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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천재 레이몽 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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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2 00:30:31

[TFT] 흔치 않은 천재 레이몽 코파

THE RARE GENIUS OF RAYMOND KOPA








[These Football Times = Gary Thacker]




세 개의 유러피언 컵 메달과 수많은 리그 타이틀, 대륙컵들, 1958년 발롱도르까지.


1950년대 후반에 비범한 축구 선수 중 하나로 여겨졌던 전설적인 선수, 레이몽 코파슈쳅스키가 1931년 10월에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는 폴란드의 크라코프에서 살았고 이곳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후에 그들은 코파의 부모가 태어난 독일로 이주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들은 프랑스로 향한다. 1931년 가을, 어린 레이몽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있는 이 가문의 3대로 태어난다. 이 집안이 둥지를 튼 프랑스는 그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다.


36년 뒤, 그가 프로 축구에서 은퇴하자 코파(학창시절 코파슈쳅스키에서 코파로 줄여 부르게 된다)라는 이름은 프랑스 축구의 영웅으로 여겨진다. 이에는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모습 외에 그의 독특한 삶도 크게 기여했다. 사실 그는 1970년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기사 작위)를 받았고 2007년엔 한 단계 높은 오피시에 작위로 승격되기도 했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월드사커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에 그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펠레 역시 그의 리스트에 코파를 빼놓지 않았다. 프랑스 풋볼 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프랑스 축구 선수를 논할 때 미셸 플라티니, 지네딘 지단에 이어 코파를 언급하기도 했다. 2010년엔 UEFA 회장상을 수상하기도.







이 모든 것은 호츠 드 프랭스 지방의 작은 동네인 Nœux-les-Mines로 이주한 조부모 덕이 컸다. 그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어린 나이부터 코파의 할아버지를 따라 탄광으로 향했고 코파의 부친은 사고로 왼쪽 손가락 하나를 잃기도 했다. 그 일이 어둡고 위험한 프랑스 탄광 산업 고용 문제에 있어 어떠한 위협이 됐을지는 몰라도, 어린 코파가 축구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도록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시였던 1941년, 코파는 지역 클럽 US Nœux-les-Mines에 입단했고 1949년까지 그곳에서 축구에 대한 이해를 거듭했다. 17세가 되고 입단 테스트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프랑스의 발레 드 라 르와흐에 근간을 둔 리게 2의 앙제에 입단,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이 클럽에 코파가 몸담은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단 2시즌을 뛰었고 60경기에 출장, 15골을 넣었다. 그럼에도 2017년 3월 27일, 코파가 사망한지 3주가 되는 시점에 앙제는 코파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홈 스타디움 이름을 스타드 장 부앵에서 스타드 레이몽 코파로 변경하기도 했다.







1951년 즈음 코파는 만개한다. 그는 아마도 현시대에서 종종 전술적 혁명으로 여겨지는 ‘펄스 나인‘을 가장 먼저 선보인 인물이며 그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수십 년은 더 앞서 있는 축구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주로 전방에서 살짝 물러나 있는 역할을 맡았고 이에 따라 공격을 이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다. 이는 직관적인 패스와 멋진 드리블을 선보이는 그에게 있어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짝 아쉬운 골 결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북부, 스타드 드 랭스의 새 감독인 알베르 배토 감독은 코파가 클럽을 성공으로 이끌 재목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제대로 적중, 랭스를 전에 없던 영광으로 이끈다. 이전 감독이었던 앙리 뢰슬러 하에서 팀은 1948-49시즌 첫 리그 타이틀을 얻은 바 있었다. 허나 배토 감독은 랭스가 단기적인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거듭나기를 꿈꾸고 있었다.


1953년, 라틴 컵 결승에서 랭스는 AC 밀란을 완벽히 무너뜨렸다. 그것은 랭스의 업적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축구계에도 큰 승리였다. 이전 세 차례 결승에서 리게 1 클럽들이 모조리 무너졌기 때문. 1950년 보르도는 벤피카에 패했고 이듬해 릴은 밀란에 5골이나 허용하며 무너졌다. 직전 해에는 바르셀로나는 니스를 한 골 차로 이겼다.


