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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이성계가 상대해야했던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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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03 17:04:38

 

독로강만호 박의 : 오늘날 북한의 강계 부근에 위치한 강의 만호로써 지역을 지배하던 토호 박의가 1361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성계가 사병 1천 5백을 이끌고 진압함. 박의의 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렇게 대단한 전력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 이성계의 데뷔전 상대.




홍건적 군벌 모거경, 반성 기타 등등 : 몽골인들의 나라인 원나라는 한 때 강대한 세력을 떨쳤으나 고려 공민왕 치세 시기에는 유목민 출신 지배층들 특유의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행정 관리 능력과 유목민 특유의 분할 상속 체제 하에서 분열하고 몰락하고 있었음. 원나라 칸들이 명목 상의 모든 몽골  칸 중의 칸으로써 몽골계 국가들의 수장 자리에 있긴 했지만 쿠빌라이 시기부터 이미 각 지역의 울루스(~~ 칸[한]국)들은 이미  원나라가 간섭하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였고 도리어 그러한 울루스들에게 원이 종종 공격받았을 정도로 원의 세력 약화는 뚜렷했던  상태.


그  틈을 이용해 양쯔강 이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족 반란군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은 이들이 주로 붉은 두건을  두른다는 이유로 이들을 '홍건적'(붉은 두건 도적떼)이라 지칭. 그러나 60만의 병력을 보유했던 진우량, 전성기에 30만 대군을  이끌었다던 장사성, 그들 모두를 박살낸 주원장과 같은 홍건적 군벌들의 세력 규모와 국가 체계를 고려할 때에 이들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라 삼국지로 치면 조조, 원소, 손책 등과 같은 쟁쟁한 지역 군벌 국가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음.


원은  저 한족 반란군들을 홍건적이라며 하나의 집단으로 싸잡아서 불렀지만 실상 홍건적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서로 분열되어 강남에서 누가  패권을 잡을지 세력다툼을 하던 별개 세력들에 가까웠음. 이러한 홍건적 군벌들 중, 송나라 왕을 자칭하던 한림아의 수하 모거경 등이  1, 2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한림아가 실질적으로 바지사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모거경을 비롯한 장수들의 독단적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려가 쇠락하던 국가임을 고려하면 홍건적의 한 일파가 쳐들어온 것 뿐이었음에도 고려 멸망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음.


박의의  반란이 있었던 1361년 동 년도에, 모거경, 관선생, 반성 등이 지휘하는 2~4만 정도의 군세가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안우,  이방실 등의 지휘관들이 이를 서경(평양)에서 저지. 그러나 2차 침공 시기에 무려 20만의 병력을 모아 고려를 재침한 이들은  철기(중장기병)만 5천에 달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강대한 군세였고 결국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은 파천함. 그러나  이들 홍건적들은 개경을 함락시킨 뒤에 개경에 주둔하며 약탈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였고 이는 고려 회생의 기회가 되었음.


고려  조정은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20만의 방어병을 간신히 끌어모은 뒤에 총사령관 정세운의 지휘 하에 개경 탈환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때가 이성계 커리어 출세의 실질적인 시작점.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 2천여명을 이끌고 탈환전에서 활약하며 적장 중 하나를 활로  저격하여 죽이면서 홍건적 궤멸에 전공을 세웠고 그 덕에 개경 탈환 이후 공민왕으로부터 공신 중 한 명으로 책봉되었음.


다만  고려가 모은 20만 군세는 원정군이 아니라 방어군이자 그것도 급조한 어중이떠중이 일반 백성들이었기에 장기간 운용할 수 없었던데다  고려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총사령관 정세운을 비롯 안우, 이방실 등의 지휘관들이 살해당하면서 도망치는 홍건적들을 추격할 여지가  없었기에 홍건적들이 퇴각하면서 벌인 약탈을 전혀 저지하지 못하였고 고려 관서(평안도) 지역은 그야말로 궤멸적인 피해를 당하였고  공민왕의 개혁 정책 동력은 여기서 사실상 상실된 것으로 여겨짐.




