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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의 몰락과 재도약 과정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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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8-17 10:46:12

2020년도 현 시점에서는 구단의 명성, 꾸준한 성적, 재정적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명실상부 독일 내 넘버 투로 인정받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축구단으로서 또 FC 바이에른 뮌헨과 같이 부채없는 건강한 경영도 대표적인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팀은 불과 약 15여 년 전만 하더라도 산소호흡기에 생명을 연명한 채 파산선고를 기다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팀.. 100여년에 이르는 구단의 역사가 모조리 잿더미가 될 뻔한 사연은 무엇이며 또 그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 재도약을 넘어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되었는지 그 사연은 대단히 장대합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오랜 침체기를 거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도약한 것은 1990년대.. 이탈리아 세리에 A에 진출했던 독일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비싼 이적료를 들여 대거 자국으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도르트문트로 이적해온 인물로서는 슈테판 로이터, 마티아스 잠머, 칼-하인쯔 리들레, 안드레아스 묄러, 위르겐 콜러 등이 있었고 여러모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끝에 1990년대 후반 두 차례의 마이스터와 1996/97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더해 바이에른 뮌헨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죠. 정작 이 영광을 이끈 오트마 히츠펠트 감독은 그 직후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게 됩니다만..

 

이후 2000년대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도르트문트는 더욱 과감한 행보로서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두개의 탑' 을 이루는 것을 넘어 아예 바이에른 뮌헨을 앞서가고자 더 큰 모험을 단행합니다. 2000년 11월 30일 자로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1주 당 11유로에 상장되어 독일 축구클럽 중 처음으로 상장기업이 된 것.. 그리고 이에 따라 구단가치를 높이고자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대형투자를 계획하게 되고 이를 위해 상당한 부채를 끌어오게 됩니다. 대신 그 결과로서 토마스 로시츠키, 세바스티안 켈 영입전에서 연이어 바이에른 뮌헨에 승리함으로서 독일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다주는가 하면, 당시 세계축구계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던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득점왕이던 브라질리언 골잡이 마르시오 아모로소를 무려 2,500만유로에 영입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이 것은 2009년 바이언이 마리오 고메스를 3,300만유로에 영입하기 전까지 무려 8년 간 분데스리가의 리그레코드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투자였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얀 콜러, 선데이 올리세, 에워르톤, 토어스텐 프링스 등 분데스리가 기준으로 상당한 거물급 선수들을 연이어 영입한 도르트문트는 그 결과로서 2001/02시즌 마티아스 잠머 감독의 지휘 아래 다시금 마이스터를 차지했고, 또 UEFA컵에서도 4강전에서 AC 밀란을 격파하고 결승전에 진출, 페예노르트와의 명승부 끝에 아쉽게 2:3으로 석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죠. 이렇게 도르트문트가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해 영광의 시기를 누린 마지막 시즌은 2002/03시즌으로 볼 수 있는데 비록 해당시즌의 성과는 분데스리가 3위와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로 우수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라인업의 면모는 화려했습니다 : 

 

레만 - 에바니우손, 메첼더, 뵈른스, 데데 - 프링스, 켈 - 로시츠키 - 에워르톤, 콜러, 아모로소

 

당시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에서 '대세'였던 다이아몬드형 4-4-2 포메이션이 아닌 윙포워드를 활용하는 4-3-3 포메이션을 주력으로 활용했습니다. 골키퍼 독일대표팀의 '넘버 투' 옌스 레만을 필두로 신구조화가 잘 이루어진 수비진은 전 시즌 '전설' 위르겐 콜러가 UEFA컵 결승전을 마지막 무대로 다소 아쉽게 은퇴한 이후 2002년 월드컵의 '라이징 스타' 중 하나였던 크리스토프 메첼더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일대일 방어능력이 일품이었던 노장센터백 크리스티안 뵈른스와 호흡을 맞추었죠. 또 측면에는 브라질리언 두 선수가 배치되어 활약을 했었는데 특히 데데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특유의 공격능력 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안정감이 있던 공수밸런스가 좋은 풀백자원으로 바이에른 뮌헨으로의 이적설이 끊이질 않았고 이 외에도 세계 유수의 구단들과 연결되던 선수였죠. 또 베르더 브레멘의 공격수 아일톤과 함께 아무리 활약해도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발탁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타르의 오일머니 제안을 받고 귀화해 카타르 국가대표로서 활약하려 했던 적이 있는데 FIFA에서 제지하여 없었던 일이 된 사연도 있었습니다.