결승은 리스본의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에서 펼쳐졌으며 배토 감독은 코파를 중원에 배치했다. 전 시즌 대부분을 이 자리에서 뛰었으며 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코파는 30분 즈음 골을 터뜨렸고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후반이 재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드맨 브람 아펠이 한 골을 추가했고 이에 질 세라 코파가 15분 남은 시점에 로쏘네리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코파는 대회 최다 득점 2위에 올랐고 이를 통해 그는 유럽 대회에서 성공을 꿈꾸게 됐다. 비록 그것은 희망과 기대로 시작해 마침내 실망으로 마무리됐지만.


랭스는 1953년과 1955년, 두 번의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다. 그리고 마지막 해 우승으로 랭스는 처음으로 열리는 유러피언 컵 출전 자격을 얻는다. 그 즈음 코파는 대표팀 감독 피에르 피바로의 부름에 레 블뢰 데뷔도 이룬 터. 후에 배토는 프랑스 대표팀 선장 자리도 이어받는다. 라틴 컵에서의 성과에 이어 코파는 프랑스의 푸른 셔츠를 입고 피레네산맥 이남에도 그 신기를 선보였다.




1955년 3월 17일 프랑스는 스페인과 친선전을 벌인다. 당시 레 블뢰에는 코파 외에도 랭스의 수비수 로베르 종케, 주장 로제르 마쉬를 비롯, 전방에 르네 블리아, 레옹 글로바키 등이 코파의 플레이로 수혜를 누리고 있었다.


라 로하에도 여러 선수들이 레알 마드리드뿐 아니라 대표팀의 중추로 활약하고 있었다. 루이스 몰로니, 마르코스 알론소(마르키토스), 라파엘 레스메스, 미겔 무뇨즈와 엑토르 리알 등이 이에 속했다. 그 당시엔 아무도 몰랐으나 1년 후 코파 역시 로스 블랑코스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친선전은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홈 스타디움, 차마르틴에서 열린다. 그 시절에는 이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미 몇 개월 전 로스 블랑코스 홈구장 이름을 당시 회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 그대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바꾸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 경기장은 코파의 새로운 홈구장이 되기도 한다.


이 경기는 우연이든 미리 설계된 것이든 그를 지켜보는 스페인의 팬들, 미디어, 레알 마드리드 관계자 등 모든 이들에게 코파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됐고 결과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전달됐다. 선제골은 경기 시작 10분 만에 라 로하와 애슬레틱 클럽의 주장인 아구스틴 가인사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코파는 레 블뢰가 벌이는 인형극을 지휘하는 인형술사와도 같았다.


그가 하프타임 10분 전 동점골을 터뜨린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후반전도 코파가 경기를 지배하는 양상으로 이어졌고 장 뱅상이 훌륭한 마무리로 프랑스의 승리를 이끄는 골을 터뜨렸다.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프랑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튿날 마르카는 코파의 활약을 칭송했고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칭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와 스타드 드 랭스 선수들이 만난 것은 이 친선전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경기에서였다. 바로 이듬해 6월 13일, 초대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두 팀이 맞붙었던 것. 그러나 그 즈음 코파는 여전히 랭스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


지금에야 챔피언스리그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대회지만, 당시 초대 유러피언 컵은 각 리그 우승팀이 출전하는 것이 아닌 프랑스의 레퀴프 지가 초청한 팀들이 출전하는 구조였다.


심지어 당시엔 팀들이 거부하는 사태도 있었는데, 잉글랜드 챔피언 첼시 같은 경우 당시 FA는 권고에 의해 초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새 대회에 맞춰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대회 1라운드는 우연이 아닌 주최 측이 직접 고르는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세르베테를 쉽게 제압하고 2라운드에서 파르티잔 베오그라드를 상대로 홈에서 4-0 승리, 원정에서 0-3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준결승에 올랐다. 그리고 AC 밀란을 맞이해 홈에서 4-2로 승리한 덕에 산 시로에서 1-2로 패했음에도 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랭스는 첼시 대신 출전한 덴마크 클럽 오르후스를, 뒤이어 마찬가지로 부다페스트 혼베드의 대체 출전 클럽인 뵈로스 로보고(현 MTK)를 꺾었다. 1,2 차전 합산 총 14골이 터지는 다득점 시리즈. 스코틀랜드의 히버니안을 도합 3-0으로 꺾은 랭스는 파리의 파르크 드 프랭스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맞이하게 된다.







