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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상징성'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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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 16:04:28

 

이따금씩 꼭 떠오르는 주제가 있다. 월드컵 시즌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만간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다. 이른바, 축구계 'GOAT'는 누구를 위한 성좌이냐는 논쟁이다. 줄 세우는 걸 좋아하는게 사람의 본성이라 그런지 이 보다 흥미로운 주제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주제 참 만만치가 않은 듯하다. 어느 기관, 어느 전문가, 어느 팬이 내놓은 평가이냐에 따라 평가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서 베이브 루스라는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야구와 비교했을 때 축구만의 특색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프 선상의 평균치로 선수의 가치를 환원하기에는 비교적 한계가 명확한 축구라는 팀 스포츠의 고유한 숙명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숙명에서 누구 보다도 자유로울 수 없는 어느 프로 축구 선수에 대한 짧은 성찰이다. 그 이름은 펠레.

 

나로선 펠레의 축구를 공정한 입장에서 평가하기엔 그의 축구를 제대로 감상한 적이 없다. 축구사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경기를 안 볼래야 안 볼수는 없었지만, 기실 대다수의 영상자료가 소실된지 오래이니까. 하지만 자료 수집의 어려움을 떠나서 그의 축구를 공정하게 평가하는데 또 한 가지의 결정적인 난점이 있다. 먼저 펠레라는 축구 황제가 평정했던 한 시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할 만큼 발전된 오늘날의 축구 환경이 그렇다. 따라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펠레 시대의 묘기가 불러일으켰던 그 시대 그 순간의 감흥을 지금에 와 소생시킬 방도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순수하게 축구 외적인 측면에서도 애로 사항이 존재한다. 마치 경기장 한복판에서 실시간으로 내가 숨쉬고 있는듯 축구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 해주는 중계 기술의 발전까지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와 같은 난점이 나에게 한정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펠레의 시대를 눈으로 목격한 앞 세대의 발언권에 좀 더 무게를 두는 최후의 방안이야 있겠다만, 이 역시 공정할리가 없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며 추억 속에 사는 것은 언제나 달콤한 법이다. 펠레의 축구 시대를 경험한 앞 세대의 전설들이 심지어 아르헨티나라는 국적에도 불구하고 앞 다투어 으레 그러하곤 하는, 그들의 펠레에 대한 경외 어린 전언을 무작정 수용하자니 반드시 비약이 뒤따른다. 적어도 상당수의 축구 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른바 펠레에 대한 '과대평가론'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심치 않게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경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21세기의 축구 판도 마저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축구 선수' 펠레에게 불리한 형국임이 사실이다. 이미 세계 축구계에서 남미 대륙의 위축되어가는 위상 문제는 재론할 필요도 없는 당면의 현실이다. 이 때문에 '축구 선수' 펠레의 위상은 지금 보다도 시일이 흐를수록 낮아질 것이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놀라울 정도로 간단명료하게 처리되곤 하는 한 가지 문제에 국한하는 선에서, 앞 세대에 빚진 축구 팬으로서 자신 있게 펠레의 축구사적 위상에 대하여 제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른바 '상징성'이라는 말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곤 하는 펠레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단순히 펠레 자신의 축구 커리어를 재론하고자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펠레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 하에 펠레 전후의 축구의 위상 변화와 결부된 문제다. 하나의 사회문제로서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그제서야 태동이나마 하던 어두운 시대에, 차별에 찌든 어느 가난한 흑인 소년이 지역단위로 흩어져 있던 각자도생의 축구계를 그 자신으로써 하나로 만든 서사. 그 서사가 그려지는 과정에서 현대 축구가 가진 지구촌 최대의 축제로서의 위상이 확립될 수 있었다. 정보의 교류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던 그 시절, 펠레라는 축구 선수가 공 하나로 온 세상을 울고 웃겼다. 오히려 매스 미디어의 효율성이 극대화된 오늘에 이르러서 펠레 이상의 축구 스타가 부재하다는 것이 하나의 기적과 같이 느껴진다. 현대적인 형태의 축구는 이렇듯 펠레가 쌓아올린 축구공의 위상 위에서 비로소 성립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진 빚을 그저 '상징성'이라는 박물관의 유물로서 퉁 칠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게 펠레여서 가능했던 것이냐고? 글쎄, 역사를 시뮬레이션할 도리는 없으니까. 매우 당연하게도 이 모든게 펠레 한 명만의 공로는 아니리라. 그러나 축구라는 대중 스포츠의 상업적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려 하던 그때, 진정한 주인공을 필요로 하던 축구계에 그가 하나의 완벽한 대답이었음도 결코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 세대에 많은 것을 빚진 축구 팬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할아버지들의 축구 영웅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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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2-08-09 16:31:43

펠레의 축구 시대를 경험한 앞 세대의 전설들이 심지어 아르헨티나라는 국적에도 불구하고 앞 다투어 으레 그러하곤 하는, 그들의 펠레에 대한 경외 어린 전언을 무작정 수용하자니 반드시 비약이 뒤따른다.

이걸 현세대에 마라도나라고 치환하면 똑같다고 생각. 지금 유럽의 주된 선출, 기자 평론가세대는 거의 마라도나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감안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OP
2022-08-09 16:37:01

동감합니다. 

2022-08-09 16:40:18

그리고 전 잉글랜드인들의 특유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는데 본인들이 지면 그 상대를 굉장히 올려쳐주는 느낌이 있더군요. 마라도나 86 월드컵의 위상은 그 8강 잉글랜드전에서 완성됐다고 봅니다. 본인들을 자조적으로 까는 성향과 자신들을 이긴 상대를 올려치는 성향이 합쳐진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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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 16:51:22

축구 = 월드컵 = 펠레

2022-08-09 18:12:21

그 누구보다 타고난 영웅의 기질이 있었던 선수 같음

Updated at 2022-08-09 20:32:09

상징(icon)의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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