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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랴 인을 위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3 - 일본이 기여한 아시아적 가치 인정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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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22:22:37

이번 글은 지난 번의 폴란드 바르샤바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세계유산 등재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사실 같은 글에 함께 썼어야 하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다소 옆으로 새는 이야기라서 따로 짧게 팝니다. 오늘은 재건을 둘러싼 아시아적 가치를 유네스코에서 인정받는데 기여한 일본의 이야기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폴란드 바르샤바 도심의 역사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논란이 심해졌습니다. 여기에는 사실 서양 중심의 보존 철학에 대한 의문이 배경이었습니다.

 

재건(reconstruction)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서양의 보존 철학은 19세기 영국의 예술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스킨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장식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완전함을 원한다”라는 말을 하였는데요. 그는 복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 ‘가짜’이며 파괴되거나 사라진 건축물은 그냥 기억 속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굉장히 보수적인 보존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건축물이 썩거나 부패해서 무너지면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싸이클이니까 건드리지 말고 놔두자고 했습니다. 이런 그한테 ‘재건'은 그야말로 무덤 속에서 놀라서 벌떡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로 미친 짓이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서양의 보존 학계에서 이러한 존 러스킨의 급진적인 입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 바로, 재건을 할 때에는 원래의 상태랑 눈으로 보일 정도로 솔직하게 ‘구별’되어야 하고 또 재료나 외관이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흙벽돌을 쌓은 구조를 흉내 내려고 콘크리트 위에 흙색 덧칠을 하는 것은 솔직하지 않고 모순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양의 입장이 비서양 전문가들에게는 그렇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실 동양 문화권에서 무언가를 다시 만드는 재건 행위는 가짜를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면서 이루어지는 거의 주기적인 의례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일본의 성지인 이세 신궁입니다. 아마테라스를 섬기고, (만화 나루토에 나오는 이타치가 스사노오에서 쓰는) 야타의 거울을 신체로 모시는 신사 중의 으뜸입니다.

 

사실 이세신궁은 야스쿠니 신사처럼 일본 우익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고 연초에 항상 일본 총리가 참배하는 곳이라 글에서 다루기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세 신궁 (마찬가지로 도쿄 메이지 신궁도) 참배를 항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야스쿠니 신사랑은 그래도 약간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세 신궁은 매 20년마다 건물 전체를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걸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재건의 당위성은 자연의 소멸과 부활, 물질의 필멸을 믿는 토착 종교인 신토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현실적인 당위성은 서양 건축과 동양 건축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나옵니다. 상대적으로 수명이 길고 화재에 내성이 있는 석조나 콘크리트 위주의 서양 건축과는 달리, 동양 건축은 화재에 취약하고 날씨 등으로 쉽게 썩고 흰개미들이 파먹어서 쉽게 상하는 목조가 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런 신축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 바로 서양과는 다르게 소위 도목수라 불리는 목재 장인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다음 세대로 전수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종의 무형(intangible) 유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재건에 쓸 나무를 미리 200~300년 전에 심는다고 하네요.

 

 


20년이 지나서 새롭게 지은 이세 신궁의 모습이라고 하네요.

 

아래 쪽(서쪽)은 새로 지은 이세 신궁, 위 쪽(동쪽)은 곧 해체하는 이세 신궁입니다. 20년마다 동서를 번갈아 간다고 하네요.

 

자, 새로 지을 목재가 준비되었습니다.

 

도목수가 어떻게 깎을지 목재 위에 일일이 손으로 표시합니다.

 

요즘에 새로 짓는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 붙어서 새로 지었다고 하네요.

 

이세 신궁의 재건 – 식년천궁은 첫 날 천궁제는 일반인에게 열리지만, 재건 과정은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지인에게 듣기로 도쿄예대 등에 속한 교수들이 관여하기 때문에 해당 대학의 대학원생들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한국에도 비슷한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죠.