대회 내내 코파는 훌륭한 활약을 펼쳤으나 결승전에서는 득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단순히 골 여부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파는 랭스가 결승까지 이르는 동안 수없이 멋진 플레이를 펼쳤다.


레알 마드리드는 오랫동안 코파를 탐냈고 1년 전 스페인과 프랑스 간 A매치는 코파가 레알 마드리드 스쿼드에 아주 유용한 조각이 될 것이라는 전조에 불과했다. 그 경기에서 코파는 우월한 테크닉을 펼쳐 보였고 스페인 언론은 코파를 두고 플레이메이킹의 대가이며 정말로 탁월할 뿐 아니라 최고 레벨의 선수라고 표현했다.


스페인의 수도에서 열렸던 A매치와는 별개로, 코파는 프랑스 대표팀에서 23경기 출장 13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코파에 로스 블랑코스의 흰 유니폼을 입히기로 결정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적건은 두 팀 간 초대 유러피언 컵 결승전이 펼쳐지기 며칠 전에 완료됐다. 이적료는 3만 8천 유로로 전해진다.


이런 경우는 현대 축구에서도 흔치 않지만, 당시에도 용인될 리 만무했다. 그가 옮겨갈 구단을 상대로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따를 수많은 물음표와 비판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토 감독은 결승전 라인업에 코파를 넣을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여태 코파는 랭스의 얼굴이었으며 팀에 대한 헌신적인 면에서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선수였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배토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랭스가 10분 만에 두 골을 때려 넣은 것. 코파는 인상적인 폼과 다이렉트 플레이, 랭스의 공격을 조립하고 가다듬는 역할 모두를 펼쳐 보였다.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좀처럼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은 헛된 기대였다.


두 골을 실점하고 불과 4분 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는 랭스의 수비진을 뚫어내고 만회골을 터뜨렸다. 전반 30분 엑토르 리알이 게임을 원점으로 돌리는 골을 터뜨리자 난공불락이었던 랭스의 리드도 깨져버렸다.


하프타임 즈음 경기는 다시 균형을 이룬 상태. 코파가 건재한 상황에서 배토 감독은 랭스가 골을 더 넣을 수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스 블랑코스가 응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후반에도 점수가 더 날 것이란 것. 후반 15분 다시 랭스가 리드를 가져갔다. 왼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미셸 히달고가 정확히 머리로 꽂아 넣은 것. 20년 뒤 전설적인 ‘매직 스퀘어’를 이끌고 프랑스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끈 그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기치 않은 득점이 터졌다. 수비수인 마르키토스가 공격에 가담했고 넘어지면서 거의 볼을 다룰 수 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든 건드린 공이 골키퍼 르네 자케를 뚫고 희한하게 골네트를 출렁였다. 랭스는 두 번이나 리드를 잡았고 한 번은 2점 차 리드였다. 유러피언 컵 우승이라는 꿈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두 번의 리드를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다. 축구에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더는 랭스에게 찬스가 오지 않았고 경기가 10분 남짓 남은 시점, 리알이 레알 마드리드의 네 번째 골을 터뜨리며 첫 리드를 안겼다. 그리고 승부는 갈렸다. 랭스는 좌절했고 코파의 꿈도 무너졌다.


당시 코파가 얼마나 대단했느냐고? 결승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6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그의 꿈을 막아선 레알 마드리드의 주역들과 경쟁하면서도 말이다. 이것이면 충분한 설명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코파는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비난들과 마주했다. 레알로 이적을 두고 그나마 나은 비판은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더욱 심하게는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는 랭스가 득점한 세 차례 상황에 모두 관여하며 전방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그를 물고 늘어졌던 미겔 무뇨스의 존재로 고통받던 와중에도 말이다. 따라서 코파에 대한 비판은 확실히 얼빠진 자들의 주장이었으며 우승의 실패에 따른 병적이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매우 달랐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뛴 3년 동안 코파는 매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랐고 모조리 우승했다. 라리가 우승도 2번, 마지막으로 열린 1957년 라틴컵도 벤피카를 1점 차로 꺾으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총 100경기 정도를 뛰었고 약 30골 정도를 기록했다. 스타들로 수놓였던 당시 로스 블랑코스의 스쿼드를 생각하면 다소 적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드리블과 다이렉트 플레이, 크로스들이 레알의 뛰어난 동료들의 골을 도왔단 것은 응당 언급돼야 할 것이다.