 

또 허리에서는 '6번' 켈 (실제 등번호는 5번), '8번' 프링스, '10번' 로시츠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짜임새가 있었고 공격진에서는 202cm의 장신공격수 콜러가 원톱으로 박스 내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우측의 에워르톤은 지금 선수로 치면 더글라스 코스타처럼 폭발적인 스피드를 주무기로 삼는 선수였고, 반대편의 아모로소는 기본적인 포진은 좌측면에서 하되 직접적인 득점에 많이 가담하는 선수였죠. 또 이적 첫 시즌인 2001/02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도 18골을 폭발시키며 세리에 A에 이어 또 다시 빅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또 콜러가 물론 농구선수로 쳐도 포워드 포지션으로 분류될 만큼의 장신이라 고공능력도 일품이었지만 이미지와 달리 공을 제법 잘 다루고 또 박스 안에서 움직임이 뛰어나 발로도 많은 득점을 성공시키고 동료선수들의 기회도 많이 파생시키는 은근히 다재다능한 면이 있는 공격수였죠.


이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2002/03시즌 성적이 다소 실망스럽기는 했지만은 그래도 차기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도 확보했고 여전히 분데스리가 우승권 전력을 유지하던 상황이라 앞으로 기대만큼의 성적이 나온다면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천재지변 급의 참사가 터집니다. 2003/04시즌을 준비하고 시즌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주축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것.. 줄줄이가 한 2~3명 실려나간게 아니고 베스트11 중에서 심할 때는 8~9명이 사라진 경기도 있었고 평균적으로 4~5명이 빠진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적시장에서 긴급히 공백을 매워줄 선수들을 몇몇 영입하고도 부족해 유소년 팀에서 더 키워야 될만한 선수들을 몇몇 올려 쓰는가 하면 당시 말테 메첼더라고 크리스토프 메첼더의 동생을 인맥영입했는데 워낙 쓸 선수가 없어 2~3부리그 수준의 이 선수까지 1군에서 기용을 했어야 될 정도로 전력이 열약해지고 말았죠.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본선무대라도 진출했으면 조금이라도 더 버텼을텐데.. 직전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막바지에 VfB 슈투트가르트에 2위 자리를 내어주는 바람에 3위로 밀려나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를 거치게 되었는데 한 수 아래 전력으로 평가되던 벨기에의 FC 브뤼헤를 만나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맙니다. 역시 줄부상으로 약해진 뎁스가 주 원인이었죠. 이 사태를 두고 정말로 천재지변 급 참사였다는 의견과 또 마티아스 잠머 감독이 그간 너무 주전선수들 위주로만 운영을 해온 탓에 그 휴유증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인재론이 대립하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 2003/04시즌을 6위로 수습해 마치기는 했지만 두 시즌 연속 챔피언스리그 무대 본선을 밟지 못하게 되었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상장 전후 도르트문트의 행보는 좋게 보면 과감한 투자였지만 그 이면은 '죽음의 외줄타기'에 가까웠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가 있는 것인데 바로 이 시점이 그 삐끗한 지점이었던 것이죠. 챔피언스리그 본선 무대를 진출함으로서 벌어들일 수 있는 최소 수천만 유로의 수익이 사라진 것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인건비라도 줄이고자 일부 선수들은 연봉을 삭감했고 또 아모로소는 합의 끝에 아예 자유계약 선수로 방출하게 됩니다. 2,500만유로의 이적료를 들인 선수를 3년 만에 방출해버린 것인데 그나마 고액연봉이라도 조금 줄이고자 하는 선택이었죠. 또 상품가치가 있는 주축급 선수들 중 일단은 토어스텐 프링스를 바이에른 뮌헨에 900만유로의 이적료에 긴급매각해 일단은 숨을 돌리고 2004/05시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선수영입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페예노르트에서 폴란드 국적의 공격수 에비 스몰라렉을 임대로 영입한 것 외에는 유소년 선수 몇 명을 1군에 승격시켜 뎁스숫자만 보충하는데 그쳤죠. 