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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국대와 올대의 맞대결.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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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0-13 18:26:30


 

 


# 알아 보기에 앞서...

 

 

이번 A매치 데이에는 '2020 하나은행컵'이라는 이름으로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2연전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번 맞대결 전에도 1996년 4월 21일에 한 차례 맞붙은 적이 있었고 그 경기에서는 국가대표팀이 2-1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9일에는 양 팀이 2-2로 비겼고, 10월 12일에는 국가대표팀이 0-3 완승을 거두면서 양 팀의 통산 전적은 3경기 2승 1무(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준)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은 통상적으로 '올림픽 축구 대표팀' 등으로 불리지만 공식적으로는 'U-23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분류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남자 축구 종목에는 23세 이하의 선수만 참가할 수 있게 되면서 U-23 축구 국가대표팀이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할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실상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개념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대표팀 전까지는 통상적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맞대결이 1996년과 올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 전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까지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실상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역할까지 했습니다만 1980년대 후반에는 1986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체육 행사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목 관련 협회가 성적에 대한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인기 종목인 축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그 일환이 바로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하 88팀)'의 출범이었습니다. 

 

 

88팀은 19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4강 신화를 써낸 청소년 대표팀의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을 그대로 승계하면서 1983년 7월에 출범했습니다. 이 팀의 출범 이유로는 궁극적으로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한 어린 선수들의 육성 차원에서, 그리고 1980년대 초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축구 참가 문제에 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축구연맹(FIFA)의 협의가 있었긴 했지만 아직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축구 참가가 확정이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추어 신분의 선수(주: 실업, 대학 선수, 그리고 프로 구단과 아마추어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대표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88팀은 1983년 7월에 출범했습니다. 허나, 당해 11월에 있을 LA 올림픽 1차 예선을 대비해 7-8월에 걸쳐 북중미 전지훈련을 간 국가대표팀이 2무 4패(1경기는 승부차기 패배)라는 처참한 성적을 안고 돌아온 후 국가대표팀의 조윤옥 감독이 사퇴하면서 박종환 감독이 급작스럽게 국가대표팀 감독에 임명되었고 김종부, 신연호, 유병옥, 김종건, 장정, 이문영 등을 포함한 88팀의 주전 선수 대부분이 LA 올림픽 예선 준비 체제로 들어간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이 88팀이 완벽한 전력으로 작용한 것은 국가대표팀이 LA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한 이후인 1984년 6월에 국가대표팀이 프로와 아마추어 신분의 선수를 망라하여 완벽한 전력으로 구성하는 '월드컵대표팀'과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을 대비하여 20대 초반의 어린 아마추어(대학, 실업팀) 선수로 구성되는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인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으로 이원화되면서부터라고 설명드리겠습니다

 

88팀의 출범에 대한 속사정은 따로 문의를 주신다면 더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대략적인 과정은 이러합니다.     

 

 

 

국가대표팀과 88팀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과 34년 전, 1985년과 1986년에 걸쳐 공식적으로 3번의 맞대결을 했습니다. 1985년 5월에 FIFA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연습 경기의 일환으로 두 차례의 맞대결을 더 한 적이 있었지만 공식 경기로 분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동안 양 팀의 맞대결 역사를 알아보고 가장 중요했던 두 번째 맞대결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첫 번째 맞대결: 스타 탄생, 흔들리는 국가대표팀을 격침한 김주성

 

 

 


* 88팀 시절의 김주성. 사진은 해당 경기와 관계 없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2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1985년 1월 1일)

 

- 일시: 1985년 1월 1일 오후 2시

- 장소: 구덕운동장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서구 서대신동)

- 대회: 85축구제전

 - 유형: 평가전

 

득점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순호 (36)

-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이경남 (3분), 김주성 (21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선발 출전 선수 (아래 선수 외 미상)

 선발 출전 선수 (아래 선수 외 미상) 

      정종수, 박창선최진한, 최순호    

김종건, 이경남, 김삼수, 김주성

 * 교체

 * 교체

 - 미상

 - 미상

 * 감독: 문정식

 * 감독: 박종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첫 번째 맞대결은 1985년 1월 1일, 구덕운동장에서 있었습니다. 전년도 말 AFC 아시안컵에서 허정무, 박창선, 박성화, 이강조 등의 노련한 프로 선수들까지 참가하고도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을 거두면서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처럼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는 않고 메르데카컵과 머라이언컵 등의 군소 국제 대회에서는 각각 우승, 준우승의 호성적을 거뒀지만 한일정기전, 그리고 중요 국제 대회로 분류된 잠실운동장 개장 기념 국제축구대회에서 플루미넨세에게 패하며 88 올림픽에 대비하는 선수들의 기량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88팀... 이 두 팀은 평가의 반전을 위해서라도 이 경기의 승리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88팀의 2-1 승리! 88팀은 김종건의 크로스를 이경남이 받아 선제골을 넣었고 21분에는 김주성이 김삼수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국가대표팀은 최순호가 프리킥에서 한 골을 이끌어내는 데 그쳤습니다.