코파 스스로도 레알에서의 소중했던 시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코파 커리어의 하이라이트가 레알 마드리드 시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코파 또한 “나는 유럽 최고의 팀에서 뛰었었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레알 시절이 코파에게 있어 영광의 나날이었다지만, 시작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클럽에서의 첫날, 앞으로 다가올 성공의 징조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첫날이란 힘든 법. 만약 당신이 새로운 마을에 이사 온 아이라면 이미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스타들 사이로 들어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테니까. 레알 마드리드에 도착한 첫날, 코파는 디 스테파뇨가 신발 끈을 매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을 봤다. 그에게 인사를 건넬 기회라고 생각한 코파는 새 동료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알프레도는 그를 피해버렸다. 코파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거나 혹은 자신이 여전히 이 클럽의 주인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었을지도. 여튼 그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완전히 코파를 무시한 셈이 됐다. 그것은 무언의 비난인 셈이었으나 나중에는 완전히 잊혀졌다. 두 선수는 피치 안팎으로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1956년 10월 4일, 레알 마드리드는 새 선수를 팬들에게 선보이는 차원에서 프랑스 클럽 소쇼와 경기를 주선했다. 레알은 14-1이라는 스코어로 상대팀을 유린했고 코파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2주 뒤 열린 레알 하엔과 경기에서 라리가 데뷔전을 치른 코파는 라몬 마르살, 디 스테파뇨, 엔리케 마테오스, 헨토와 전방에 포진, 한 골을 넣으며 7-1 대승을 이끌었다.


이는 레알이 따낼 리그 타이틀의 서막에 불과했다.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를 승점 5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일궈낸 것. 레알에서 첫 시즌에 코파는 하엔과 경기를 포함, 22경기에 출전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오사수나, 바야돌리드 전에 득점했고 긴장감이 감도는 빌바오의 산 마메스에서도 골을 넣었다.


유러피언 컵 우승도 빼놓을 수 없다. 대회 초반 1라운드, 레알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라피드 빈과 무승부를 거뒀던 것. 홈에서 4-2 승리를 거둔 데는 코파의 활약이 있었다. 디 스테파뇨와 마르살이 두 골씩 집어넣으며 승리를 인도했다. 그러나 비엔나 원정에서 레알은 악몽을 맞이했다. 전반이 끝나기도 전에 에른스트 하펠이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것. 다행히도 디 스테파뇨가 후반전에 한 골을 넣어 플레이오프까지 끌고 갔다. 10만 명이 운집한 베르나베우에서 로스 블랑코스는 코파가 넣은 두 번째 골을 포함, 2-0으로 승리하며 도합 7-5로 힘겹게 2라운드로 진출했다.


8강 니스전은 비교적 수월했다. 측면에 위치한 코파의 효율적인 플레이가 돋보였고 홈에서 손쉽게 3-1로 승리했다. 프랑스 원정도 3-2로 이겼다.


4강 상대는 새롭게 떠오르는 버스비의 아이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1년 뒤 비극적인 뮌헨 항공 참사로 부침을 겪게 되는 그 팀 말이다. 결과적으로 홈에서 거둔 3-1 승리가 빛을 발했다. 맨체스터 원정에서 코파는 디 스테파뇨의 백힐 패스를 받아 맨유 골키퍼 우드를 뚫어냈다. 이어 리알이 한 골을 추가했고 맨유도 2골을 넣으며 분전했으나 경기는 무승부로 마무리됐다. 레알 마드리드는 2연속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을 이뤘고 이제 코파는 붉은색이 아닌 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결승전 상대는 피오렌티나. 장소는 베르나베우로 레알 마드리드에 약간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 시작 전 다소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레알은 1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세계 최고의 야간 조명등 시스템을 구비한 상태였다. 그러나 비올라 구단은 낮에 경기를 치르고 싶다며 홈구장 관계자들을 격분시켰다. 결국 오후 5시 30분에 킥오프를 하기로 결정됐다. 어쩌면 이것이 결승전에 감돈 진지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었을지도.


