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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철학 지식을 뽐내고 싶을 때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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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16 14:45:33

아는척하기가 다 그렇듯, 철학에 대해 아는척 하려면 난해하기로 유명한 철학서들을 거론하면서 살짝 비틀어주면 됩니다.


예시)

 

칸트: “<순수이성비판>은 위대한 철학서지만 칸트가 자신의 사유의 급진성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게 흠이죠. 칸트 철학은 피히테, 셸링, 헤겔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렇게 시작하시고, 독일어를 하실 수 있으면 한국 칸트 학계에서 transzendental이란 용어의 번역을 두고 있었던 논란(‘선험적’이냐 ‘초월적’이냐)을 살짝 언급해주면서 '그냥 원서를 읽으면 되는데 왜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셔도 됩니다.

 

헤겔: “<정신현상학>이 쉬운 책은 아닐수도 있지만, 까놓고 말해서 헤겔의 철학 체계 내에서 중요도는 <정신현상학>을 아늑히 뛰어넘는 <대논리학>에 비하자면 소설책 수준의 난이도죠.” 여기에 <정신현상학>을 가장 어려운 철학서로 꼽는 사람들은 분명 전공자는 아닐 거라고 한마디 추가해 줘도 될 듯.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요? 전통적 해석을 따르든 ‘단호한 해석’을 따르든, 근본적으로 <논고>는 철 지난 진리대응론의 일종을 거창하게 써놓은 것에 지나지 않죠ㅎㅎㅎ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가 철학 전반에 끼진 영향도 더 크고 난이도도 더 높은 게 팩트죠”, 하면서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행적과 미스테리한 7번 명제 때문에 과대평가된 거 아니겠냐고 되물어주면 있어보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비판이론: “하버마스니 악셀 호네트니 하는 양반들에겐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참신함과 급진성이 없죠. 1세대 인물 중에서도 잘 팔리게 책 제목 짓는 능력(여기서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언급해주시면 됩니다)만 조금 있었던 에리히 프롬은 기존 프랑크푸르트 학파 멤버들에게 멍청하다고 무시당하다 삐쳐서 나갔고, 마르쿠제는 미국 학생들한테 인기 얻는 데나 골몰했지 그의 사유의 깊이는 결코 깊다고 할 수 없죠. 결국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건질건 아도르도의 <부정변증법> 정도네요”.

<부정변증법>은 어차피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만큼, 첫 페이지만 읽으신 후, “이 책의 첫 문장부터 드러나는 아도르노의 치열한 문제의식은 현대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접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요”라고 하신 후, “후하게 쳐줘서 <계몽의 변증법>도 그럭저럭 봐줄 만 하죠” 하면서 웃으시면 됩니다.

 

레비나스: “레비나스의 사상이 요즘 윤리 담론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하면 <전체성과 무한>이나 <존재와 다르게>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군요. 그양반은 초기 저작대로 쭉 갔으면 괜찮은 현상학자로 남았을 텐데” 하면서 안타깝다는 듯이 혀끝을 차주시면 됩니다.

 

들뢰즈: “<앙티외디푸스> 하면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좋은 철학자였다. 가타리를 만나기 전까진’*”. 이다음에 ‘할 말은 많지만, 당신이 지겨울까봐 오늘은 이 정도만 해둔다’는 표정을 지으시면 됩니다.

(* 제 교수님 한분이 실제로 한 말)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이 히트 친 이후로 영미권 철학자 언급하는 일도 늘어난 것 같아서 누군가 분석철학을 언급할 경우를 대비해 다음 정도만 기억해 두시면 좋을 듯:

“롤즈의 정치사회철학은 탈정치적이고 콰인의 인식론은 철학을 자연과학의 시녀로 만들었죠. 그들의 틀에 갇혀있는 작금의 영미 철학은 진지하게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동양철학에 관한 당신의 의견을 묻는다면 “동양철학이란 건 까놓고 말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훈고학일 뿐이죠” 정도 해두고, 반론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 “실제로 니시 아마네가 philosophy의 번역어로 ‘철학’을 제시하며 때 동양에는 philosophy에 대응하는 지적 전통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와 같이 질문으로 마치는 게 좋겠군요.