 

이 경기의 수훈갑은 단연 김주성. 김주성은 1984년 국가대표팀 개편 이후부터 88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의 대활약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고 경기가 끝난 며칠 뒤에는 기존의 88팀 선수였던 김종부, 김삼수, 김종건 등과 함께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이후 프로 선수가 주축이 되는 국가대표팀과 88팀 선수들의 혼선을 우려한 대한축구협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대표팀 선발 보류).

 

 

* 해당 경기 관련 영상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당시 김주성의 활약상은 88팀 소속으로 뛰었던 1985년 대통령배 활약 영상으로 대체하겠다. 11번이 김주성.

 

 

 

 

 

 

 

 

 

 

 

 

 

# 두 번째 맞대결: 우승컵을 차지하기 위한 양보 없는 승부

 

 

 


* 제15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결승전 당시 88팀 감독 박종환(왼쪽)과 국가대표팀 감독 김정남(오른쪽)의 모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 : 0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1985년 6월 17일)

 

- 일시: 1985년 6월 17일 오후 6시 50분

- 장소: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 대회: 제15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 유형: 친선 축구 대회 결승전

 

득점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변병주 (7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선발 출전 선수 (4-3-3 전형)

선발 출전 선수 (4-2-4 전형)

     

     6.이태호---9.최순호---11.변병주   

          10.박창선----4.조광래

                 18.강신우

  3.정종수-5.정용환-15.유병옥-12.김평석  

                 21.오연교

 

  11.김주성-6.조민국-9.김종부-10.정동복  

             15.김삼수-12.구상범

   3.강태식-4.최윤겸-14.남기영-2.김판근

                  1.이문영

 * 교체

 * 교체

  - 70분  6.이태호  OUT

          13. 백종철  IN 

  - 65분 14.남기영  OUT

           16.강재순  IN

   - 75분 12.구상범  OUT

           17.이기근  IN

감독: 김정남 

 감독: 박종환

 

 

 

두 번째 맞대결은 대회의 결승전에서 벌어졌습니다. 1985년 6월에 개최된 제15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의 결승에서 만난 두 팀의 경기는 대회 최초로 국내에서 출전한 팀끼리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결승에서 맞붙는 역사적인 경기였습니다. 각각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과 고베 유니버시아드 우승이라는 단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대회의 우승을 당면 과제로 삼은 두 팀은 이라크, 우라칸(아르헨티나), 방구(브라질), 센트랄 에스파뇰(우루과이) 등의 팀을 제치고 무난하게 결승에 당도했습니다.

 

 

1985년 3월 초, 멕시코 월드컵 1차 예선에서 참가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네팔 원정 경기에서 0-2 신승, 말레이시아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배하면서 결국 문정식 감독이 귀국 직후 사퇴하는 팀 조직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미 전년도 아시안컵 본선 조별 리그 탈락에 정초에는 88팀에게도 패배하는 등 팀 케미스트리가 바닥에 다다른 상태에서 벌어진 대참사였습니다. 그리고 3월 중순, 기존의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김정남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국가대표팀은 새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4월과 5월에 국내에서 연달아 벌어진 월드컵 1차 예선 네팔戰, 말레이시아戰에서 각각 4-0 승리, 2-0 승리하면서 월드컵 2차 예선에 진출한 국가대표팀은 김정남 감독의 탁월한 선수 선발과 새로운 전술 지도 아래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4-2 시스템의 완벽한 정착이 이뤄지지 못하여 대통령배 초반에는 다소 헤매는 듯 했으나 강신우를 수비 라인 앞에 붙이고 박창선과 조광래의 미드필드 운영을 최대한 살리는 4-3-3 시스템(중앙 미드필더 두 명과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을 두는 시스템으로 당시 통용된 4-3-3 시스템과는 차이가 있다)을 병행하면서 경기 운영을 안정화했고 공격진의 차포(車包) 최순호-이태호 듀오가 살아나면서 2차 리그와 준결승을 거쳐 결승까지 어렵지 않게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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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배 바레인 전에서 나온 당시 국가대표팀의 색채를 잘 드러낸 골. 중원의 플레이메이커 박창선과 패싱에 능한 공격수 최순호를 중심으로 하여 중원에서 패싱 게임을 하다가 재빠른 측면 전환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특징. 특히 오른쪽의 변병주-박경훈 듀오를 적극 이용했다. 패스 순서는 이태호(6번)-최순호(9번)-박창선(10번)-최진한(16번)-박경훈(2번, 도움)-이태호(6번, 득점)

