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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을 실현한 자, 디에고 마라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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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1-26 10:39:23

조나단 윌슨의 글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일자 르키프 표지

 

1920년대 아르헨티나는 급속히 떠오르는 이민 국가였다. 그들은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감각을 찾고 있었고 축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국민들을 한데 묶어주는 몇 안되는 것들 중의 하나였다. 당신의 배경이 무엇이든, 파랗고 하얀 줄무니 셔츠를 입은 대표팀이 승리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것은 대표팀이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함을 갖는 방식이었다.


그 논쟁은 엘 그라피코의 지면에 소개되었고, 아르헨티나의 축구는 준-식민지 같던 힘이 1차 세계 대전 시작 즈음에는 대부분 사라진 영국의 게임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 합치가 이루어졌다. 브리티쉬 스쿨의 잔디 경기장에서 축구는 달리기와 에너지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에서는 게임은 potreros에서 학습된다. 슬럼가의 공터와 같이 작고 단단하고 밀집된 경기장으로 그들의 게임은 거리에 관한 것이고, 좁으며, 기술적인 능력과 기교에 관한 것이다.

 

1928년 엘 그라피코의 편집장 보로코토는, 아르헨티나 게임의 영혼에 동상이 세워진다면 그것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더러운 얼굴과 빗을 거역하는 머릿결을 가진 한 pibe (소년), 지적이고, 방랑하고, 사기꾼 같은 설득력 있는 눈을 가졌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하며 오래된 빵을 먹느라 닳아버린 작은 이빨로 가득한 불한당과 같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그의 바지는 거칠게 꿰매진 덧 댄 천조각들이 있다; 그의 조끼는 아르헨티나 스트라이프 무늬이며 목부분이 깊게 파였으며 보이지 않는 쥐들이 갉아 먹은 많은 구멍이 나 있다. 그의 허리를 묶고 가슴위로 넘어가는 재질의 끈은 팔찌 재질 같다. 그의 무릎은 상처들의 딱지로 덮였으며 운명에 의해 소독되었다; 맨발이거나 발가락에 구멍이 나 있는 신발은 그들이 너무나 많은 슈팅을 날렸음을 보여준다. 그의 자세는 특징적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가 마치 누더기 공을 드리블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디에고 마라도나는 그의 대표팀 데뷔를 치른다. 16세의 나이에 그는 단지 위대한 축구선수 뿐 아니라 예언을 실현한 자가 되었다.


오늘 60세의 나이로 사망한 마라도나는 potreros의 소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cabecito negro (작은 검정 머리)"라고 불렀다. 그 말은 에바 페론이 자신의 주요 지지층들인 이탈리아 이민자들과 원주민 혼혈인들을 부를 때 쓰던 말이었다. 마라도나의 부모는 충성된 페로니스트였으며 에비타와 후안 페론의 사진을 집 벽면에 갖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아르헨티나의 극북동 지역의 코리엔테스 파라냐 델타의 선원이었으며 가사일을 도우며 돈을 벌던 부인과 합치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사한다. 친척들이 이사할 때, 그의 부친은 빌라 피오리토 지역에 헐거운 벽돌과 금속 벽지로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 슬럼가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위험해서 경찰들 조차도 상주하지 못하고 매일 버스를 타고 드나드는 지역이었다. 하루는 걸음마를 막 뗀 마라도나가 열려있던 오물통으로 떨어졌다. 그의 삼촌 시릴로는 그를 돕기 위해 "디에기토! 그 똥통에서 머리를 들어라"라고 소리쳤다. 그 표현은 마라도나가 그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일 때 주문과 같이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 되었다.


전기나 수도도 없이 자란 마라도나는 벌 수 있는대로 돈을 벌었다 - 택시 문을 열고, 폐기물을 팔고, 궐련 포장을 벗길 때 나오는 호일을 모으면서 돈을 벌었다. 등교할 때는 오렌지나 뭉친 신문지, 솜뭉치 등으로 키피-어피를 하면서 갔다. 그는 철길을 건널 때도 그 공을 땅에 떨어트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4-5세의 그가 수도 없이 공을 팅겼을 철망 담장 앞에서 서 있다. 이것은 정확히 보로코토가 요구했던 축구 교육이었다.


