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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 게임 판도 뇌피셜 시나리오와 실제 역사를 비교해보자 - 1 (아프리카, 중동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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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1-26 21:37:43

사실 크킹과 같은 계통의 게임들에서 가장 큰 재미 요소는, 액션 RPG 퀘스트 클리어하듯 '이걸 해냈다!'라는 성취감에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가문의 모습과 세상의 구도를 보면서 [내가 조작하여 구성해낸 세계관] 그 자체를 관람하고 즐기는 재미 요소가 훨씬 크다고 보는 편입니다.(세상을 내 마음대로 조작하고 구축하는 재미?)

 

말하자면 이런 류의 게임들은 진행하면서 그 상황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뇌피셜'하며 자체적으로 구축한 시나리오를 관람하는 재미 요소가 굉장히 크다고 여겨집니다. 마치 영화 줄거리 작가가 줄거리를 짜놓고 스토리 진행 과정 중의 세부적인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게임 판도를 짜놓고 이런 형태로 진행된 상황이 후대에 역사로써 어떻게 여겨질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에서 꽤 재미를 느끼는 편입니다. 특히 진행된 판도와 실제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그 괴리를 의도적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나름대로 역사 공부에도 괜찮은 부분이 있기도 하구요.


여하간 간만에 크킹2 플레이 돌리면서 판도 전체를 아예 제 입맛대로 맞춰 놓고 시작하기로 하고 세팅을 끝마쳤는데 세팅 이전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상황이 돌아간 것인지를 뇌피셜로 가정하는 그 상상의 나래를 거쳐 판도를 세팅해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시나리오들이 각 지역 판도마다 세부적으로 구축되었고 이를 글로 써보면서 동시에 실제 역사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하는 일하고 아주 약간 비슷한 부분도 있군요.

 

하라는 게임 진행은 안하고 판도딸치고 뇌피셜로 시나리오만 짜고 있으니 혹자에게 시간낭비라면 낭비일 수 있겠고 딱히 부정은 안합니다만서도 뭐 게임에서 재미를 느끼는 방식은 자유로운 법이니 말이지요 :)) 


 

(사진 순서는 각 지역별로 위에서부터 국가 판도 - 종교 판도 - 문화 판도 - 왕조 판도)


 

 

 

 

 

서아프리카(말리, 카넴-보르누 방면) 시나리오 : 차드 호수를 기반으로 하는 농토와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남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카넴-보르누 사하라 사막 무역길의 수익을 기반으로 부족연맹체를 구성하고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사하라 이남 북중부 아프리카를 통합한 이타케무툼 왕조는 차드 제국을 건국. 차드 제국을 중심으로 국가 부족연합체 시스템의 집결력 강화를 위해 사하라 이남 서부-중부 아프리카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서아프리카 토착 다신교 신화에 대한 교리 개혁-조직화가 시도되었고 그리하여 최고 남성-전사신 동고를 기반으로하는 서아프리카 만신전 교리와 교단 조직이 형성되고 차드 제국을 중심으로 일종의 정교회식 분할 총대주교령 체제를 갖춘 종교 조직 구조가 서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

서아프리카 각 제부족들은 대부분 이 신흥 만신전 교단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개종하였으며 조직화된 종교 교단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결집시키기 용이해진 말리 지방 각 제부족 세력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한 끝에 소닌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시세 왕조 가나 왕국, 만데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케이타 왕조 만딩가 왕국, 송가이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주와 왕조 송가이 왕국이 건국되었음.

 

명목 상의 최고 군주는 차드 제국의 이타케무툼 왕조 고왕(황제의 격)들이었으나 차드 제국의 기술력, 전력으로는 실질적으로 서아프리카 각 국을 직접 간섭할 위력은 없었으며 종교 교단의 구조 자체도 형식적으로는 차드 제국의 최고대사제(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계와 마찬가지의 형태가 차드 제국 황제와 차드 최고대사제의 관계)가 교단의 최고위이나 각 지방 교구령에 간섭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에 서아프리카 각 왕국들 역시 각자의 총대사제들의 자체적인 조직들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할 명분을 확보.