그 중 수비수 마르쿠스 브르젠스카와 미드필더 마크-안드레 크루스카가 1군무대에서 출전기회를 잡아 잠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사활을 건 2004/05시즌의 결과는 마찬가지로 리그 6위.. 또 다시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지 못하자 2억유로를 넘어선 부채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짜 파산으로 가느냐, 아니면 극적으로 회생하느냐.. 즉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00여년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했습니다. 일단 '한 때' 라이벌 구도를 맺었던 바이에른 뮌헨이 긴급자금 200만유로를 무이자로 빌려주어 당장 눈 앞의 부도를 막아섭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채는 산더미같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던 상황.. 이번에는 당시 도르트문트의 최대채권자였던 모건스탠리 사에서 일부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해 추가적으로 부채를 탕감했고 그제서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숨통을 틀 수가 있었죠. 이렇게 긴박했던 2005년은 도르트문트에게 잊고 싶은 기억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정말로 많은 교훈을 안겨다 준 시기이기도 했죠.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게 된 도르트문트는 2005년 여름이적시장에서 에워르톤 등 추가적으로 선수들을 대거 정리했지만 대신 스몰라렉을 완전영입하고 또 추가적으로 몇몇 선수들을 보강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화려한 선수들은 영입할 수 없었고 분데스리가 중위권 또는 중하위권 팀이나 영입할만한 자원들을 몇몇 보강하는 선에 그쳤죠. 수 많은 명문구단의 관심에도 의리를 지킨 메첼더, 데데, 로시츠키라던가 또 노장 뵈른스, 콜러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대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구단은 힘이 많이 빠졌고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감독도 팀을 '무난' 그 이상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하면서 이제는 중위권에서 버티는 것 이상은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2006년에는 로시츠키가 아스널로 이적했고 레알 베티스에서 '월드컵 반짝스타' 데이비드 오돈코어를 뜬금없이 650만유로나 주고 영입해가는 바람에 제법 쓸만한 돈이 생겼고 또 당시 모건스탠리 사로부터 15년 만기 조건으로 7,900만유로의 대출을 받아 재정상황을 어느정도 안정화 시키는데 성공한 차였기 때문에 그 이적료 중 다수를 재투자하여 이번에는 제법 쓸만한 선수들을 영입할 수가 있었죠. 스위스 국가대표 공격수인 알렉산더 프라이, 브라질리언 미드필더 팅가, 아약스의 '넘버 10' 스티븐 피에나르 등을 영입해 전력을 보충합니다.

 

그렇게 내심 챔피언스리그 재도전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2006/07시즌은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반 마르바이크 감독이 전반기 이후 물러났고 뒤이어 위르겐 뢰버 감독이 잠시 부임했다가 또 다시 물러나고 함부르크 SV를 이끌었던 토마스 돌 감독 체제로서 시즌을 9위로 마감하게 됩니다. 뒤이어 다음 이적시장에서는 믈라덴 페트리치, 야쿱 브와치코프스키, 로버트 코바치 등이 보강되었고 대신 메첼더가 자유계약 신분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게 됩니다. 이로서 영광의 시기를 누렸던 주축멤버 중에서는 데데와 켈 두 선수 만이 남게 되었죠. 그래도 중상위권까지는 노려볼만한 전력으로 평가되었으나 2007/08시즌은 되려 이전에 어렵던 시기보다도 더 좋지 않은 모습으로 후반기 중에는 구단에서 2부리그 강등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최종 성적표는 13위.. 돌 감독은 물러났고 바로 여기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구단의 역사가 바뀌는 선택이 있었습니다. 분데스리가 내 여러 상위권 구단들의 오퍼를 두고 저울질하던 위르겐 클롭 당시 마인쯔 감독이 최종적으로 도르트문트의 제안을 수락한 것.. '대단한 선택'이었죠.

