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안 다이슬러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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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비운의 축구선수를 꼽으면 꼭 한 자리를 차지하는 선수가 바로 다이슬러인데요.. 2000년대 초반 무너져가던 독일축구의 한줄기 희망으로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으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한 선수죠.
1998년에 18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2000년에는 20세의 나이로 국가대표 데뷔 및 유로 2000 참가.. 당시 보수적이던 독일축구계에서 아주 흔치 않은 경우였죠. 우측면과 중앙을 넘나들면서 영리하고 창의적인 플레이에 섬세한 드리블과 날카로운 크로스까지 겸비해서 대단한 기대를 모았고 바이에른 뮌헨이 2001년에 2천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투자해서 2002년 월드컵 이후 합류하는 조건으로 영입을 했죠. 당시 독일의 에이스로 거듭났던 발락의 이적료가 2천 8백만 마르크였으니 다이슬러에 대한 바이언의 기대치가 발락 못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 즈음부터 부상이 다이슬러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는데.. 2001/02시즌 중에 큰 무릎부상을 당해 6개월 가량의 공백이 있었고, 월드컵을 앞두고 복귀하였으나 5월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상대선수와의 충돌로 또 다시 무릎이 크게 손상되면서 결국 월드컵 무대를 밞지 못했죠. 당시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 메메트 숄에 다이슬러까지 공수양면에서 핵심들이 여럿 빠진 독일은 역대 최약체 전력으로 평가받으면서 조별예선 탈락을 걱정하는 처지에 몰렸습니다만.. 올리버 칸이 월드컵 역사상 골키퍼로서의 가장 위대한 활약을 펼치면서 매 경기 불안불안한 수비하던 수비진의 약점을 극복했고, 공격에서는 조별예선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 토너먼트에서는 미카엘 발락의 하드캐리로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결승전까지 진출했죠. 다이슬러의 공백도 베른트 슈나이더가 잘 매워냈고..
다시 다이슬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월드컵 직전에 당한 무릎부상이 이듬해 초까지 이어지면서 바이언에서의 데뷔도 그 만큼 늦어졌습니다. 여담으로 다이슬러는 바이언에서 등번호 26번을 달고 뛰었는데 원래는 10번 셔츠를 입히려고 했으나 치리아코 스포르자라고 10번을 달던 선수가 있어 임시번호 격으로 베를린 시절에도 썼던 26번을 줬죠. 그리고 스포르자가 금새 이적을 하면서 10번이 비었는데 26번 셔츠가 너무 많이 팔리는 바람에 그냥 26번으로 고정.. 10번은 이듬 해 입단한 로이 마카이의 몪이 되었죠.
아무튼 입단 첫 시즌인 2002/03시즌에는 시즌 막바지에나 복귀해서 감각을 조율하는 선에서 끝마쳤고 이듬해인 2003/04시즌은 개막 이후 우측면을 주로 담당하면서 모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충족시키는가 싶었는데.. 이 때 또 부상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우울증까지 찾아오면서 정신병동에 장기간 입원해서 치료를 받기도 했고.. 그렇게 시즌 막바지까지 복귀하지 못했고 바이언은 베르더 브레멘에 밀려서 분데스리가 우승에 실패했죠. 사실 우측면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나 하산 살리하미지치와 같은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다이슬러의 공백이 결정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아무튼 분명 아쉬움이 있었죠.
이듬해인 2004/05시즌은 그나마 다이슬러가 많은 경기를 소화했던 시즌입니다. 자잘한 공백은 있었지만 큰 공백기 없이 분데스리가에서 23경기, 컵대회까지 포함해서 거의 30경기를 출전하였는데 그러나 이 시기의 활약은 좋지 못했습니다. 우선 계속되는 부상으로 정신적인 부담도 있었고 실제로 시즌 중에 우울증 증세가 재발해서 치료 차 결장한 기간도 있었고.. 또 신체적으로도 많이 무너져서 예전의 폭발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죠. 몸이 안따라주니까 움직임도 둔해지고 그나마 킥은 어느정도 살아있어서 측면에서 가끔 날카로운 크로스 올려주는 것과 가끔 나오는 센스있는 플레이 정도로 공헌하는 정도였죠.