몽골 군벌 나하추  : 몽골인이며 원의 신하로써 만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지휘관 나하추(징기스칸의 휘하에서 활약한 명장 무칼리의 후손)는 원이  몰락하기 시작하자 야심을 품고 만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꾸리기 시작했는데 겉으로는 계속 원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긴 했지만 고작  10여년 남짓한 사이에 나하추는 만주 전역을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하는 것에 성공하고 5~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운용하는 강대한  군벌로 거듭남.


나하추는  고려 공민왕이 장악한 쌍성총관부령을 탈환하고자 고려인 출신으로 몽골에서 일하고있던 조소생 등의 협력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1362년, 고려 북방을 침공. 몽골과 여진 유목민 전사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기병 부대를 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하추의 군세는  만만치 않은 적수였지만 나하추의 군세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을 운용하던(5천~1만) 이성계가 이를 맞아 싸워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나하추를 퇴각시키는 것에 성공함.


다만  이성계 군세의 수가 너무 적고 이 패배 이후에도 나하추가 여전히 만주에서 강한 힘을 휘두른 것으로 보아 평야에서 대회전을 펼쳐서  나하추의 10만 대군을 이성계의 수천 병력이 궤멸시켰다는 내용은 과도한 포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열세에 놓인 이성계가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속적인 유격전 등으로 국지전을 거듭하여 나하추의 병력들을 갉아먹으며 제 풀에 지치게하여 철수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여짐.


여담으로 이성계가 훗날 최영의 요동 원정에 회의감을 품은 결정적인 원인들 중 하나가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나하추가 명에게 항복하면서 요동으로 가는 길목이 전혀 안전하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학계의 주장들이 있음.




원나라와 고려 부원배 세력 얼굴마담 덕흥군 왕혜  : 공민왕이 고려 조정 내의 부원배(친원파 세력) 거두 기철을 처형하자 기철의 누이로써 원나라 칸 토곤테무르의 아내인 기황후는  이에 격노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킨 뒤에 고려 왕실 종친이지만 원나라에서 살던 덕흥군 왕타스테무르(왕혜. 충선왕의 서자)를 고려  왕위에 앉힐 작정으로 1364년, 최유 등을 딸려보내 1만의 군세를 지원하여 고려를 침공하게 함.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가 규합한 병력이 그들을 가볍게 무찌르면서 덕흥군의 군세는 궤멸하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도망침. 기황후 시기의  원나라는 완전히 몰락해가는 국가 그 자체였으므로 그들이 다시 공민왕을 무너뜨리기 위한 병력을 보내기는 어려웠음.




고려/여진(?)인 군벌 삼선과 삼개  : 이성계와는 고종사촌 지간인 이들 형제는 여진족과 동북면 토착 고려인들에게 두루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성계 집안 출신 답게  동북면에서 원래부터 영향력이 있던 토호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수많은 여진족 전사들이 삼선과 삼개를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복종하였다고  전해짐.


이성계가  잇달은 성공으로 고려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동북면을 비워놓기 시작하자 삼선과 삼개는 1364년, 동북면 고려인들과 여진족  일부를 규합한 병력으로 동북면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는데 이성계가 곧 동북면으로 돌아와 병력을 모으고 반격하자 그대로 패주하여  여진족들의 땅으로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해짐.


빠르게  격퇴당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규모 면에서 큰 위협이 아니었거나 혹은 모은 병력은 많았지만 당시 동북면 여진족들은 이성계와 그의  가문에 엄청난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성계가 돌아오자 그들이 삼선과 삼개를 버리고 탈주하여 삼선과 삼개 형제가 패배한 것일  가능성도 있음.




원나라(1차 요동 원정) 주둔군과 기사인테무르  : 1370년, 당시 고려 조정 최강의 권신이자 원정 총 책임자였던 이인임이 주도했던 원정으로 실질적인 야전 주력군은 이성계의  전력이었지만 명목 상의 총사령관은 상원수 지용수였던 것으로 보임. 병력 규모는 기록 상 불명이지만 10만 남짓이었다는 설과 5만을  넘지 못하였다는 설이 존재.