이러한 개혁 교단과 조직화된 만신전 체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같은 진보한 조직화 종교가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로 침투할 여력이 거의 상실되게 되었음.


서아프리카 실제 역사 : 그런 거 없음. 실제 역사에서의 8세기 서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는 소규모 부족 국가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체제였으며 저리 통합된 대규모 국가체가 형성되지 못하였음. 차드 호수를 중심으로하는 중부 아프리카는 오랜기간 자그마한 군소 부족들의 체제로 유지되었고 서아프리카에서는 9세기부터(추정) 강대한 부족 집단을 중심으로 조금씩 큼직한 국가체들이 형성되었으나(가나 왕국의 태동) 저리 촘촘하게 조직화된 대규모 제국들은 아니었음.

종교적으로는 당시부터 이슬람의 교리를 조금씩 받아들이며 토착 신화의 조직화를 꾀한 흔적도 보이기는 하나 결국 10세기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이슬람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종래의 서-중부 아프리카 만신전은 미신 우상숭배로써 버려지는 추세에 접어들게 되었음. 11세기, 북아프리카 아마지그(일명 베르베르)인들이 건국한 무라비트 왕조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서아프리카 전역이 혼란에 빠지면서 거대 제국화를 꿈꾸던 가나 왕국의 야망은 좌절되었고 이슬람의 서아프리카 확산은 더더욱 빠르게 가속화함. 이후 이슬람을 신봉하면서도 아마지그 외래 지배층을 밀어내고 자체적인 토착 국가를 건설한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등이 등장.



 

 

 

 

 

동아프리카(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일부 방면) 시나리오 : 일찍부터 합성론 기독교가 자리잡은 해당 지역은 서아프리카, 중부 아프리카와는 달리 사하라 이남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조직화된 봉건적 제국들이 구축되었음. 노바티아에서 알로디아로 이어지는 통칭 수단(아랍인들이 붙인 명칭) 지역에는 고대 쿠시 왕국을 계승성을 강조하는 나이유비아(누비아)인들의 신 쿠시 왕국(메자위 왕조)이 건국되었으며 수도를 마쿠리아에 두고 북부의 미스르(이집트)-이슬람 세력, 서부의 차드 제국과 대치하게 되었음.

에티오피아 고원 지방에서는 흔히 에티오피아인으로 일컬어지는 암하라인, 오모로인, 티그리냐인 등이 섞여 있는 상태였는데 수도 곤다르를 중심으로 합성론 기독교를 믿으며 그대로 옛 악숨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던 솔로몬 왕조 곤다르 왕국은 국가 내부 혼란을 평정하고 국력을 일신, 에티오피아의 유대교 국가이던 베타 이스라엘(기드온 왕조)을 공격하여 멸하고 고원지대를 통일하였으며 이후 동진하여 아랍인 지배층들의 통치를 받던 아파르 지방을 정복하고 더더욱 동진, 소말리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아프리카의 뿔 방면을 장악하면서 강력한 제국을 재건하게 되었음. 소말리인들의 상당수는 남쪽으로 도망쳤고 잔존한 자들은 티그리냐인, 암하라인, 오모로인과 섞이면서 차츰 '야이티오피안'(에티오피안)으로써의 통합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

강성해진 곤다르 왕국은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붕괴 이후 분할된 중동 지역에서 예멘-오만 지방을 장악한 힘야르 왕국(이드리스 왕조)을 주적으로 놓고 대치하게 되었으며 남쪽에서 북쪽 진출을 노리는 소말리 소국가들도 일반적인 적들로 간주하게 되었음.