시즌이 끝난 후에는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나왔는데 이 때가 또 희망을 봤던 시기였습니다. 위르겐 클린스만의 개혁으로 만들어지던 젊은 독일이 서서히 성과를 내던 때였는데 다이슬러는 이 대회에 나와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케빈 쿠라니 등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면서 매 경기를 다득점 경기로 만들어냈죠.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같은 강팀들과도 멋진 경기를 했고.. 그러면서 2005/06시즌도 의욕적으로 출발했는데 챔피언스리그 조별에선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2경기 모두 좋은 활약을 하는 등 꾸준히 출전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 또 다시 큰 부상이 찾아옵니다. 8개월 가량 이어진 이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의 꿈도 또 다시 무산되었죠.
그리고 다이슬러의 마지막이 된 2006/07시즌은 전반기 막바지에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귀하였는데 이 복귀전이 상당히 강렬했습니다. 함부르크와의 경기였는데 후반에 교체로 투입되어 경기의 향방을 바꾸는 활약을 했죠. 당시 바이언이 발락의 이탈로 선장잃은 배가 되면서 침몰을 거듭하던 시기였는데 다이슬러의 이러한 활약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죠. 플레이메이커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카드였으니..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훈련 중에 오언 하그리브스와 충돌하는 사고로 또 다시 무릎에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윈터브레이크 기간에 은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당시의 나이가 27세.. 막 전성기로 접어들어야 할 나이였으니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과거 다이슬러와 거의 똑같은 일을 겪었던 이가 있는데 바로 바이언의 울리 회네스 회장입니다. 천재 플레이메이커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다이슬러와 같은 27세에 은퇴를 선언, 이후 젊은 나이에 단장으로 부임하여 엄청난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바이언을 독일에서 아주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죠.. 그래서 다이슬러가 은퇴할 때 회네스 회장은 다이슬러에 대한 다방면의 지원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추후 선수복귀 의사가 있을 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뜻까지 밝혔으나 복귀 뿐만 아니라 축구계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2009년에 책을 한 번 냈었고 이후에는 2013년에 전 에이전트를 상대로 한 소송 건에 연루된 것 외에는 미디어에 전혀 노출된 바가 없습니다.
사실 다이슬러에게 기대했던 것은 이후 세대의 메수트 외질, 마리오 괴체 이런 선수들이 상당부분, 어쩌면 그 이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독일 국가대표팀이 꽤 오랜 기간 세계 최고급의 전력으로 평가받으며 높은 위치에 군림햇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 우승이라는 최고의 성과도 있었고.. 더구나 사실 다이슬러는 분데스리가 내에서조차 리그 최고급의 활약을 했던 것은 단 한 시즌도 없었죠. 유망주 때는 어디까지나 유망주로서 우수한 활약이었고 이후에는 부상으로 커리어의 연속성이 상실되엇을 뿐만 아니라 기량도 발전하지 못했으니..
그럼에도 아직 많은 독일축구팬들이 다이슬러를 잊지 못하고 일부는 외질, 괴체 이런 선수들보다도 더 높은 재능으로 평가하는데는 그 만큼 2000년대 초반의 독일축구계가 암울했고 다이슬러에 대한 기대치는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구세주와도 같았다는 점.. 또한 외질, 괴체 등 2000년대 후반 이후 쏟아져나오는 독일의 플레이메이커 감들 대부분이 세기나 폭발력 이런 부분과는 거리가 다소 있다는 점.. 반면 다이슬러는 이런 요소들을 갖춘 선수였기에 요즘의 독일축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팬들로서는 다이슬러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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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참 다이슬러 좋아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