우리 국사 교과서 보면 무슨 무슨 궁 중건, 재건, 복원, 수리, 중수 이런 비슷한 단어들이 많이 나오죠. 이런 단어들이 영어의 restoration, rehabilitation, reconstruction 이런 단어들과 100% 일치가 잘 안 되어서 전문가들도 우리 말로 옮길 때 토론을 엄청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수년 전 화재로 불탔던 숭례문의 사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글에서 굳이 언급하진 않겠지만 대부분 바로 ‘진정성’에 관한 논란이었습니다) 도목수가 목재를 썰고 올리고, 화재로 불타고 남은 목재들도 최대한 재활용하는 등 모든 접근이 보존 철학 체계 내에서 고려되고 결정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돌아온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숭례문의 복원과 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룬 책으로는 당시 숭례문복구단장을 지냈던 최종덕 박사의 ‘숭례문 세우기(2014)’를 추천합니다. 문화재청 소속 고위공무원이었지만 잘 되었든 못 되었든 모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학자적 양심에서 펴낸 이 책 때문에 최종덕 박사는 문화재청에서 많은 기간 직위해제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앞광고 뒷광고 아닙니다. 저는 저자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여튼 이런 동아시아의 전통 때문에 전문가들이 문제를 제기하는데, 특히 일본이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1994년 11월에 이세 신궁 근처인 일본 나라(Nara)에서 여기에 대한 전문가 회의가 개최되었고 지역적,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흔히 ‘나라 문서(Nara Document on Authenticity)’라고 불리는 그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주 프랑스 대사였던 고이치로 마츠우라(Koichiro Matsuura)를 앞세워서 이 문서의 영향력을 공식적으로 하고자 해서, 결국 1999년부터 거의 바이블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이치로 마츠우라는 이 직후 유네스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재임하였는데요.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입김이 참 많이 강해졌습니다.

 

 

이래서 원래는 디자인, 형태, 재료 등에 국한되었던 진정성의 개념이 용도, 전통, 기법, 관리체계, 언어, 정신 등 형태가 없는 요소들로 확장되었고, 보다 종합적으로 그리고 문화권에 맞춰서 가치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을 비롯해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문화유산들이 지닌 가치가 많이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이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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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8-29 22:27:24

2번째 글이 올라온걸 못봤네유 ㅎㅎㅎ

 

퀄리티 

1
2020-08-29 22:39:08

갓본 ㄷㄷ

2020-08-29 22:42:20

이런 글 봐도 그렇고 예술이나 문화 분야는 철학을 얼마나 잘 설득시키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OP
2020-08-29 23:48:00

철학 없으면 근본 없다고 대차게 까이는 바닥이 문화 예술 아니겠습니까 껄껄
그런데 또 그 철학이 저 하늘 높이 있어서 현장 현실이랑 달라서 까이기도 하는 바닥 같습니다..

1
2020-08-29 22:50:29

이 내용으로 논문자격시험 본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ㅋㅋㅋ
결국 보존 문제의 핵심은 진정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것 같아요. 일부 급진적인 입장을 가지신 분들은 박물관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하신다고 들었네요. 무덤에서 파헤친순간 그 진정성이 훼손된 것이고 되돌릴 방법은 다시 묻는것 뿐이다

OP
2020-08-29 23:51:31

어우야 전공자셨군요!

맞아요 이게 개개인 생각도 다르고 또 역사학자 예술사학자 고고학자 건축가 관광학자 인류학자 등 분야마다 입장이 달라서 서로 충돌이 많이 발생하죠..

제가 그 동안 올린 글이 진정성 위주였는데 사실 제 요새 관심은 완전성 쪽이라.. ㅎㅎ 다음 글에서 완전성에 대한 걸 유럽 사례로 다루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이쪽도 보존 학계에서 정답 없이 아주 치열하게 서로 싸우는 쟁점이라.... ㅜ

2020-08-30 00:32:42

ㅋㅋㅋ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도교수님이 전공이시고 저는 아닙니다... 보존 주제로 논문을 쓰지도 않아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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