동아프리카 실제 역사 : 이 지역에서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매우 일찍부터 강력한 고대 국가들이 형성된 것은 사실이나 8세기경에는 대부분 각 부족 정체성 별로 분열하여 자체적인 춘추전국시대를 찍던 혼란기에 있던 상태였으므로 저토록 강력한 판도의 제국들은 등장하지 않았음. 오늘날의 수단인들의 조상격에 있는 당시 누비아인들은 마쿠리아, 알로디아, 노바티아 등의 소국들로 분열되어 압바스 칼리파조 이슬람 제국에게 공물을 납부하며 생존권을 보장받는 정도의 위치(이러한 아랍 제국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차근차근 이슬람의 영향도 받게 된)에 있었으며 또한 '옛 쿠시 제국을 계승하는 통합된 누비아 민족 집단'이라는 개념 자체도 있었는지 불분명함.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합성론 기독교를 중심으로 강력한 악숨 제국을 세워본 경력이 있던 에티오피아 고원인들(암하라, 오모로, 티그리냐인)은 당시에는 악숨 제국 체제가 사실상 형식만 남고 내부적으로는 산산조각나있던 상태 속에서 살았음. 기드온 왕조의 세미엔(유대교 국가, 일명 베타 이스라엘), 악숨 제국 황실 가문이었던 솔로몬 왕조의 악숨-곤다르, 기타 각 암하라, 오모로, 티그리냐인들의 소부족왕국들, 아랍인 지배층들의 아파르 지역, 소말리 제부족 연맹체들의 베르베라(아프리카의 뿔 방면) 지역들로 나뉘어 있었고 그나마 형식으로라도 남아있던 악숨 제국의 숨통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약 10세기 중엽 세미엔 베타 이스라엘의 여왕이었던 유디트의 공격 시기로 여겨짐.

그러나 베타 이스라엘과 유대교는 유디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고원을 장악, 통합할 수 없었고 12세기에 에티오피아 고원을 얼추 재통합한 세력은 합성론 기독교 왕조 '자그위 왕조'였음. 이들을 중심으로 에티오피아 전역이 안정세를 되찾자 국가체로써의 유대교 세력은 에티오피아 고원 지대에서 거의 종말을 맞이하였으며 13세기 말, 솔로몬 가문 출신의 예쿠노 암라크가 '악숨 제국 황실 솔로몬 가의 출신으로써 정당한 에티오피아 통치권 탈환'을 명분으로 삼아 봉기하여 자그위 왕조를 멸함으로써 솔로몬 왕조가 복위하였는데 이 솔로몬 왕조의 혈통은 무려 1974년(말제 하일레 셀라시에)까지 이어짐.

 

그러나 이러한 솔로몬 왕조의 재흥기와 중근세 에티오피아 제국의 중흥기에도 흔히 아프리카의 뿔로 알려져있는 소말리아 북부를 장악하지는 못하였으며 역으로 16세기, 소말리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영웅으로 기려지는 인물인 '아흐마드 그란'(그란은 별명이고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가지가 본명)의 소말리족이 에티오피아의 3/4를 정복해버리는 등 소말리족과 에티오피아계(암하라, 오모로, 티그리냐인)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투쟁하는 사이였음. 이슬람으로 개종한 소말리인들과 광신적인 합성론 기독교도들인 에티오피아인들은 동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유서깊은 최고의 라이벌들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

 

 


 

 

 

 

북아프리카 시나리오 : 아랍인 가문이던 무할라브 가문(알 무할라비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신하 가문으로써 미스르(이집트), 튀니지 지방의 총독으로 재임, 북아프리카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였음. 750년, 자브 강 전투에서 베르자단 아부 무슬림, 아불 알 압바스 앗 사파흐가 지휘하는 압바스 가문의 군세에게 우마이야 칼리파조 최후의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이끄는 우마이야 중앙군이 궤멸적인 대패를 당함으로써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사실상 멸망하자 무할라브 가문은 각각 튀니지, 미스르 지역에서 독립하게 되었음.

그러나 뒤이은 압바스 가문의 미스르 원정전을 맞이하여 대패, 미스르를 상실한 무할라브 가문 사람들은 튀니지 지역을 지배하던 무함마드 무할라비윤를 중심으로 재결집하였는데 모친이 잔존 카르타고인 계통의 후손들인 푸니인(푸닉Punic = 포에니인Phoenician = 카르타고인)이었던 무함마드는 모친의 문화적 정체성의 영향을 받아 독립 시기에 스스로의 이름을 옛 카르타고식 이름이던 기스코라고 바꾸고 카르타고의 계승성을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음. 마침 당시 북아프리카에 널리 퍼져있던 이바디 종파를 또다른 명분으로 삼은 기스코는 순니 종파에 대항하는 이바디 종파, 카르타고의 계승을 양대 명분으로 삼고 독립하였으나 동진할 엄두는 내지 못하였으며 트리폴리타니아에서 중동 세력의 침입을 최대한 막고 북아프리카를 통일하기 위한 서진을 개전. 이후 아마지그(베르베르) 소부족국가들로 나뉘어져있던 모로코-알제 지방을 완전히 정복하여 통합한 그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선포함으로써 무할라브 왕조 이프리키야 제국이 설립되었음.