네덜란드 주심 레오폴드 호른이 시작 휘슬을 울리자 곧 경기 곳곳에서 이 경기가 재능을 다투는 대결이라기보단 서로를 갉아먹는 소모전과 도발로 가득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리적인 요인들은 홈 팀에 득 될 것이 없었고 경기는 득점 없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경기의 분기점에 도달한다. 엔리케 마테오스가 피렌체의 페널티 지역에서 넘어진 것. 호른의 손은 망설임 없이 페널티 스폿을 가리켰다. 피렌체 수비수들은 격분했다. 오프사이드 순간 두 명의 부심이 모두 기를 들었고 파울 상황은 페널티 박스 밖에서 이뤄졌다면서 말이다. 현재도 전해지는 이 경기 영상을 봤을 때, 아무래도 선명하지 못하긴 하지만 적어도 두 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12만 4천 명의 팬들은 페널티 킥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고 호른 주심의 결정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디 스테파뇨가 로스 블랑코스에 리드를 안겼다.


그전까지 경기 페이스와 양 팀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면, 이제 강도를 당하고 의분을 느낀 비올라 덕에 경기의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이런 상황 속에선 냉정함을 찾는 쪽이 우세하고, 코파는 그런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 6분 뒤 코파는 차분하게 헨토가 두 번째 골을 넣도록 도왔다. 레알 마드리드는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코파도 첫 유러피언 컵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듬해에도 성공은 계속됐다. 아르헨티나 출신 새 감독, 루이스 카닐리아 밑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코파는 여전히 팀의 핵심이었다. 역시나 타이틀도 따라왔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3점 차까지 추격했으나 레알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진 못했다. 코파는 전체 30경기 중 27경기에 출장했으며 8골을 넣었다. 그중 하나는 그의 생일날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터뜨린 헤딩골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고 두 개의 도움까지 곁들였다.


로스 블랑코스의 유러피언 컵 여정은 10월의 마지막 날부터 시작됐다. 로얄 앤트워프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뒀고 홈에선 6골을 되돌려줬다. 코파도 페널티 킥으로 득점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6골이 대단해 보인다고? 8강에서는 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세비야를 홈으로 불러들여 코파의 두 골을 포함, 8골로 폭격한 것. 안달루시아에서는 2-2로 비겨 손쉽게 준결승으로 향했다. 다음 상대는 헝가리의 바사스. 마드리드에서 열린 1차전에서 4-0 대승을 거둔 덕에 로스 블랑코스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차전 0-2 패배에도 결승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코파와 함께 레알은 3회 연속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올랐고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의 AC 밀란과 마주했다. 예상대로 팽팽한 경기가 벌어졌고 전반은 득점 없이 끝났다. 그러나 60분 즈음 이탈리아 팀이 리드를 잡는다. 주인공은 밀란이 우루과이의 페냐롤에서 5200만 리라에 데려온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였던 스키아피노가 박스 바깥에서 골로 돈값을 했다.


15분 뒤, 호세이토가 우측면에서 두 명의 밀란 수비수를 따돌리고 날린 크로스를 디 스테파뇨가 마무리하며 균형을 이뤘다. 단 15분이 남은 상황, 이제 다음 골은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3분 뒤 밀란의 에르네스토 그릴로가 후안 알론소 골키퍼를 뚫어내고 골을 기록, 리드를 잡았다.


하지만 레알이 따라가는 데는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박스 안으로 코파가 절묘하게 패스를 찔러 넣었고 리알이 마치 한 몸인 듯 부드럽게 마무리했던 것. 공격수가 찬스를 날려버리면 제아무리 훌륭한 어시스트라도 묻혀 버리지 않겠나? 레알은 다시 동점을 만들었고 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 컵 결승전은 연장으로 돌입한다.

두 팀 모두 현격하게 체력이 떨어졌던 상태였고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예기치 않은 수비 실수에서 나왔다.


헨토가 날린 슛은 수많은 밀란 수비수들의 발을 피해야만 했고 골문의 나르시소 솔단도 뚫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 슛은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았고 운 좋게 네트로 빨려 들어갔다. 레알 마드리드가 사상 세 번째 유럽 챔피언이 되는 순간, 코파도 이제 두 개의 메달을 목에 걸며 마드리드가 대륙의 주인임을 알렸다.