 

모두 이름 정도는은 들어봤을 철학자를 거론하여 당신의 배경지식을 뽐낸 후엔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현대철학자 이름을 들먹이세요. 읽은 사람이 없으니 반론 따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데리다 해체주의 타령하고 후설 현상학 타령 할 건가요? 21세기에 메타철학을 하고 싶으면 프랑수아 라뤼엘을, 현상학 하고 싶으면 미셸 앙리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와야 하는 것 아닙니다? 독일철학 파는 애들도 하이데거는 좀 놓아주고 마르쿠스 가브리엘 정도는 읽어야 시대에 안뒤쳐지죠ㅉㅉㅉ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이들은 영미권 힙스터들의 아이돌에 지나지 않죠. 입에 담기를 일절 거부합니다.”

이 정도면 당신의 철학사적 지식이 현대철학 전반을 커버한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며 철학에 대한 당신의 확고한 신념과 열정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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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6-09 19:51:58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이라는 책이 생각나는 글이군요

2020-06-09 20:00:27

딴지일보 시리즈였던거 같은데 단행본이 있나보네욧?

2020-06-09 20:06:40

외국 저자의 책인걸로 보아

아마 생각하시는 시리즈랑은 다른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Updated at 2020-06-09 19:59:48

데리다 후설 정도는 이제 시즌 아웃이군요
하긴 학부때 교수님들 최애였으니 그럴만도 하네요...

칸트만 좀 기억나는데 여기 쓰여진 정도면 훌륭한데요ㄷㄷ

OP
2020-06-09 20:05:42
적극적인 연구 대상으로서의 데리다의 위상은 예전보단 떨어진 듯 하지만 유럽철학 공부하면 다들 읽기는 하고, 후설은 현상학의 창시자이자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하이데거의 스승으로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 절대 잊혀질 일은  없을겁니다.
마지막 문단의 포인트는 주류인 데리다나 후설보다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을 언급하여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뽐내는것!
2020-06-09 20:13:00

네 스노브 기준으로 얘기하는거죠ㅎㅎ

2020-06-09 20:09:32

사실상 맞는말 대잔치 ㄷㄷ

2020-06-09 20:11:21

우와... 갖고 싶다 이 남자...

2020-06-09 20:15:44

빨리 구글스칼라 검색해서 피인용수 적당한 사람 이름 외워야겠네요 ㄷㄷ

2020-06-09 20:16:02

그럼요 논고 읽는건 허세죠..

2020-06-09 20:29:12

스크랩 해놓겠습니다

2020-06-09 20:47:54

제가 들뢰즈에 관심이 생겨서(마음의 사회학이랑 책을 통해) 앙티외디푸스 책 샀다가 뭔 말인지 1도 모른채 한 30 페이지까지 읽다가 그대로 책장에 있네요ㅋㅋ

2020-06-09 21:13:46

철학 전공하셨나요? ㅋㅋㅋㅋㅋㅋ 학과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할 법한 이야기가 세랴에 올라 오니 반갑네요. transzendental 이야기부터 피식 웃었습니다.

칸트, 헤겔까지는 '오 이런 이야기를 하네' 또는 '에이 무슨' 이런 반응까지는 나올 것 같은데 나머지 학자는 그게 뭐야 밥이나 먹자 라고 하지 않을런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OP
2020-06-10 00:04:37

답변이 늦었네요. 네, 철학 전공입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학교 다닐때 술자리에서 제가 농담 섞어서 했던 말이나 들었던 말을 아주 약간 반영하긴 했네요ㅎㅎ

2020-06-10 00:48:24

ㅋㅋㅋㅋㅋ
역시 유럽 본토에서 원어로 철학 배우신 분!!

저는 하버마스, 들뢰즈, 롤즈 정도만 피상적으로 다루네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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