제국의 장기적 존속을 위한 통합체 구상으로써 기스코는 아마지그 토호들을 대거 기용하여 영지를 분봉시키고 궁중에도 아마지그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스스로 아마지그화하였으며 아마지그인들의 조상인 고대 누미디아의 계승자를 자처하기도 하면서 수도를 마라케시로 옮기고 마우레타니아 지방 개발에 주력, 아랍계 왕조이던 무할라브 왕조의 아랍 정체성은 사실상 사라져 아마지그계로 변화하게 되었음. 이러한 무할라브 왕조 이프리키야 제국의 주된 적은 남쪽의 서-중부 아프리카 국가들, 히스파니아 반도의 알-안달루스 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이었고 또한 종종 미스르의 압바스 칼리파조와도 대립하게 되었음.


북아프리카 실제 역사
: 무할라브 가문이 한 때 튀니지, 이집트 전역을 아우르던 강력한 총독 가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까지는 중동 본토의 압바스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지방 통제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던 상태였으므로 모로코도 아니고 튀니지 지역에서 일개 총독이 중앙 정부를 무시한 채 독립된 국가체를 구성한다거나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음. 무할라브 가문은 충실한(?) 봉신 총독 집안으로 남아 있었고 훗날 압바스 칼리파조의 권위가 북아프리카에서 거의 붕괴할 무렵의 무할라브 가문은 아예 단절되었으며 튀니지 지방에서는 새로운 총독 가문이었던 아글라브 가문이 사실상 독립,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출신 총독이던 아흐마드 툴룬이 사실상 독립하여 툴룬 왕조를 세우는 형국이었음. 한편 북아프리카에 알-이바디의 이바디 종파가 한동안 유행했던 것은 사실이나 결국 북아프리카의 최종 승리 이슬람 종파는 이바디나 하리지파, 시아파(이드리스 왕조)가 아닌 순니파였음.

또한 무할라브 가문이 모계로 카르타고계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은 당연히 창작이며 실제 무할라브 가문은 아랍인 지배층으로써 소수민족(?) 위치에 있던 푸닉, 반달, 로마 사람들을 탄압하고 아마지그 토호 제부족 집단을 억제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의 모로코에 해당하는 당시 마우레타니아 지방은 아랍계 왕조인 이드리스 왕조의 통치 범위가 가장 넓기는 했으나 많은 지방에서 압바스 조와 후우마이야 조의 지배를 간접적으로 받는 자그마한 아마지그 군소 부족 국가들의 춘추전국시대가 반복된 것으로 여겨짐. 최초의 아마지그 자체 통합 국가가 등장한 시점은 이드리스, 압바스, 후우마이야 등이 모조리 몰락한 이후인 1040년 무라비트 왕조의 건국 시기임.(스페인어로는 알모라비데스, 아마지그어로는 므라브덴, 또는 이므랴브뎬 왕조)


 

 

 

 

 

 


중동 서부(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방면) 시나리오 : 아랍 이슬람 제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던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750년 최후의 발악이던 자브 강 전투에서 압바스 가문의 군세에게 대패하면서 사실상 멸망하자 일시적인 판도는 아불 알 압바스 앗 사파흐가 이끄는 압바스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음. 그러나 압바스 가문의 런닝메이트였던 하심 가문은 압바스 가문의 독자적인 순니 칼리파 칭호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내부적으로 사이이드(시아 알리의 부계 후손들로 주로 하심, 파티마, 이드리스 가문 사람들) 세력을 재규합, 압바스 가문에게 대항하게 되었음.