 

 

 

한편, 88팀은 정초에 벌어진 85 축구제전에서 국가대표팀에 승리한 이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당대의 최고 인기 감독 박종환의 지도 아래 대통령배에서 특유의 화끈한 공격 축구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며 인기 몰이를 했습니다. 결승전까지의 전적은 6경기 5승 1무 17득점 4실점으로 대회 최고 수준의 공수 조직력을 보여주면서 1984년 말부터 1985년 초까지 보여준 처참한 이미지가 아직까지 박혀있었던 국가대표팀보다 오히려 더욱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85 축구대제전을 통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스피드스터 김주성, 83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4강 신화의 주역 김종부, 박창선을 똑 닮은 플레이를 하는 주장 김삼수의 대활약으로 파죽지세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88팀은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방구 AC(1985년 브라질 1부리그 준우승 구단)을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키며 결승에서 국가대표팀과 맞대결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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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팀은 볼 인 플레이 때나 세트 피스 때나 철저하게 약속된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기습 공격이 특징이며, 그 중에서 특히 풀백의 기습 오버래핑이 중요했다. 對 이라크전에서 나온 득점으로 김삼수(15번)의 허를 찌르는 단거리 프리킥에 이은 김주성(11번)의 어시스트, 다재다능한 풀백 김판근(2번)이 득점했다. 83 세계청소년월드컵에서 일명 '6가지 번개 작전' 등의 약속된 플레이를 기반으로 하는 1980년대 박종환 감독 특유의 전술 색깔(90년대에는 비교적 자율적인 색깔로 바뀜)이 그대로 투영된 득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 대회에서는 '10가지'의 작전을 들고 나왔다). 

 

 

 

 

 

이제 경기 주요 장면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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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팀 김주성(11번)의 드리블 돌파에 이은 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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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팀 이태호(6번)의 빅 찬스 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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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부(9번)의 스루 패스를 받은 김삼수(15번)의 빅 찬스 미스.

 

 

최순호, 박창선, 조광래, 이태호와 같은 테크니션들의 자율적인 움직임과 패싱 게임을 살리는 국가대표팀의 축구와 측면 전개와 철저히 약속된 플레이의 '벌떼 축구'를 하는 88팀의 진정한 맞대결은 1985년 6월 17일 오후 6시 50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4만 5천여 명의 관중이 잠실에 운집한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관중들은 88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했고 88팀은 그 응원에 힘입은 듯 전반부터 김주성을 위시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전반전 슛 개수는 11대5로 88팀의 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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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공격 듀오 중 하나인 최순호(9번)-이태호(6번) 듀오의 콤비네이션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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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팀 최윤겸(4번)의 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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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병주(11번)의 바이시클 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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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부(9번)의 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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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선(10번)-최순호(9번)-조광래(4번)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인 강신우를 스토퍼처럼, 중앙 미드필더인 박창선과 조광래까지 아래로 깊숙이 내리면서 전략적으로 웅크린 자세로 나오며 88팀의 힘을 빼놓는 국가대표팀의 노련한 경기 운영(김정남 감독의 가장 큰 전략적 특징 중 하나)이 후반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틀 간격의 경기 배정에 준결승에서 이라크와 승부차기 승부까지 벌인 탓에 팀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88팀은 후반부터 공세가 약해졌고 라인을 위쪽으로 끌어올린 국가대표팀이 양상을 뒤집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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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서: 강신우(18번)-정종수(3번)-최순호(9번)-백종철(13번)-조광래(4번)-최윤겸(88팀, 4번) 클리어링-변병주(11번) 득점.