공민왕  이후인 우왕 시기에 최영이 벌인 2차 요동 원정(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고려의 국운을 달달 긁어모아서야 간신히 원정군 5만을  모았다는 점 + 원정은 방어전의 최소 3배의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10만 대군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 혹은 정말로  10만 대군이었고 그것이 요동을 점령하고도 유지하지 못하여 어처구니없이 철수한 이유일 수도 있기는 함.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락하는 틈을 이용해 북방 영토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령 탈환 이후에는 아예 요동 정벌을 꿈꾸었으며 이를  위해 1370년으로부터 이미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압록강 너머로 병력을 보내어 원과의 국경 지대를 침략하였는데 원에서는 이에  대해 꾸준히 경고를 날렸으나 공민왕은 원과 몽골인들이 너무나 몰락하여 이에 제대로 반격하기 어려울거라고 판단, 그러한 경고를  꾸준히 무시하였음.


여러  반란, 홍건적의 침략, 왜구의 공세 시작 등의 이유가 없었다면 요동 원정은 훨씬 수월하고 빠르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고려 역시 쇠락해가는 국가였기에 이 원정은 상당한 시간을 소요로 하였고 마침내 1370년에 공민왕은 대규모 편제를 갖춘  병력으로 요동 원정을 명령, 이 때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 개인이 지휘하던 병력은 보병 1만에 기병 5천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충지인  우라산성(오녀산성)을 공격하는 핵심적인 선봉 부대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임.


이성계는  우라산성을 공략하던 도중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부하의 활을 빌려 70발의 화살로 적병 70명을 사살하면서 적의 사기를 크게  추락시켰고 결국 우라산성 함락을 성공시킴. 당시 원나라 요동부의 수장이었던 기사인테무르(공민왕에게 처형당한 기철의 아들)는 병력을  규합하여 이에 반격하였으나 지용수, 이성계 등에게 격퇴당하였으며 강행군 끝에 요동에 도달한 원정군은 비교적 손쉽게 요동을  함락시키는 것에 성공함. 이는 발해 멸망 이후로 한민족 계통 국가가 사실상 유일하게 요동을 장악했던 시점이기도 함.


그러나  전투 도중의 실수인지 적의 계략이었는지 요동성의 군량고가 불타버리면서 보급 문제에도 강행군으로 요동까지 진격한 고려 원정군은  요동 한 가운데에서 보급 불가 상황에 빠졌으며 고려 원정군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원정을 성공시킨 것도 현지 주민들에게 고구려의  후예라는 프로파간다로 그들을 설득하여 큰 저항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제와서 보급을 위해 현지 주민들을 약탈했다가는 순식간에  요동 한 가운데에서 대대적인 포위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원정군은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


이  와중에 요동성 함락 사실을 전해들은 만주의 나하추가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자 고려 원정군은 사실상 원정이 실패했음을 직감하고  대대적으로 철수하였으며 요동 원정 도중의 전사자보다는 이 철수 상황에서 죽은 병사들이 훨씬 많았다고 전해짐. 전투에선 이겼지만  고려 자체의 역량 부족으로 실패한 이 요동 원정은 이후 이성계가 2차 요동 원정에서 요동 원정 자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위화도 회군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경험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왜구 연합군의 수장 아기발도  : 이 시기의 왜구는 세계 역사로 쳐도 최대 규모의 해적 집단으로 사실상 해적이 아니라 거의 움직이는 군대 수준의 규율과 장비,  전투 경험을 갖춘 집단이었음. 이 시기의 왜구에 비견할만한 존재들은 서기 8~9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활동한 노르드 바이킹들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조선  시대의 왜구들과는 질적으로 수준이 달랐던 이들은 고려 몰락의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할 정도로 고려에 위협적이었는데 이  시기 왜구가 어찌 이리 강했는지는 아직 확정된 정설은 아니지만 일본 남북조의 혼란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됨.