 



그러나 다음 시즌, 스페인에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엘레니오 에레라의 바르셀로나가 레알을 4점 차로 따돌리고 라 리가 타이틀을 탈환했던 것. 이듬해에도 바르셀로나가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때 코파는 스페인을 떠난 상태였다. 어쨌든, 블라우그라나에 리그 타이틀을 뺏겼어도 코파의 1958-59시즌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걸작, 헝가리 출신 페렌츠 푸스카스의 영입으로 더 빛나게 될 모양새였다.


코파는 1953년 웸블리에서 푸스카스가 이끄는 매직 마자르가 잉글랜드를 꺾었을 때 현장에 있었다. 당시 무적처럼 여겨졌던 잉글랜드는 과장됐다는 것이 만 천하에 알려졌고 사방으로 몰아치는 광풍에 삼사자 군단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이 경기는 코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푸스카스가 스페인 땅에 닿자 그의 오랜 팬이었던 코파는 마치 꿈이 이뤄진 듯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제 코파, 리알, 디 스테파뇨, 푸스카스, 헨토로 이어지는 공격진을 갖췄다. 면면만 봐서는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서로 간 호흡은 잘 맞지 않았다. 리알은 인사이드-라이트 역할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고 코파가 그의 영웅 푸스카스와 함께 뛴 경기는 11차례 밖에 되질 않았다. 이 시즌은 코파의 레알 생활에서 유일하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시즌인데, 그에 반해 10골을 넣는 등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경기는 아틀레티코와 마드리드 더비였을 것이다. 경기 막바지에는 로히블랑코스의 수비 추초, 카예호, 골키퍼 파조스를 모두 농락하며 쐐기를 박았는데, 얼마나 자빠져댔던지 그들에게 매트리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뭐, 리그 타이틀은 내줬을지라도 유러피언 컵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1959년 6월 3일 슈투트가르트의 네카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은 코파에게 있어 특히 기억할만한 순간으로 남았다. 아틀레티코전 활약 이후 몇 주 지나지 않아 그가 발롱도르를 수상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프랑스 풋볼 기자단이 독일 공격수 헬무트 란과 코파의 대표팀 동료 쥐스트 퐁텐을 제치고 코파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던 것. 더구나 스타드 드 랭스 소속이었던 퐁텐은 코파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데려온 자원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리는 결승전에서 만날 터였다.


로스 블랑코스가 결승으로 향하는 여정은 베식타슈와 1라운드부터 시작됐는데, 코파는 레알에게 중요한 리드를 안기는 두 번째 골을 터뜨려 무승부로 끝난 이스탄불 원정을 다소간 편하게 치를 수 있도록 했다. 8강 상대는 비너 슈포르트 클럽. 1차전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득점 없이 비기며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까다로운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내 스페인으로 돌아와 180도 바뀐 모습을 선보였다. 전방의 5명의 공격수들이 무려 7골을 합작해 냈으니까.


이제 빅 이어까지는 네 팀만이 남았다. 라 리가 혈투에 이어 도시 라이벌 아틀레티코를 4강에서 만났으니 가히 또 다른 결승전이라고 할 만했다.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승부였으나 그 주인공은 푸스카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존재는 승부를 결정지을만한 핵심요소였다.


홈에서 치른 1차전, 12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베르나베우에 운집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추초가 13분 만에 골을 넣으며 홈팬들에 침묵을 선사했다. 마치 코파에게 놀아났던 지난 맞대결에 대한 복수와도 같달까? 하지만 2차전이 열리는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로 향하기 전, 리알이 동점을, 푸스카스가 얇디얇은 리드를 안겼다. 코파가 부상으로 결장한 레알은 그의 유려한 기술을 그리워하며 단 1골 차 리드에 만족해야만 했다.


카닐리아 감독은 2차전에 코파를 다시 불러들였으나 쐐기를 박을 기회는 없었다. 아틀레티의 엔리케 콜라가 전반 종료 직전 팀에 선제골을 선사했고 이제 양 팀의 합산 스코어는 동률이 됐다. 혹여 홈팀이 한 골이라도 넣는다면 레알은 그대로 탈락인 상황. 다행히도 추가 득점은 없었고 두 팀의 운명은 일주일 뒤 열릴 플레이오프에서 결정된다.