 

 

그리고 후반 29분, 중원부터 차근차근 풀어나오던 국가대표팀은 최순호와 백종철의 패싱 플레이에 이은 조광래의 로빙 패스가 최윤겸에게 막혔으나 루즈 볼이 변병주에게 흘러나왔고 변병주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골을 넣으면서 이 경기의 유일한 득점을 해냈습니다. 1-0.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 점수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배는 국가대표팀이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수비적인 운영 때문에 관중들이 야유를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先수비·後역습 전략을 고수한 김정남 감독 덕분에 국가대표팀은 전술·전략적으로도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고 정초 85축구제전에서 88팀에게 호되게 당한 국가대표팀은 이 대결을 통해 완벽한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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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방송사들이 보고 배워야 할 카메라 워크

 

대통령배 폐막 후, 국가대표팀 체제가 완전히 자리잡았고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인도네시아, 일본 등을 제치고 한국 축구의 숙원 목표였던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32년 만에 이뤄냈습니다. 이듬해에는 FIFA 월드컵 본선에서 1무 2패를 거두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비교적 나쁘지 않은 경기력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88팀은 고베 유니버시아드에서 5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고 대통령배 직후 김주성, 김종부, 조민국, 김삼수 등 당시 88팀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이 모두 국가대표팀으로 차출되기 시작하면서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 세 번째 맞대결: 86 서울 아시안게임의 성공을 기원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 : 1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1985년 8월 21일)

 

 

- 일시: 1985년 8월 21일 오후 6시 30분

- 장소: 동대문운동장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

- 대회: 아시아경기 성공 다짐 대회 축구 평가전

 - 유형: 평가전

 

 

득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박경훈 (50분), 최순호 (74분)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신연호 (4분, PK)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88 올림픽 축구 대표팀 

 선발 출전 선수 (4-3-3 전형)

 선발 출전 선수 (4-3-3 전형)

     

    김주성---이태호---변병주   

         박창선----허정무

               조광래

  김평석-정용환-조영증-박경훈  

               조병득

 

      심봉섭---이칠성---황영우   

                 신연호

           최진한----김종건      

    구상범-여범규-김현석-김판근  

                  이문영

 * 교체

 * 교체

  

    - 29분 허정무  OUT

            최순호  IN

   - 33분 정용환  OUT

           조민국   IN

    - 미상 조광래  OUT

            김삼수  IN  

    - 미상 변병주  OUT

            노수진  IN

 

 

   - 미상 김판근  OUT

            김동해  IN

    - 미상 최진한  OUT

            김상호  IN

    - 미상 김현석  OUT

            이영익  IN

    - 미상 신연호  OUT 

            이기근  IN

    - 미상 황영우  OUT

            구한식  IN

 

 * 감독: 김정남 

 * 감독: 박종환

 

 

 

 

 

한국 축구의 숙원 목표였던 FIFA 월드컵을 비교적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마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또 다른 목표가 눈 앞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스포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숙원인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86 서울 아시안게임의 호성적과 흥행은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 축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편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유권 해석에 따라 한국 프로축구 선수들의 출전이 가능해지면서 FIFA 월드컵에 출전한 국가대표팀이 86 아시안게임에도 그대로 출전하도록 대한축구협회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독일로 복귀한 차범근,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 선수 등록에 문제가 생긴 김종부 등을 제외한 86 월드컵 출전 선수들이 그대로 주축이 되어 86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게 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에 앞서 진행된 '아시아경기 성공 다짐 대회'의 일환으로 88팀과 평가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86년 3월 킹스컵이 끝나고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88팀은 대한축구협회가 FIFA 월드컵 본선에 집중하고 국가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하게 되면서 붕 뜨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종환 감독이 사의 표명을 하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순영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월드컵에 가기 직전 본인에게 아시안게임 대표 감독직을 맡아달라고 다짐했지만 번복되었고, 메르데카컵과 머라이언컵 등의 대회에 88팀을 참가시키기로 했지만 그것 역시 번복되었기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협회의 행정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사의를 표명한 이유였습니다. 며칠 뒤, 박종환 감독이 아시안게임 이후에는 88팀을 주축으로 국가대표팀을 구성하겠다는 최순영 회장의 약속을 받고 사의를 번복하긴 했습니다만 88팀이 오랫동안 큰 일정 없이 사실상 해체된 팀으로 간주되어 프로 구단들과 선수 차출 문제를 놓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습니다(결국 최진한, 김종건, 최윤겸, 구상범, 여범규 등의 프로 선수들 역시 차출하는 것으로 합의).  

