고 동기를 부여했다”고 했다. 반면, 전설적인 축구 기자 브라이언 글랜빌은 이탈리아는 당시 헝가리나 오스트리아만큼 기술적으로 뛰어난 팀이 아니었으나 이를 단호한 결집력과 압도적인 체력으로 상쇄하는 팀이라고 표현했다.


전술적으로 이탈리아는 호전적인 성향과 대응에 중점을 둔 잘 정돈된 팀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시했던 것은 견고한 수비벽.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마리오 사파는 1938년 이탈리아 대표팀의 가장 큰 장점을 “가능한 적은 수의 선수만으로도 공격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아주리 공격진은 메아짜, 실비오 피올라, 지노 콜라우시처럼 재능 있는 선수들로 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경기에선 실력을 뽐낼 기회를 상당 부분 포기해야 했다. 포쪼는 일찍부터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으며 최초의 1대1 맨 마킹 신봉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경기 내내 상대 선수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했다. 규율과 희생. 바로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스트 정권이 부르짖는 두 단어는 포쪼 체제에서도 핵심 가치였다.





 


 

1926년, 무솔리니가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이탈리아가 그렇게나 피치 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에 단정적으로 답하긴 어렵다. 결국 ‘두체‘는 에마누엘레 3세가 실각하기 훨씬 전부터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속에 자라왔던 축구에 대한 사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비록 프로 리그 출범은 확실히 칼치오 저변의 확대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어쨌든 무솔리니가 없다 하더라도 그 시절 아주리 대표팀 같은 재능들은 분명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무솔리니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축구가 갖는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1934년 월드컵, 1936년 올림픽, 1938년 월드컵으로 이어지는 성공의 역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고, 약삭빠른 무솔리니는 스포츠에서의 성공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나라의 경제, 공공사업, 경찰과 군대를 통솔했던 파시스트 독재자조차 그의 개인적, 정치적 명분을 두텁게 하기 위해 축구를 필요로 했다. 그것이 바로 이 아름다운 게임이 비범한 힘을 가졌다는 매혹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원문링크

 | https://thesefootball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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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11-12 21:35:21

    글 잘 읽었습니다.

    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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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4 14:56:4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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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4 16:16:32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OP
    1
    Updated at 2019-11-14 21:08:48

    에구..과찬이십니당 감사합니다!

    1
    Updated at 2019-11-14 20:47:55

    어떻게 보면 무솔리니는 본인의 권좌와 이탈리아의 대외 이미지를 위해 2회 월드컵을 철저히 이용해먹은 셈이죠. 결과가 좋게 나오긴 했지만 의도를 생각해보면 씁쓸하기도 하네요.

    OP
    1
    2019-11-14 21:10:32

    잘은 모르지만 스포츠를 당 선전의 도구로 써먹은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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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5 16:34:26

    베를루스코니때도 느낀거지만 자기 정치나 인기 위해서 축구 이용할 때 조금 그래요;;

    OP
    1
    2019-11-15 17:47:18

    본문에 언급된 것 외에도 78년 아르헨티나나 88년 서울올림픽 같은 것들 생각해보니 독재자들이 스포츠 축제를 잘써먹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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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 at 2019-11-15 17:48:14

    한국도 전두환대통령이 3S정책 이용한 역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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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04:15:25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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