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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모리꼬네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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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7 01:54:46

제가 영화에 급속도로 빠져들게 된 건 고1 때였습니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데, 고1 1학기 때 어떤 친구와 짝이 되면서였죠.(그 친구는 제 영화적 스승이자 아직도 손에 꼽는 절친입니다.) 그 친구의 아버님께선 본업 외에 영화와 관련된 일도 하고 계셨는데, 그래서인지 친구네 집엔 서적을 비롯해 비디오와 DVD가 쌓여있었습니다. 친구는 그 나이에 방대한 양의 영화를 스스로 아카이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본격적으로 영화에 입문했죠.

전 중학교 때부터 극장에 쏘다니긴 했어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흔한 여흥과 감상을 위해 당시 범람하던 조폭영화 같은 것을 보는 게 다였어요. 그러다 그 친구와 짝이 되고 친구가 영화 얘길 저에게 풀어내면서 차츰 영화에 다가가게 됐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사람의 영화에 말이죠. 그땐 빌려볼 생각은 못하고 얘길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었습니다.
친구가 어느 날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습니다. 친구네 집이 궁금했던 저는 주말에 친구네로 놀러갔고, 거기서 놀다가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하며 빌려준 비디오테입을 챙겨나왔습니다. ‘시네마 천국’이었죠. 친구네 집은 걸어서 10분 거리여서 냉큼 집으로 가 비디오를 틀었습니다.

애인 옆에서 일어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프레도의 부음을 듣는 장년 토토를 보며 딴엔 철없는 예단으로 애인이 얽힌 흔한 치정 얘긴가 싶었습니다. 야한 게 나오려나 잠시 기대를 품기도 했죠. 하지만 이내 시선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토의 유년시절로 들어가 영사기를 돌리는 토토와 알프레도를 보며 제 안의 영사기도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렇게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근데 음악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토토와 엘레나가 키스하는, 비오는 날 야외 상영 씬에서부터 음악을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씬을 거쳐 필름이 타들어가 알프레도가 화상을 입고 실명을 하고, 소년 토토에게 떠나서 오지 말라고 할 때, 기차를 타고 떠나는 토토를 배웅하는 씬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주는 아련함을 그제거야 어렴풋이 느꼈돈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 엘레나를 만나고, 알프레도를 보내고, 로마로 돌아와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돌렸을 때 비로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음악을 되새기게 됐습니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나 다시금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세 번을 보고 비디오를 돌려줬던 것 같아요. 이후 그 친구랑 극장을 쏘다니고 동네 비디오 가게 단골이 되어 주인 아저씨 없을 땐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곤 했죠. 그래도 시네마 천국 만한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이 주는 생경함과 참신함.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새로운 감정.

대학 시절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교보에 들렀는데, 할인 품목 가판대에서 시네마 천국 DVD를 보곤 멈춰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죠. 집에 가서 보는데, 몇 년이 지나도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돌리는 엔딩 씬을 마주하는 내 감정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고, ‘시네마 천국’에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이후 1-2년에 한 번씩 시네마 천국을 보게 됐어요. 재생을 거듭할 수록 눈물을 참기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아직까진 잘 참고있지만요.)

언제였는지 모르겠는데, 시네마 천국을 보고나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고1 꼬맹이였던 그 때, 그 순간에 처음으로 영화의 감정과 긴밀하게 조우했던 게 아닐까. 당시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미지와의 만남이 지금까지 절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필름이 돌아가게 만드는 일로요.
그래서 항상 애틋함과 감사함을 갖게 되는 작품입니다. 이후 영화과 시험 칠 때 집에서 호되게 혼나곤 했는데,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건 그 때의 어떤 ‘만남’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더이상 마에스트로 엔니오 모리꼬네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천국 극장’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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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07 01:58:27

그야말로 한사람의 인생을 바꾼 영화군요 ㄷㄷ

2020-07-07 03:37:59

돌아가셨군요.. 시네마 천국만한 영화는 보지 못했네요..

엔딩 씬은 정말 볼 때마다 눈물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시길.

Updated at 2020-07-07 08:09:49

저도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시점은, '시네마 천국'을 만난 날부터인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영화를 봤지만, 그럴수록 이 영화는 더욱 특별해질 수밖에 없네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그 위대한 장면이 더욱 빛날 수 있게 해준 모리코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0-07-07 08:53:07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07-07 09:32:32

 저도 큰 기대없이 보다가
최고로 몰입해서 본 최고의 영화입니다.
DVD 2장, OST CD 1장 가지고 있으며
저도 최소 10번 이상은 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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