 

 

8월 21일 오후 6시 30분, 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된 이 경기 역시 형들이 승리했습니다. 1년 반의 시간 동안 팀워크를 갈고 닦은 김정남 감독 휘하의 국가대표팀은 오랫동안 와해되었던 88팀의 가장 큰 무기인 조직력에서도 우위를 보이며 깔끔하게 2-1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전반 5분, 신연호가 페널티킥에서 한 점을 넣으며 88팀이 앞서갔지만 전반 29분 부상 악화를 우려하여 선발 명단에서 제외된 최순호를 이른 시간에 투입하면서 경기의 양상은 점차 국가대표팀 쪽으로 흘러갔고 후반 초반에는 조광래가 시도한 프리킥을 박경훈이 넘어지면서 차넣어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리 롤로 뛰면서 이태호와 김주성 등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여러 차례 해낸 최순호는 후반 29분 노수진의 크로스를 헤더로 받아넣어 결승골을 이끌어냈습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배와 언뜻 비슷한 경기 양상으로 대표팀 일정과 프로축구 일정의 병행으로 양 팀이 모두 체력적인 열세가 눈에 띄었지만 역시 국가대표팀이 개인 기량에서 우위를 보이면서 승리를 챙겨갈 수 있었습니다.  

 

 

 

 

 

 

 

 

 

이 경기 이후 국가대표팀은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진행된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에서 8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1차 목표를 완수한 대한축구협회는 이제 궁극적 목표인 1988 서울 올림픽 준비 체제로 전환합니다. 원래 88팀이 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팀으로 선정됐었기 때문에 '월드컵대표팀-88올림픽대표팀'으로 이원화된 국가대표팀은 다시 하나의 국가대표팀으로  합쳐집니다. 따라서 일명 '월드컵대표팀'으로 불렸던 국가대표팀 선수단은 해산하였고 김정남 감독과 김호곤 코치는 각자의 소속 구단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88올림픽대표팀은 명실상부한 국가대표팀으로 승격하면서 박종환 감독이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됩니다.

 

이 때는 1988 서울 올림픽 축구에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허용됐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망라하는, 말 그대로 완벽한 '국가대표팀'으로 서울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86 아시안게임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의 중추였던 박창선, 허정무, 조광래, 조영증 등의 30대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에서 나란히 은퇴하고 에이스 최순호의 기량이 점점 하락하고 있는게 눈에 띔과 동시에 1987 시즌이 종료된 후에는 소속 구단 포항제철과의 연봉 협상 갈등으로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면서 잡음을 일으키는 등(1988 시즌을 앞두고 럭키금성으로 이적하면서 일단락) 선수단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의 부재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표팀 안팎으로 지도 방식에 대한 코칭 스태프와 선수 간의 불화설, 박종환 감독과 대한축구협회의 불화설 등이 계속 터져 나오면서 팀 케미스트리가 점점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2월에 대한축구협회 상비군관리위원회에서 박종환 감독의 경질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지만 아직 성적이 크게 부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의 결과를 보자면서 일단 유임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허나 U-19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1-4로 패배하는 등 실제 성적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서 다시 한 번 여론은 국가대표팀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100일도 남겨두지 않고 진행된 제17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에서 체코 리그 선발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자 승부차기 과정에서 선수들에게 승부차기 순서도 공지되지 않았다는 소문이 전파되면서 박종환 감독은 성적 부진에 대한 통감과 함께 온갖 소문을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경기 이틀 뒤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약 80여일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박종환 감독이 물러나자 전임 김정남 감독이 긴급하게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서울 올림픽을 치르게 됐습니다. 조별 리그에서 소련, 미국, 아르헨티나 등의 만만치 않은 팀들과 한 조를 이룬 국가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소련(88 올림픽 금메달)과 비기면서 나쁘지 않게 시작했고 미국과도 비기면서 8강 진출의 가능성이 적지 않았지만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하면서 8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88 올림픽 대표팀의 출범과 함께 5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준비했던 올림픽 축구 본선은 결국 이렇게 아쉽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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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0-13 18:49:58

바레인전 패싱지리네요 ㅋㅋ

2020-10-13 19:16:09

와 엄청난 자료네요 ㄷㄷ
추천은 필수

2020-10-13 22:27:34

김주성 살벌하게 축구하네요 ㄷㄷ 야생마란 별명이 정말 딱이었던듯

2020-10-13 23:31:16

김주성 진짜 잘하죠..ㅎㅎ 

요즘 들어서 커리어만 보고 기량은 분데스 2부리거급이라고 폄하하는 건 진짜 좀 슬픕니다..ㅠ

2020-10-13 23:02:52

추천이 한 개인게 아쉬운 명품 글이네요

2020-10-13 23:30:36

우워 이런 귀한 자료를 고퀄의 칼럼과 함께... 추천 100개 드립니다!!

2020-10-14 01:34:31

아니 강신우 해설 국대출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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