 

한편 이 시기 도르트문트의 재정은 점점 더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Sporfive라는 스포츠 에이전시에게 5,000만유로의 급전을 받는 조건으로 추후 12년 간 도르트문트가 받는 광고료와 TV 중계권료의 18.5%를 내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올 여름에서야 드디어 이 계약이 끝나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 가치가 높지 않았던 도르트문트의 광고료나 TV 중계권료는 2010년대 이후 도르트문트 구단, 또 분데스리가 전체의 도약 속에 그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도르트문트는 손해를 제법 많이 보았고 Sportfive 사는 성공적인 거래가 되었죠. 그렇지만 당시 도르트문트의 사정에 5,000만유로의 급전은 도약의 큰 발판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이렇게 도르트문트가 빠르게 재정적 건강을 회복하는데 있어 일등공신으로는 한스-요아힘 바츠케 대표이사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경영학 석사학위를 보유한 인물로 경영담당자 중 한 명으로 일을 시작해 2005년 2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대표이사로 취임, 재정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데요.. 지금까지 15년 째 대표이사직을 이어오며 여전히 경영일선에 나서고 있죠.

 

아무튼 클롭 감독을 선임한 도르트문트는 취임선물로 네븐 수보티치를 필두로 패트릭 오보모옐라, 펠리페 산타나 등의 선수를 영입했고 또 이영표 현 KBS 축구해설위원 역시도 이 시기 도르트문트에 이적해 1년 간 활약한 적이 있었죠. 또 이 2008/09시즌 후반기에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유망주 마츠 훔멜스를 임대로서 영입하는데 어린 나이에 비해 괜찮은 활약을 해서 400만유로라는 적지 않은 이적료를 지불하고 완전영입을 하게 됩니다. 최종성적은 6위.. 이전 시즌에 비하면 나름의 반전을 일구어낸 만족할만한 성과였죠. 또 이듬 해에는 스벤 벤더나 루카스 바리오스와 같은 선수들도 영입을 하면서 가까운 훗날 충격적인 돌풍을 일으킬 멤버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죠.

 

그리고 운명의 2010/11시즌.. 그 준비과정에서 이룬 영입은 거창하지는 않았습니다. 폴란드 리그에서 웬 공격수를 영입했는데 그 이름은 로버트 레반도프스키.. 클롭 감독의 요청 속에 나름 오랜기간 공을 들여서 500만유로의 이적료에 영입을 했죠. 헤르타 베를린에서 원래는 공격수였다가 풀백으로 포지션을 전환한 선수인 우카쉬 피스첵을 뎁스용 선수로 영입했고 또 일본에서 카가와 신지라는 선수를 영입합니다. 일본 2부리그 득점왕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카가와의 부모님도 독일 2부리그 같은 곳으로 임대를 가던지 아니면 2군경기에나 뛸 것으로 생각했지 도르트문트에서 주전으로 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겁니다. 만약 이 때 카가와의 활약을 예측한 이가 있었다면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이거나 또는 단순 허세쟁이였겠죠. 즉 직전 시즌 분데스리가 5위의 전력에서 딱히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수준으로 평가받은 채 시즌을 맞이합니다. 당시의 라인업은 이러했습니다 :

 

바이덴펠러 - 피스첵, 훔멜스, 수보티치, 슈멜처 - 벤더, 사힌 - 괴체(브와치코프스키), 카가와(레반도프스키), 그로스크로이츠 - 바리오스

 

그런데 초반 기세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개막전 패배 후 분데스리가 7연승을 달리더니 14승 1무 2패로 전반기를 마감합니다. 훔멜스와 수보티치, 20대 초반의 애송이들로 구축된 센터백 라인은 대단히 안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빌드업 능력으로 공격까지 공헌하였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분데스리가 무대에 데뷔할 정도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터지지는 않던 미드필더 누리 사힌이 드디어 만개했죠. 게다가 2부리그에서 데려온 유망주 스벤 벤더는 적응기간도 필요없이 완숙한 플레이를 이어가며 켈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대체하고 나섰습니다. 여기에 마르첼 슈멜처도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였으니 바이덴펠러와 피스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막 성인이 된 선수들로 구성이 된 셈이었죠.