6일 뒤, 중립 구장인 레알 사라고사의 라 로마레다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렸다. 이제 뒤는 없다. 코파는 다시 라인업에 복귀했고 로스 블랑코스의 5인방이 가동될 모양새였다. 이 라인업이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날 만큼은 제대로 적중했다. 16분 만에 디 스테파뇨가 선제골을 터뜨려 리드를 안겼다. 아틀레티도 2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콜라가 동점골로 응수했다. 승부는 전반이 채 끝나기 전에 갈렸다. 다소 논란이 있는 페널티킥을 얻어낸 푸스카스가 균형을 깼던 것. 이제 레알은 4회 연속 유러피언 컵 진출의 역사를 쓴다.




이번에 마주한 상대는 스타드 드 랭스. 이 팀엔 10골로 대회 최다 득점자였던 쥐스트 퐁텐이 있었고 그는 사상 두 번째로 유러피언 컵 정상을 노리는 배토 감독이 이끄는 팀의 핵심이었다. 만약 두 클럽 간 1956년 결승전이 끝까지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공격 축구의 연회장이었다면 이번 결승은 사뭇 달랐다. 랭스는 대회 내내 단 13골에 그쳤으나 퐁텐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랭스에겐 아쉽게도 결승에서는 불발에 그쳤다.


레알 마드리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푸스카스가 부상으로 선발로 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카닐리아 감독은 엔리케 마테오스라는 믿을만한 대안이 있는 행운아였고, 푸스카스 대신 마테오스를 결승전 라인업에 넣었다. 그리고 이른 시간, 마테오스는 감독의 믿음에 보답한다.


마테오스가 왼쪽에서 공을 받고 박스 안으로 잘라 들어가 랭스 골키퍼 도미니크 콜로나를 뚫고 골네트 구석을 가르는 데는 10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1956년 결승에서 로스 블랑코스는 경기 종료 직전까지 승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초반부터 앞서나갔으며 전반전부터 경기를 가져오고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마테오스가 페널티 구역에서 혼자 넘어졌지만 독일 출신 알버트 두쉬 주심은 약간 망설였고 페널티 스폿을 가리키는 어설픈 판정을 내리고야 만다. 푸스카스 대신 선발로 나선 마테오스가 키커로 나섰으나 콜로나 공을 막아내며 랭스가 피운 희망의 불씨를 지켜낸다.


장 뱅상이 코파를 향해 거친 파울을 했고 부상으로 코파가 잠시 필드를 떠나자 전황은 다시 랭스 쪽으로 기운다. 얼마 안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남은 시간 코파는 거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후에 카닐리아는 ‘내 생각에 코파는 부상이라기보단 헌신적으로 뛰어야 할 열망 대신 적당히 뛰며 편하게 승리를 쟁취하는 데 마음을 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견은 그 해 결승전 후 코파의 부진에 따라 어느 정도 신빙성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확실히 1956년 결승전 이후 코파가 팬들, 전문가들로부터 받았던 비난만큼이나 그 정도가 컸다.


하프타임 브레이크 이후, 그 문제는 디 스테파뇨의 골로 일단락됐다. 랭스는 분투했으나 레알은 강력한 수비를 구추갛고 있었고 퐁텐은 공포탄을 쏠 뿐이었다. 결국 레알 마드리드는 사상 네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코파 역시 세 번째 메달을 쟁취한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코파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레알은 여전히 그를 원했고 급료를 인상하는 등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코파 커리어에서 이제 돈은 문제를 결정지을만한 요소가 아니었다. 코파는 “레알에서 보낸 3년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라며 스페인 수도에서 뛰는 동안 최고의 축구를 선보였다. 하지만 앙제 시절 동료의 여동생인 그의 부인은 스페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것이야말로 코파를 움직인 중요 요인이었다.








103차례 공식경기에서 30골을 넣었고 수많은 메달과 상들을 쟁취한 코파는 이제 짐을 싸고 레알과 작별을 고했다. 그가 향한 클럽은 그 스스로 슈투트가르트에서 좌절을 안긴 클럽, 옛집인 스타드 드 랭스였다.