하심 가문의 분가 집안인 파티마 가문에서 배출된 뛰어난 지휘관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자파르 알 사디크의 손자)은 사이이드들의 대전사격으로 임명되어 압바스 가문에게 도전하였는데, 아라비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베두인과 하사신들의 지지를 받는 하심 가문의 하산 이븐 자이드의 후원에 힘입은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 베두인들, 시리아의 시아파 지지자, 하사신들을 통한 대규모 병력 규합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의 압바스 가문 본거를 공략 시도하였음.

이에 맞서 압바스 가문의 지지층이 되어주어야할 이란 고원 마왈리(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인들)들은, 따로이 본인의 제국을 세울 야심으로 압바스 가문 내부에서 독자 행동을 하던 베르자단 아부 무슬림 알 호라사니에게 더욱 큰 지지표를 보내고 있었음. 마침내 이라크에서 아부 무슬림의 독립 봉기가 일어나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대부분의 마왈리들은 아부 무슬림에게 붙었고 이로인하여 본거인 이라크와 이란 고원을 대부분 상실한 압바스 가문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함.

뒤이어 하사신 일파를 이끌던 하산 이븐 자이드가 파견한 하사신 암살자들에게 아불 알 압바스 앗 사파흐가 살해되자 그 뒤를 이은 형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는 전력의 열세, 양면전선의 위협, 암살자들의 위협을 감당하지 못하여 지지자 잔당들을 이끌고 이라크, 시리아에서 도망쳐 미스르(이집트)로 가게 되었음.

미스르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던 무할라브 왕조의 기스코는 미스르가 중동 본국으로부터의 방파제가 되기를 바랬으므로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와 압바스 잔당 세력을 기꺼이 반기며 그들이 미스르를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대가로 아부 자파르가 순니 종파를 포기하고 이바디 종파의 칼리파 자리에 취임함으로써 북아프리카인(아마지그인, 이집트인) 전체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을 권유하였는데 몰릴 대로 몰린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 역시 이를 납득, 미스르를 장악한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는 이바디 종파로 개종하고 칼리파 자리에 취임함으로써 이집트의 왕이자 형식 상이나마 모든 이바디 종파 무슬림들의 최고 군주 칼리파 자리에 앉게 되었음.

그러나 뛰어난 군주였던 알 만수르는 곧 평정한 미스르의 내치를 확고히 재편하고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고 시나이 반도를 평정, 시리아-아라비아를 장악한 사이이드들의 이집트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으며 역으로 호시탐탐 시리아 진출을 꾀하는 위치를 다질 수 있었고 또한 명목 상의 일이긴 해도 이바디 종파의 칼리파로써 모든 이바디 신도의 최고 종교 지도자 자리를 세습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명분으로 삼아 지속적으로 서쪽의 아마지그인들, 무할라브 왕조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음.

압바스 가문을 시리아에서 쫓아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의 다마슈크(다마스쿠스)를 장악, 이를 수도로 삼아 새로운 '파티마 칼리파조 시아파 아랍 이슬람 제국'을 시작시킴. 무함마드는 순니파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매우 잔학한 압제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로인해 곧 아라비아, 시리아 전역은 시아파화하였고 사이이드의 혈통, 즉 시아 알리의 후손들만이 아랍 이슬람 세계를 이끌 혈통적 명분을 쥘 수 있다는 법제를 성문화함으로써 시아 칼리파 자리는 파티마, 하심 가문만이 노릴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음.

시리아와 아라비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제국이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파티마 칼리파조의 직할 범위는 시리아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은 하심 가문이 사실상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로 세습 통치하게 되었기에 일종의 이중제국 체제화하였으며 파티마 가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샤미이(시리아인)인화고 반면 아라비아 반도에 남은 하심 가문 사람들은 바다위(아랍-베두인인)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파티마 칼리파조는 점차 기묘한 이중제국의 형태를 띄게 되었으며 이 이중제국은 하사신 집단의 비대칭 무력을 통해 통제되는 경향이 있었음.