 

윗선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카가와는 앞서 언급했듯 엄청난 활약은 커녕 도르트문트에서 주전선수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 조차 장담컨데 한 명도 없었을겁니다. 그런데 프리시즌과 유로파리그 예선 등을 통해 특유의 감각적인 움직임을 활용한 위협적인 이선침투와 깔끔한 마무리 능력, 또 동료 공격수들과의 물흐르는 듯한 연계플레이까지 보여주며 클롭 감독의 눈도장을 찍더니 전반기에만 8골을 기록하는 소위 '로또'가 터지게 됩니다. 더구나 마리오 괴체.. 사실 이 선수는 유소년 시절부터 초엘리트였습니다. 프리츠 발터 금메달을 U-17과 U-18에서 두 차례 연속으로 수상했을 정도죠. 그렇다고 18살에 분데스리가에서 정상급의 활약을 보여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너무나도 간결하고 깔끔하게 '천재'라는 표현이 딱 걸맞는 플레이로서 공격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는 다소 투박하지만 공수양면에서 도저히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엄청난 활동량을 가져가며 많은 공헌을 합니다. 당시의 모습은 도르트문트의 박지성이었다고 하면 제법 어울릴 것 같습니다. 특히 클롭 감독의 전술에서 필요한 선수였죠. 아르헨티나가 조국이지만 파라과이 국가대표로 활약한 루카스 바리오스가 톱 자리에서 16골을 기록했고 후반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카가와가 부상으로 이탈해 시즌아웃이 되었지만 대신 레반도프스키가 이선 플레이메이커로서 활약하는가 하면 브와치코프스키와 같은 선수들을 잘 활용해 그 공백을 매웠고 결국 대부분이 예상치 못했던 마이스터를 9년 만에 추가하는데 성공했죠.

 

이듬 해 사힌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또 슈멜처에게 자리를 내어준 데데 역시 터키로 떠나면서 2000년대 초반을 함께 했던 멤버 중 또 한 명이 떠났습니다. 대신 일카이 귄도간을 영입해 사힌의 자리를 대체했고 이적 초기에는 자리를 못잡는가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해나가며 사힌의 공백을 지워나갔죠. 그러자 직전 시즌 마이스터 전력은 온전히 유지되었고 레반도프스키가 기량을 만개해 이제는 이선이 아닌 최전방에서 만능형 공격수로서 전형적인 '골잡이' 스타일의 바리오스를 밀어내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도르트문트는 2년 연속으로 마이스터를 품에 안게 됩니다. 또한 DFB-포칼 결승전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을 무려 5:1로 대파하며 큰 충격을 안겼죠. 다만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탈락이 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바로 한 시즌 후에 제대로 달랬죠.

 

이듬 해에는 카가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됩니다. 대신 묀센글라드바흐에서 마르코 로이스를 바이아웃 1,700만유로를 지불해 영입했죠. 바이에른 뮌헨도 이 선수를 영입하고자 했고 오히려 바이언 측에서 로이스의 영입을 확신하던 상황이었으나 이 선수가 도르트문트 유소년 출신인데다 바이언은 당장은 로이스에게 로베리의 백업역할을 맡길 요량이었던 반면 도르트문트는 사실상 주전보장이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로이스는 도르트문트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선은 괴체, 로이스, 브와치코프스키로 재편되었고 로이스라는 기술자가 추가되면서 그 날카로움이 더해졌죠. 또 지난 시즌 쌓아둔 귀중한 경험도 빛을 발하며 이번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무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합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레반도프스키가 무려 4골을 폭발시키며 완승한 4강전 경기는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주고 또 '게겐프레싱'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문제는 바이에른 뮌헨이 제대로 칼을 갈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직전 시즌 트리플러너업에다 그 중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을 모두 도르트문트에 밀린 바이언은 하비 마르티네스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결국 4,000만유로의 분데스리가 레코드에 영입하는 강수를 두고 또 단테, 마리오 만주키치와 같은 선수들도 영입해서 전력을 완성시켰고 그 결과 이번에는 도르트문트가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언에 밀려 2위, 또 DFB-포칼에서도 8강전에서 바이언에 패퇴, 가장 결정적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맞붙어 명승부 끝에 아르연 로벤의 한이 서린 결승골에 의해 패퇴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무관에 그치고 말았죠.