본디  일본은 덴노가 일본 전체의 군주로써 귀족들과 함께 통치하는 중앙 집권적 정부 국가였지만 헤이안 시대가 종결되고 지방에서 성장한  사무라이(무사) 영주들이 덴노와 귀족들의 중앙 정부를 무력화하고 전국 권력을 장악함. 이 사무라이 영주들의 수장인 쇼군(장군)의  군사 정부를 막부라고 일컫는데 겐페이 전쟁에서의 패권다툼 끝에 전국을 통일한 사무라이 가문이 미나모토 가문이며 그들의 막부가  가마쿠라 막부였음.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가 점차 쇠퇴하고 몰락하자 당시 덴노이던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를 무력화하고 조정의 실권을 되찾고자(대정봉환) 봉기를  일으켜 마침내 가마쿠라 막부를 붕괴시키는 것에 성공, 그러나 고다이고 덴노의 수하이자 강력한 사무라이 영주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를 배신하고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다른 왕족을 덴노로 옹립하면서 일본은 고다이고 덴노계의 남조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옹립한 덴노계의 북조로 나뉘어짐.


남조  세력은 기본적으로 아시카가 가문이 지휘하는 북조 세력에 비해 열세였으며 결국 남조의 핵심 멤버들이 하나둘 전사하고 몰락하자  남조를 지지하던 일본 서부의 영주들 대부분 역시 몰락함. 그러나 남조 지지파 영주들 중 상당수는 북조와 아시카가 가문, 북조  지지파 영주들에게 앉아서 죽느니 바다 건너로 도망쳐 신천지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바닷길을 잘 알고있는 해적(왜구)들을  포섭하였고 이것이 바로 고려 말의 왜구 대침공이었다는 것.


실제로  고려는 일본 조정(북조)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 좀 처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지만 당시 일본 조정과 아시카가 막부는 남조 잔당들을  진압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기에 왜구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으며 도리어 종종 덴노가 거처할 실질적인 수도 교토가 왜구들에게  공격받기까지 하던 상황. 결국 고려는 나홀로 남조 잔당 영주들 + 해적이 섞인 대규모 군세의 침공을 감당해야했음.


1350년  경부터 슬슬 시작되던 왜구들의 침공은 이후 매년 거세어지면서 1370년을 넘긴 시점부터는 사실상 고려 전 국토를 휩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고려 전역에서 왜구들의 침공이 반복되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1350년~1392년 동안 무려 394회의 왜구 침공  기록이 남아있음. 기록에 남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침공이라면 당연히 단순 약탈자 무리가 저지르는 약탈은 그의 몇 배 이상이었다는  의미.


고려는  후대 왕조인 조선과 마찬가지로 육로 교통로보다는 조운선을 기반으로 하는 해운 교통로에 훨씬 많이 의존하였는데 이는 왜구들에게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고 왜구들에게 조운선을 집중적으로 털리면서 고려의 재정 수입은 극단적으로 악화되었고 하급 행정 관료들의  녹봉이 9개월치나 밀리는 등 국가 전체가 총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고려 지방군들은 왜구와 붙자마자 족족 개박살이 나며  연전연패하고 있었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왜구들은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에 통합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요컨대 훗날 조선시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시기의  일본군은 하나의 지휘 체계를 가진 정규군이었기에 매우 강력한 지휘-통솔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지라 이들을 상대로 아무리 대승을  거둔 들, 일본 중앙 정부의 전의를 꺾지 않는 이상 전쟁은 지속될 수 밖에 없었지만 고려 말의 왜구들은 각 왜구 집단들마다  저마다의 목적(고려를 침략하여 정착, 단순 재물 약탈, 자신의 영지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에서 인력을 약탈해오기 등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각의 왜구들을 몇 번 각개격파한다면 다른 왜구들에게 위협감을 주어 고려 침략을 포기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는 것.