아라비아 반도 최남단인 예멘과 오만 지역에서는 오랜기간 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유대교나 토착 셈햄 신앙을 숭배하던 아랍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이러한 남아랍인들은 오랜기간 북아랍인, 시리아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곤 했는데 오랜 차별과 냉대에서 벗어나고자 비록 이슬람화하기는 했으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국가체 설립을 원했던 예멘, 오만 아랍인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 붕괴-뒤이은 파티마-하심 vs 압바스의 대결 구도를 기회로 삼아 봉기하였음. 이러한 예멘, 오만인들을 아울러 아라비아 남부를 장악한 것이 사이이드의 일원이던 이드리스 1세로써 이드리스 왕조 힘야르 왕국이 개창되었음.

이드리스 1세 본인은 사이이드이기는 하나 아라비아 북부, 중부, 시리아가 전부 시아파 제국화하는 상태에서 본인의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종파를 국가 종교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형식적으로 압바스 칼리파조 미스르를 상국으로 삼고 이바디파를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시아파인 북아랍과 이바디파인 남아랍은 영구히 분리되었음. 이로써 구 아랍 이슬람 제국은 크게 삼분되어 이집트를 기반으로 하는 압바스 칼리파조(이바디파), 시리아-아라비아 본토를 기반으로 하는 파티마 칼리파조(시아파, 파티마-하심 이중제국), 예멘-오만을 기반으로 하는 이드리스 왕조(이바디파)로 갈라졌으며 민족적으로도 미스르인(이집트인), 샤미이인(시리아인), 바다위인(아랍-베두인인)의 분화 의식이 매우 뚜렷해지는 시작점이 되었음.

한편 압바스 가문의 순니파 패권 제국 구축 저지에 결정타를 입힌 베르자단 아부 무슬림은 이란인 마왈리, 쿠르드 부족장들을 이끌고 이라크, 알-자지라, 이란 고원 상당부분을 장악하여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크테시폰으로 정하였으며 곧 크테시폰을 대체할 세계 최대의 계획 도시 '바그다드' 조영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음. 자신의 별명 중 하나인 알 후라사니로 인하여 그의 제국은 으레 '호라사니 왕조'로 불리게 되었으며 아부 무슬림의 핵심 수하들 대다수가 쿠르드인들이었고 호라사니 왕가 자체도 파르시(페르시아인)인이 아닌 쿠르드인화하면서 호라사니 왕조는 쿠르드인 최초의 국가로 여겨지고 있음.

시아파를 따르지 않고 순니파를 계속해서 믿으면서 수도 크테시폰(->바그다드)를 기반으로 시리아 진격을 호시탐탐 노리는 입장이던 아부 무슬림의 위치로 인해 이라크 지방은 중동 수니파 최후의 보루로 남게 되었고 쿠르디스탄 인근에서 거주하며 인구가 폭증해가던 쿠르드인들의 대대적인 이라크, 모술 방면으로의 이주로 옛 아수리스탄 전역은 쿠르드화하였으며 이것은 쿠르드 민족 국가 의식의 첫 걸음이라는 의의도 가지게 되었음.


중동 서부 실제 역사 :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서기 750년 경에 압바스 가문과 아부 무슬림의 마왈리 군세에게 격멸당하고 사실상 멸망한 것까지는 실제 역사와 같으나 시나리오와는 달리 아부 무슬림은 딱히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이란 고원, 호라산의 거의 모든 마왈리들이 지속적으로 압바스 가문을 지지하게끔 유도한 장본인으로 추정됨. 또한 하사신이 당시 존재했다는 것도 창작이므로(하사신의 태동 시기는 약 11세기) 당시 시아파 집단은 딱히 암살자들을 부린 적이 없었으며 아불 알 압바스 앗 사파흐는 그냥 급사로 사망한 것.

압바스 칼리파조 2대 칼리파이자 압바스조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는 오랜 치세에 걸쳐 강경책과 유화책을 번갈아가며 사용하여 시아파 세력을 약화시키고 하심 가문을 무릎 꿇렸으며 이드리스 1세와 파티마 가문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북아프리카로 도망침으로써 각각 모로코와 튀니지 지역에 정착하여 훗날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음.(8세기 이드리스 왕조의 건립, 909년 파티마 왕조의 건립) 중동 이슬람 종파의 절대다수가 순니파로 확정적으로 굳어진 것도 이러한 압바스 가문의 승리에 힘입은 것.