27세에 다다른 코파였지만 아직 베테랑이라고 불릴만한 정도의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스페인에서 주전으로 뛰던 시절의 기량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이후 스타드 드 랭스 소속으로 8시즌을 뛰고 1960-61, 1961-62시즌 연속 리그 타이틀을 팀에 선물한다. 이후 팀은 쇠락의 길을 걷고 2부 리그로 강등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코파가 팀에 있었고 2부에서 두 시즌 뒤 그들은 1965-66시즌 2부 리그 챔피언에 오르며 승격에 성공한다. 1967년, 그의 36세 생일을 조금 앞두고 은퇴하기 전, 코파는 랭스에서 1년을 더 함께 한다. 그의 클럽 커리어 내내 그는 600경기에 단 8경기 모자란 592경기를 뛰었으며 139골을 넣었다. 그가 다른 이들의 골을 도운 것은 통계적으로 기록되진 않았으나 아무리 못해도 그가 스스로 골을 넣은 만큼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음은 틀림이 없다. 사실 충분히 그 두 배가 되고도 남는다.


프랑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그는 국제 무대에서 45경기를 뛰었으며 18골을 넣었다. 월드컵도 뛰었는데, 랭스에서 뛰던 1954년 스위스에도 나갔고 4년 뒤, 레알에서 뛰던 1958년에도 스웨덴 땅을 밟았다. 프랑스는 1958년 대회에선 3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당시 최강팀이던 브라질에 패하기도 했다. 랭스의 충직한 수비수인 로베르 종퀘는 브라질의 바바와 충돌하여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당시 스코어는 1-1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축구엔 교체라는 개념이 없었고, 10명이 싸워야만 했다. 팀에 투지를 불어넣는 주장이자 견실한 수비수가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어린 펠레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2-5로 패했다. 프랑스가 넣은 골 중 하나는 랭스 동료 퐁텐이 넣었는데, 해당 대회에서만 13골을 넣으며 오늘날에도 한 대회 최다골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중 7골이 코파의 압도적인 기술 속에 태어났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짧은 기간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그처럼 타고난 능력이 남달랐던 대부분의 위대한 선수들이 그랬듯, 별 볼 일 없는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그는 축구와 관련된 활동을 모두 마치기 전까지 프랑스 대표팀의 조언자로도 활동했다. 말년에는 그의 어린 아들을 잃게 만든 암과 관련된 캠페인을 위해 그의 트로피들을 경매하는 등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기도 했다.








2017년 3월, 레이몽 코파는 앙제에서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프랑스는 이 날 조국의 진정한 스포츠 영웅 하나를 잃었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한 남자는 장장 18년 동안 빛나는 활약을 펼치며 화려한 커리어를 남겼다.


처음에 그는 랭스라는 갓 전성기를 맞은 클럽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유럽 챔피언의 자리까지 한 발자국이 모자란 비운을 겪었다. 이후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50년대 후반 위대한 자취를 남겼고 유럽 대륙의 패자로 떠올랐다. 레 블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치 밖에서 코파는 여타 성공적인 스포츠맨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면을 자주 보여줬다. 그는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성공과 명성을 가져다줄 수 있던 스페인에서 생활을 청산했고 어린 자식의 생명을 앗아간 암과의 싸움을 위해 시간과 돈,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스포츠에서의 성공은 명예와 부를 가져다준다. 코파도 역시 위대한 스포츠맨의 반열에 응당 이름을 올릴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질 테지만 수많은 명예와 부, 그러한 것들을 아주 많이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대단한 스포츠맨이었는지에 관한 위상의 척도는 경기장에서 받은 수많은 찬사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얻은 영광을 다시 되돌려주는 방법을 통해 가늠되어야 한다. 코파는 그런 시험을 가볍게 통과했다. 바로 축구로 말이다.


코파가 작고하고 며칠 뒤, FIFA 회장 지아니 인판티노는 “축구계에 있어 매우 슬픈 날입니다. 레이몽 코파는 극히 이례적인 선수였고 많은 후대에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일생 동안 축구에 대한 헌신에 있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습니다”라며 경의를 표했다. 많은 이들은 FIFA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이 옳았다.




원문 링크

 | https://thesefootball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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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9-12-22 17:12:45

    글 잘 읽었습니다사실 호나우도 이전 시대 선수들에 대해선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잘 없어서 레이몽 코파는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는데 발롱도르 수상자에 랭스나 레알에서 거뒀던 성과들보면 후대의 플라티니나 지단만큼 위대한 선수였군요.

    OP
    2019-12-22 16:18:42

    저도 이름만 들었지 잘 모르는 분이라 한 번 찾아봤네요ㅎㅎ

    2019-12-22 22:50:29

    이름은 익숙한데 잘 모르는 선수였는데 양질의 글 정말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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