문제는  공민왕 말엽부터 이미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공주의 죽음 등으로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최악의 암군으로 돌변한 상태였으며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자포자기하여 온갖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 있었고 공민왕이 암살당한 이후 즉위한 어린 우왕에게 상황을  타개할 능력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고려 각 지휘관들이 알아서 병력을 꾸려서 알아서 왜구를 막아야 했는데 최영과  이성계를 비롯한 소수 지휘관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왜구들에게 줄줄이 박살나면서 공민왕 말엽에는 수도 개경이 함락당할 수도 있기에  청주로 수도를 옮겨야한다는 논의가 나올 지경이었음.


당시  각 왜구 집단들은 기록 상 130척, 160여척, 66척 등의 대규모 함선을 보유한 대세력들로 그 규모도 추정상 적어도 1만  이상(각 집단들이)인 것으로 여겨지므로 단순 도적떼라 볼 수 없었으며 진포해전에서 왜구 연합 세력이 무려 500여척을 모은 것을 볼  때에 이들이 연합 집단을 결성한 시기라면 추정상 적어도 5만의 대군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음.


1370년을  넘기면서 절정으로 치달은 왜구들의 대침략으로 고려는 10년 가까이 엄청난 사투를 반복해야했는데 이 10여년 동안 최영, 이성계  등의 당시 고려 핵심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중심으로 최대한 빨리 각지의 현지로 달려가서 현지 징발된 군세를 규합한 뒤에 각  현지의 왜구들을 각개격파하기를 반복함. 특히 1377년, 왜구들이 개경을 직접 공격하려 들면서 조정 전체가 방어가 불가하다고 여겨  파천을 준비할 때에 이성계는 자신의 정예 기병(가문 사병 집단)들을 이끌고 수적 열세에도 왜구들을 대파하면서 수도 함락을  저지하는 것에 성공.


이에  점차 왜구 집단들은 연합군을 결성하며 대응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1380년, 심덕부, 최무선, 나세 등이 꾸린  100여척의 함선으로 왜구 연합군의 500여척 함선을 진포에서 대파하면서(진포대첩) 해상에서의 왜구 활동을 약화시키는 것에  성공함. 진포 해전에서 살아남은 왜구들 다수와 원래 육지에 주둔하던 왜구 집단들이 다시 뭉쳐 대규모 연합군을 재결성하자 고려는  노련한 베테랑 장수들인 9원수들을 불러모아 그나마 남은 방어병력을 달달 긁어 내려보내었는데 사근내역 전투에서 9원수의 고려군은  왜구에게 대패당하였고 2명의 원수가 전사.


이성계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에 대응하여 사병집단을 이끌고 남진, 동년 9월, 황산에서 이들과 맞붙게 되었음.  당시 기록에 의하면 왜구들은 경상도에서 대승(사근내역 전투)을 거두고 전라도로 옮겨 그곳에서 식량을 강탈하여 그 군량을 기반으로  개경을 공략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북방에서 강행군으로 남진하여 황산에 도착한 이성계는 부하 장수들의 휴식 및 대기(적이  지리적 이점을 포기하고 벌판으로 나올 때까지) 건의도 모조리 묵살하고 곧바로 전투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


당시  여러 기록들을 추정하면 이성계가 이끈 고려군은 무슨 계산을 써도 2만은 넘기 어려우며 일반적으로는 1만 남짓으로 추정되고있고  반면 왜구 연합군의 군세는 정말 최소치로 추산하면 1만 정도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려군의 10배라는 기록은 과장된 서술이겠으나  2배 정도는 넘었을 가능성도 높음'이라고 보고 있음. 즉 2~4만 정도로 보더라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것.


이성계는  자신의 친위 정예군을 이끌고 부하들의 만류에도 적진을 향해 깊숙히 진격하여 전면전을 밀어붙히면서 왜구들의 기세를 꺾었는데 이미  지형을 선점한 왜구들에게 지리적 이점이 있어 전투가 수월히 끝나지 않고 난전으로 흘러가자 이성계는 자신의 수하인 이지란과 협동하여 왜구들의  수장으로 불리던 아기발도를 화살로 저격하여 사살, 왜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었고 이틀에 걸친 혈전 끝에 왜구 연합군을 완전히  궤멸시킴.