 

이후 괴체와 레반도프스키가 연이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공백을 헨리크 미키타리얀과 치로 임모빌레로 효과적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등 악재로 2014/15시즌에는 7위에 그친 바 있었고 그 결과 클롭 감독이 떠나게 되었죠.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서 꾸준한 성적을 내고, 또 분데스리가 전체의 호황과 같은 호재가 이어지며 연매출 4억유로를 찍는 팀이 되어 2015년 드디어 부채를 제로화시키는데 성공해 이후 바이에른 뮌헨과 같이 '무차입경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챔피언스리그에 꾸준히 진출해 매 시즌 많은 매출을 벌어들이고, 또 구단이 더 이상 잡기 어려운 사이즈의 선수는 최적의 타이밍에 최대한의 이적료를 받으며 매각하고, 그 돈을 일부는 구단의 여유자산으로 만들고 또 일부는 성공가능성이 높은 최고급 유망주를 사들여 또 수 배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선수로서 만들어내고, 그러면 또 그 선수들로 인해 좋은 성적이 나옴으로서 챔피언스리그에 계속 진출을 해 현금이 계속 쌓이고.. 그런 선순환 구조가 지속되는 환경까지 구축을 하는데 성공했죠. 실제 도르트문트는 2016년부터 4년 연속으로 매 이적시장마다 1억유로 이상의 이적료 수익을 얻고 있고 우스망 뎀벨레와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을 정리한 2017년도에는 무려 2억6천만유로의 천문학적인 이적료 수익을 벌어들인 바 있죠. 또 지금 보유한 선수 중에서도 제이든 산초와 엘링 홀란드는 '최소' 1억유로 이상으로 시작할 것이 유력합니다. 게다가 이런 육성성공사례가 이어지면서 전 세계의 특급유망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단이 된 것 역시도 엄청난 호재죠.

 

또 마지막으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서포터들입니다. 분데스리가는 물론 전 세계 축구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도르트문트의 서포터들인데요.. 오죽하면 홀란드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이 담긴 비디오를 홀란드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열광적인 팬들이 수많은 팬베이스를 이루면서, 또 팀이 좋을 때 뿐만 아니라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 또 벼랑 끝에 몰렸던 시기에도 변함없는 성원을 보냈던 것 역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라는 구단이 재도약 수준을 넘어서 역사 상 최고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까지 이 주제를 마무리하고 더 이상의 분데스리가 추억팔이 글감이 고갈되어 에필로그 격으로 옛날이야기를 조금 더 남겨볼까 합니다.. 제가 독일축구에 관심을 가진것이 2000년대 초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즐기던 위닝일레븐 4 게임에서 헤딩능력이 좋은 올리버 비어호프라는 선수를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비어호프는 프랑스 AS 모나코에서 뛰던 시절이라 그 플레이를 실제로 본 것은 2002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뿐이었습니다만.. 이후 MBC ESPN이 막 개국했을 즈음 우연히 본 경기가 2001/02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전 레버쿠젠과 리버풀의 경기였고 명승부 끝에 레버쿠젠이 4강전을 넘어 결승전까지 진출을 하는 과정에서, 또 당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각 언론에서 각국의 전력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독일팀에서는 미카엘 발락을 '녹슨 전차의 희망'으로 부각시키면서 자연스레 레버쿠젠 팀과 독일대표팀의 에이스였던 발락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고 때마침 2002년 월드컵 이후 발락이 이적한 바이에른 뮌헨의 팬으로서 본격적으로 입문을 했죠..