큰 위기를 넘겨낸 알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을 굉장히 손쉽게 숙청해버렸고(아부 무슬림이 알 만수르의 도발에도 딱히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시키는대로 수도로 어정거리며 갔다가 그대로 참살당한 것도 아부 무슬림에게 딱히 반란 의사는 없었음을 시사) 뒤이어 아부 무슬림의 비참한 죽음에 격노한 이란 마왈리, 구 조로아스터 신봉자 이란인들의 대규모 반란들(순파드의 난, 이샤크의 난, 알 무칸나의 난, 바바크 호람딘의 난)은 압바스 칼리파조 전체를 크게 뒤흔들 정도의 규모였으나 이를 하나하나 모두 진압하는 것마저 성공해내면서 압바스 칼리파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중동 패권 권위는 완전히 반석 위로 올라갔으며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국가들을 통틀어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를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압바스 칼리파조의 백년 황금기가 그렇게 시작되었음.

시나리오 내에서는 시아파가 아랍 세계 패권 경쟁에서 사실상 승리하고 파티마-하심의 연대 형식으로 구축된 제국의 시스템 덕에 세부 분파들로 분화될 일이 거의 없겠으나 실제 역사 속의 시아파는 순니파와 압바스 칼리파조의 탄압 속에서 사이이드(시아 알리의 후손들)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 살다보니 그러한 각 지역 사이이드들을 지지하는 각 지역 시아파들의 제각기 다른 문제들로 지속적으로 분화되었음.

앞서 시나리오에서 언급된 인물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경우 실제 역사에서는 시아파의 소수 분파인 니자리파(하사신으로 유명한 분파), 드루즈파와 보흐라파, 하피지파 계통에서만 시아파의 적통으로 인정받는 입장이고 시아파 전체의 인정을 받지는 못함. 현대 시아파 대다수를 차지하는 12이맘파(현대 이란이 이 12이맘파)는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조부인 자파르 알 사디크의 삼남 무사 이븐 자파르 알 카딤의 계보를 시아파의 적통으로 여기며 그 외에도 많은 시아파 분파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의 시아파 적통 이맘 계통이 정통임을 주장하고 있음.

예멘-오만 지역 역시 딱히 당시로써는 독립하지 못하는 상태였고(그러나 오만 지방을 중심으로 이바디파가 크게 흥성한 것은 사실) 남아랍계에 대한 차별 정책은 압바스 칼리파조 치세에도 지속되었음. 이드리스 1세가 도망쳐 자신의 왕조를 건국한 지역은 예멘-오만 방면이 아닌 모로코 지역. 쿠르드인들 역시 소규모 부족 집단으로 흩어져 사는 삶을 유지하며 쿠르디스탄으로 으레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이란 서북부, 터키 동북부, 아르메니아 남단에 분포하는 정도였고 그들 역시 이란계로써 친 아부 무슬림적인 태도는 가지고 있었겠지만 딱히 아부 무슬림과 정체성 면에서 관련이 있는 민족 집단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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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1-26 21:45:58

메자위 하니까 미이라의 메자이족 생각이

OP
Updated at 2020-11-26 21:53:09
메자이 집단은 무려 실제로 존재했던 조직으로 원래는 누비아계 유목민 집단(따라서 흑인들이었을 것)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집트 파라오들의 친위 경호대 노릇을 하게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영화 미이라의 메자이들은 숫재 백인 무슬림들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실제 역사 속의 메자이들은 고대 이집트 제 20왕조 시기 즈음에 소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Updated at 2020-11-26 23:40:53

3에서는 기니만까지 확장해줘서 시원한데 간만에 2지도로 보니까 답답한 느낌이네요ㅋㅋ
후편들도 기대하겠습니다ㅎㅎ

OP
2020-11-27 22:20:08

크킹3는 사놓고 계속 묵혀두고는 있는데 그래도 몽골 본토 거의 대부분하고 아프리카도 서아프리카 해안 거의 나오는 정도까지 확장된 지도는 확실히 마음에 들더군요 :))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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