진포대첩에  이은 이 황산대첩을 기점으로 왜구들은 이후에도 10년 넘게 준동하긴 했어도 고려를 멸망시키네 마네할 정도의 규모는 다시는 모으지  못하였으며 이성계는 이 승리를 기반으로 고려 전체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최영이 이성계를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도 보임. 이성계와 최영은 이후 은퇴한 이인임의 일파로써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 임견미, 염흥방을 쿠데타로 축출하여  살해한 뒤에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최영이 조정 최고 권신으로, 이성계가 그 옆에서 보좌하는 2인자이자 고령인 최영이 은퇴할 시에 그  뒤를 이을 차기 권신으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음.




여진족 추장 호바투  : 삼선과 삼개가 토벌된 이후의 동북면은 완전히 이성계 개인의 고유 영지 비스무리하게 되었고 이성계는 동북면의 모든 고려인들과  여진족들의 충성을 받고 있는, 즉 사실상 고려라는 왕국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음. 그러나 이성계는 설령 그에게 여진족의 피가 혹여 섞여서 흘렀을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고려인이었고(적어도 당대에도 그렇게 인식되었고) 이 말은 모든  여진인들이 이성계에게 충성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함.


당시  만주에 흩어져서 원과 나하추 등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혹은 이성계 산하에서 살아가던 여진족들 중 여러 일파는 점차 여진족들만의  독립된 세력들을 구축하고자 준동하기 시작했는데 그 여진족 전사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이 이 호바투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무려  4만의 대군을 모아 고려를 침공했다고 전해짐.


호바투는  동북면을 가장 먼저 공격했고 이는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으므로 이성계는 자신의 심복인 이지란이 모친상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너무나 급하여 이지란에게 상은 그만두고 반드시 참전하라 명령할 정도로 다급했었는데 이성계의 심복이자 이성계가 가장 신뢰한  명장인 이지란이 지휘한 선봉대가 도리어 호바투의 군세에게 궤멸당하면서 패색이 짙어져버림.


그러나  이성계는 도리어 본대를 손수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단지 일신의 초월적인 무용으로 호바투 군세의 사기를 꺾고 이지란을 구원한  뒤에 호바투 군세를 궤멸시켰는데 위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성계는 한신, 살라딘 등의 전략가 타입은 분명히 아니었고 전술가  타입 그 중에서도 일신의 무용과 국지적인 전술적 임기응변에 의존하는 천부적인 돌격대장 타입(알렉산드로스, 조아생 뮈라, 리처드  등)이었던 것으로 여겨짐. 여튼 이후 호바투가 결집한 여진족 군세는 산산히 붕괴하였고 호바투라는 이름도 그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투 패배 후에 살해되었거나 혹은 활동을 단념한 것으로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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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03 17:04:03

고려말기는 이성계없었으면 수백번 망하고도 남았을듯

OP
2019-11-03 17:11:28

이성계하고 최영 둘이서 수도 없이 구해낸 국가죠 정말 ㅋㅋ; 차이점은 결국 최영은 고려랑 같이 죽었고 이성계는 고려를 포기하고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지만..

Updated at 2019-11-03 17:15:36

개인적으로 이성계 본인도 용상에대한 야망이 분명 있었을테지만 그보다도 고려는 이성계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간 망했을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를 부흥시키려던 공민왕의 개혁이 좌초되고 사랑라던 사람이자 그의 강력한 우군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고 공민왕 폐인되던 시점부터 이미 끝났다고 생각.....