 

이렇게 이 판에 입문한 것 자체는 꽤나 오래 전 일이기는 해도 또 지금 제 나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겠고.. 아무튼 그 때는 분데스리가 경기 한 번 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가끔 공중파 스포츠뉴스에서 해외스포츠단신에 5초 정도 소개되는 수준이었고 스포츠케이블에서도 MBC ESPN이 프리미어리그를, 엑스포츠가 이천수의 스페인 진출을 계기로 프리메라리가를 잠시 해주었고 또 2002 국대 선수들이 많이 진출한 네덜란드리그가 ITV와 MBC 등을 통해 중계방송 되었지만 차두리 정도가 진출한 분데스리가 중계는 언감생심이었죠. 요즘도 소프캐스트 같은 해외축구 스트리밍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당시에는 것보다 훨씬 조약하고 각종 바이러스의 위협에 노출된 스트리밍 프로그램으로 주로 중국 CCTV5의 분데스리가 중계방송을 보곤 했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 인터넷 환경으로 해외망에서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받아보는 것은 엄청난 버퍼링을 감수해야해서 제대로 보기도 힘들었죠.. 그거라도 보겠다고 아웅다웅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소프캐스트같은 좀 좋은 프로그램도 나오고 인터넷망도 좋아지고 하면서 볼만해졌고 또 2010년대 이후로는 MBC 스포츠 플러스와 JTBC3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분데스리가 중계를 볼 수 있고 또 네이버 등지에서도 그 방송을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틀어주는 시대가 되었죠. 그런데 사실 제가 분데스리가를 더 많이 본 것은 오히려 그 시절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중계방송을 보기 편해진 요즘 시대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나 기회가 되는대로 보고 나머지 팀에 대해서는 사실 바이에른 뮌헨의 상대팀으로 맞붙을 때 보거나 하이라이트로 제한적으로 본 사항들에 대해서 파악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어 저도 요즘 분데스리가 정보는 파악이 잘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또 그 시절 국내 분데스리가 '정보통'으로 불리던 분들도 얼핏 기억이 나는데요.. 사커라인에서 분데스리가 전문기자로 계셨던 차상엽 기자님과 김태우 기자님.. 차 기자님은 당시 독일에 거주하며 현지사정에 능통하던 분으로최근까지도 국내 분데스리가 중계 해설을 꾸준히 하시는걸로 알고 있고 김태우 기자님은 지금은 모 언론사에서 야구팀 SK 와이번스 전담기자로 SK 팬들의 지지가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던 그 시절 분데스리가에 상당히 능통하셨던 분들로 기억이 납니다.. 또 올드축구팬이라면 기억할만한 후추닷컴라는 사이트에 Sammer6이라는 닉네임으로 양질의 분데스리가 컬럼을 기고하던 분 역시 상당한 식견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저 역시 이 분의 글을 통해 여러 배경지식을 얻을 수가 있었죠.. 아마 지금은 후추닷컴 사이트는 없어진걸로 아는데 그 컬럼들이 어딘가에 백업이 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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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3-29 08:09:42

0203 2차 조별리그는 진짜 죽음의조였죠.
밀란 레알 도르트문트

OP
2020-03-29 10:33:34

당시 레알 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보얀 격 유망주였던 포르티요한테 후반 추가시간 통한의 동점골 허용한 것이 아주 뼈아팠죠..

2020-03-29 08:45:22

늘 잘 읽고 있습니다.ㅎ 근데 2000년대 초반에 비어호프를 위닝으로 알고 팬으로 입문했다면 96유로와 98월드컵에서의 비어호프 - 클린스만 공격진은 뒤늦게 보셨겠군요. 비어호프가 전성기는 짧지만 98월드컵때 참 대단했는데 8강따리가 되어서 후대에는 좀 많이 묻혀서 아쉽죠..ㅎㅎ

OP
2020-03-29 10:36:52

사실 대부분 하이라이트로만 접했던 것 같습니다. 동점골과 연장 골든골로 영웅이 되었던 유로 96의 활약 상도 그렇고..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2002년 월드컵 직전에 국내방송에서 해외축구관련 다큐멘터리나 특집을 많이 방영해주었는데 여기서 봤었던 것 같네요..

2020-03-29 08:51:24

우선 추천 박고 시작합니다.... 추천 10개 찍을수있으면 찍어드리고 싶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2020-03-29 09:23:44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당시 도르트문트 파산위기는 해외축구관련뉴스를 잘 보내지않던 국내9시뉴스에도 나왓엇죠

2020-03-29 09:36:32

후추 말년에는 분데스팀 소개 칼럼이나 남아있었죠

2020-03-29 10:11:02

항상 글 잘 보고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루리웹에서 혹시 ps2시절에 위닝 패치 제작하셨던 분 아니신가요?

OP
2020-03-29 10:37:13

예전에 그랬던 시절도 있었죠..

2020-03-29 10:37:08

예전에 무슨 잡지 표지로 클롭과 돌트문트 선수들 함께 나온 사진이 하나둘씩 빨개지던 거 생각나네요 ㅠ

2020-03-29 11:10:32

추억의 선수들 이름도 많이 보이고(특히 스몰라렉ㅋㅋ) 도르트문트 역사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보니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2020-03-29 11:33:49

부탁드렸던 글 잘 읽었습니다~다소 시점은 뒷부분이지만..^^;

2020-03-29 11:53:19

도르트문트의 흥망성쇠와 재도약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요

2020-03-29 11:56:58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3-29 12:01:25

지금 제 나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겠고.. 

이미 들켰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읽은 기분이네여 감사합니다!

2020-03-29 12:03:03

뮌헨팬이 뮌헨 아니었으 도르트문트 망했다란 댓글을 어디선가 보고 궁금했는데

구체적인 금액은 처음 알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0-03-29 13:28:10

뮌헨이 그래도 리가에 형평성?에 도움을 주는 편인가보네요

로이스도 살라다가 안삿다고 들엇는데

OP
2020-03-29 14:07:57

결국 분데스리가가 경쟁력을 유지해야만 바이언의 경쟁력도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죠..

2020-03-29 13:29:31

잠머6님이.. 김.. 김..김 뭐시기 형님이셨는데.

후추닷컴 터줏대감인 김유석? 김유식? 님은 뭐하고 지내실려나... 유공 시절 조광래 시절 읊던거 생각해보면 연세가 60 넘으셨을텐데...

Updated at 2020-03-29 13:36:54

본문에 언급 안되던 선수 중에 한순간에 망해버린 크링에, 견실하게 해준 이름 기억 안나는 동유럽 플레이메이커(강등권 팀에서 왔었음)가 기억나네요.

 

처음 해축 관심가졌을때는 정말 화려한 라인업이었는데 5,6년 뒤에 보니 하위팀 에이스, 성장이 정체된 유망주, 변방리그 실력자 등으로 때운 외인구단에 데데, 뵈른스, 켈(+바이데)만 남은 구성이라 묘하게 신선했던...

OP
2020-03-29 14:11:19

사실 2000년대 중반 활약하던 크루스카, 크링에 이런 선수들은 한창 어려울 때 어느정도 역할을 해주기는 했었지만 그 실링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느낌이 있던 선수들이었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후자는 헝가리 국적의 타마스 하이날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단신의 건실한 플레이메이커였고 칼스루허가 1부리그에 승격했던 시즌에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도르트문트가 영입을 해서 클롭 초창기에 잠시 쏠쏠하게 써먹었던 기억이 있죠..

2020-03-29 14:02:39

 아재시구나...이런 역사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2020-03-29 15:39:31

쌈무님 분데스리가 글은 성지게시판이나 매치리포트로 이동해서 정리해 볼 수 있게 해야할거 같네요.

2020-03-29 16:04:28

대단히 흥미롭게 봤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0-03-29 16:12:58

후추닷컴 삶에 치여 잊고 있던 사이트네요..
중소규모 축구커뮤가 많이 명멸했죠

2020-03-30 01:21:14

늘 추천부터 박고 정독..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호펜하임, 묀헨글라드바흐 같은 팀들도 다뤄주실 줄 알았는데 아쉬워요ㅠㅠ

2021-08-25 09:52:27

아주 유익한자료.. 매우매우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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