OP
2019-11-03 17:17:05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정몽주와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고 더 살았더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권문세족들의 시스템 문제를 완전히 타파하고 고려를 완전히 개혁한다..는 솔직히 저는 힘들 것 같네요. 당장 최영 본인부터가 권문세족의 대부인 이인임 살려준 사람이기도 하고

2019-11-03 17:20:51

222 일국의 존립이 충신 한 두명에 의지해야 한다면 이미 망한 나라나 진배없죠

2019-11-03 17:08:14

드라마 정도전에서의 모습이 어느정도는 사료에 기반한 모습인가보군요 이순신만큼은 아니어도 전략가 타입에 가까울줄 알았는데

OP
1
Updated at 2019-11-03 17:49:38
동아시아 사료들이 전투 기록이나 편제에 그렇게 상세한 편은 아니라서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선두에서 돌격하기 좋아하는 면모와 뭔가 문제 생기면 본인이 진두지휘해서 상황 타개하는 것, 신중론보다는 빠르게 적을 치는 것에 우선하는 등등을 볼 때에 공세적이고 전술적인 타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인간흉기급 맹장들과 비교하자면 독특한 시그니처가 하나 있는게 뭔가 밀린다 싶으면 적장이나 장교들한테 화살 마구 꽂아 죽여서 상대 기세 꺾어버리는게 있죠. 거의 리처드나 클로비스가 밀릴 때마다 도끼로 적장 뚝배기 쪼개는 시그니처급;
2019-11-03 17:08:19

이성계 최후의 적은 이방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2019-11-03 17:11:53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수십년간 전장에서 구르고 많은 승리를 쟁취한 이성계도 이방원한테는 졌죠 ㅋㅋㅋ

1
2019-11-03 17:21:20

한글 창제를 위한 이방원의 큰 그림 ㅠㅠ

OP
Updated at 2019-11-03 17:15:52

청출어람..ㅋㅋㅋㅋㅋ 사실 그리고 아무리 이방원이 밉고 뒤에서 이것저것 공작질 사주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죽이고 싶지는 또 않았을(아들이니) 애증관계였지 않나 싶습니다.

Updated at 2019-11-03 17:16:50

이거보니까 갑자기 정도전이 급 땡기네요 ㅋㅋㅋㅋㅋ

OP
Updated at 2019-11-03 17:17:49

정도전 이성계 나올 때마다 종종 치는 대사인 찰진 그 '간나쉐끼'가 기억납니다 ㅋㅋㅋ

2019-11-03 17:27:44

야! 정몽주!

OP
2019-11-03 17:29:19

옥새를 어서 갖고오우!

2019-11-03 17:31:13

"백성까진 바라지도 않슴메! 포은이 인정을 해주면 내게는 그것이 정당성이우다 고려에서 제일 잘났다는 포은 정몽주, 그 사람이 집정대신의 자격으로 바치는 옥새가 아이믄 내는 절대로 하지 않을것임메" 정몽주에 대한 이성계의 생각을 잘 나타낸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겠죠 (작중에서는) 그래서 정몽주한테 더 화를 낸 듯

OP
Updated at 2019-11-03 17:35:21

정몽주를 그렇게나 포섭하려고 했던거 생각하면 정몽주가 거목이긴 거목이었던 것 같아요. 이성계가 이방원이 정몽주 죽였을 때에 길길이 날뛰었다는 기록이 저도 단순한 쇼라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말로 화나긴 했을 것 같은 느낌.

2019-11-03 17:37:35

다 한글 창제를 위한 아들의 큰 그림이었는데...이성계가 무인 출신이라 그걸 못본듯 ㅠㅅㅠ

1
2019-11-03 18:05:03

잘만든 드라마인데 주연배우 때문에 공식 재방될일이 없어진게 큰 타격인듯...0

2019-11-03 18:05:45

ㅠㅠ 저도 그게 제일 안타깝습니다 진짜 조읍읍......

1
2019-11-03 17:49:35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강자임에도 포커스가 조선 건국에 맞춰지다 보니 묻히는 감이 좀 있죠..소드마스터 척준경 유금필과 더불어 최강자라 생각합니다

OP
Updated at 2019-11-03 17:54:55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사 맹장형 명장급에서는 유금필, 이성계, 척준경이 최강자급인 듯. 다만 유금필, 이성계는 전략안도 후달리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 척준경은 일신의 무력 외에 보여준 것은 크게는 없어서 척준경이 그 둘보단 좀 후달리는 것 같긴 해요(뭐 적병 도살하는건 척준경이 제일 최강인 것 같긴 하지만..)

2019-11-03 17:50:53

이정도면 고려의 메시 아닙니까?
개인전술로 다 박살내는 느낌 ㄷㄷ

OP
2019-11-03 17:55:25

고려의 메시 이성계, 고려의 수아레즈(?) 최영..

2019-11-03 17:56:00

고려 메시 이적하면서, 평가가 박해졌군요 ㅠ

OP
2019-11-03 18:02:28

소속이 바르샤급이면 이적안했을텐데 리즈 테크 타던 팀이라... ㅜㅜ

4
2019-11-03 18:01:18

리버풀고려에서 조선셀로나로 이적했으니 수아레즈는 이성계 줘야...

OP
2019-11-03 18:02:42

엌ㅋㅋㅋㅋㅋ

2019-11-03 18:06:30

이분야 최고 권위자님 말씀이니.....

2019-11-03 18:05:37

사병으로 유지될 정도면 왕조 바꾸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님에도 다들 왜 주저했던 것일까요...

2019-11-03 18:19:27

맹분이 업다 아입니까? 맹분이!!!

OP
1
Updated at 2019-11-03 18:22:57
일단 권문세족급이면 다들 사병 정도는 가지고 있기도 했고 권문세족들을 대체할만한 정치 지지층이 크게 형성되진 않긴 했죠 ㅋㅋ 신진사대부들도 따지자면 부분적으로는 권문세족에 포함되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권문세족들의 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린다라는 과격 신진사대부들은 생각보다 엄청 적었습니다. 정도전 같은 브레인 + 정말로 과격한 신진사대부들의 정치 이론 지지 기반을 받고 나서야 고려를 무너뜨린다는 어떤 명분이 섰다고 봅니다.

만약 그런 지지 기반이 없었으면 이성계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최충헌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2019-11-03 19:56:42

북두에 권 느낌 넘나 혼란기였네요

OP
Updated at 2019-11-03 20:39:34

한국사에서 손 꼽히는 헬게이트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한해서라면 구한말-일제강점기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생각되네요

2019-11-03 20:28:11

이렇게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요동원정은 너무 무리수 아니었을까요ㄷㄷ

OP
2019-11-03 20:44:10
공민왕은 이 때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벌인 일일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최영이 권력 잡은 다음에 추진한 2차 요동 원정은 뭐 이미 이성계가 반대했던 시점에서 여러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봤다는 것이겠죠.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최영의 전략안은 대충 추측이 갑니다. 아직 원(중원 내주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가서 북원된 상태)이 완전 멸망하진 않았고 명이 원을 화북 이북으로 밀어내고 있는 판도이므로 그 찰나를 노려서 요동으로 진격하면 원이 용기백배하여 완전히 밀리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요동을 먹은 우리와 동맹을 맺고 세솥발의 형세로 원-명-고려의 삼각 형세를 이룬다..라는 거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최영은 행적만 봐도 알겠지만 천상 군인이었지 행정가는 아니어서 약간 고려 자체의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본 경향이 좀 있고 원의 잔당 세력과 고려의 군세를 합쳐도 2차 요동 원정에서 고려가 동원한 전력 수준이 꼴랑 5만인 것을 고려하면 원 잔당 10만 + 고려 5만 = 도합 15만으로 명 북벌군 40만을 상대해야하는데 그 와중에 만주의 왕으로 군림하던 나하추가 10만 군세를 이끌고 명한테 붙었으니 정세에서 고려가 낙관할 수 있는 정세는 절대 아니었죠.

가만히 있었어도 최영은 어차피 고령에다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 권신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성계에게 모든 대권을 넘겨주었을테고 이성계는 그냥 편안하게 알아서 권력 차지할 위치였음에도 굳이 최영하고 말다툼을 하면서까지 반대한 이유도 이런 점에서 이성계는 원정의 성공율이 너무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편이구요.
2019-11-17 21:31:4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당

OP
2019-11-17 21:39:00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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