너무나 재능있었던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노스 후니오르, los Cebollitas (작은 양파) 팀의 유스팀에 테스트를 보러 갈 때였다. 그들은 그가 자기 나이라고 밝힌 8살 보다 더 나이가 많은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약간영양실조 상태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의 신분증을 확인했을 때, 그들은 그를 의사에게 보내서 약들을 투여받게 해서 그의 발달을 도왔다. 즉각적으로 그는 괴물이 되었고, 리그 경기 중에 공을 갖고 보여주는 트릭들로 관중들을 즐겁게 하였다. 11세의 나이에 그는 전국 방송국들에 언급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기대감과 동시에 약학적인 강화라는 익숙함이 있었던 셈이다.

 

코치가 영양실조를 의심했던 어린 시절

 

마라도나의 탐닉적인 성향도 마찬가지였다. 규칙이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명확해졌다. 그의 스승은 그가 치르지 않은 시험을 통과시켜주었다. 그는 영원히 비난을 전가할 다른 이들을 찾는 끔찍한 패배자였다. 그는 미성숙하고 무책임했으며, 팬들, 언론 그리고 그의 클럽의 요구에 악전고투를 벌였다. 1981년 보카 후니오르로 이적한 후, 클럽의 재정적인 문제는 그가 돈을 돌게 만드는 끝없는 친선 경기에 뛰었어야만 했음을 의미했다. 그는 긴장을 다루기 위해 더 많은 약물 투여를 받아야 했다. 압박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출처: https://twitter.com/Christian_ESEM/status/1331664915950612481

 

그의 코캐인 중독은 그가 결코 적응할 수 없었던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나폴리에서는 좀 더 행복했었다 - 그가 중심이었고 두 번의 리그 우승과 유에파 컵 우승을 견인했다. 하지만 심지어 그 기간도 격변의 시기였다. 그의 퍼포먼스는 그의 마약 투여 소문들, 그의 파티들, 그리고 그와 카모라와의 관계에 대한 배경에 반해 나왔다.


계속해서 규정들은 피치 안팎으로 회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1986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그의 핸드볼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세 가지 사건들 중 하나였다. 그는 1989년 유에파 컵 결승에서 핸드볼로 페널티를 얻었고 1990년 월드컵 소련과의 경기에서는 손으로 상대의 헤더를 걷어냈다. 그는 플라스틱 성기와 다른 사람의 소변이 든 가짜 주머니를 사용해 약물 테스트를 피해갔다. 그의 탈세는 그가 이탈리아를 떠난 십 여 년 후에도 논쟁으로 남아있었다.



손으로 상대 헤더를 걷어내는 마라도나

 

결국 1991년 3월 마라도나는 코캐인 양성 반응을 받았다. 그는 15개월 동안 출장 금지 처분을 받고 체중이 늘었고 표류했다. 세비야와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의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들도 있었다. 그의 집 밖에 기자들이 진을 쳤을 때, 그의 친구들은 공기총으로 그들을 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라도나가 1994년 월드컵에 뛰겠다고 밝혔을 때, 그는 환영받았다.


그는 보통의 기준에서 다뤄지는 축구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천재였던 게 아니라 상징적인 중요성이라는 휘장을 감싼 선수였다. 그의 커리어 전체를 보면 그는 아마도 4시즌 정도 위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리오넬 메시의 가차없는 꾸준함과 비교할 거리가 없다. 그의 환상적임은 분명한 내재된 힘겨움으로 덧칠해졌다.

 

1986년, 예언이 실현된 순간

 

1986년 그의 퍼포먼스는 월드컵 역사상 한 개인이 이룬 가장 위대한 것으로 남아있다. 그는 단순히 골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골들을 기록했으며, 단순히 환상적인 골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pibe의 특징적인 날쌔고 미끄러지는 드리블을 통한 골을 기록했다. 그는 potreros에서 났으며, 여전히 potreros에서 게임을 뛰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월드컵을 우승했다. 더 나은 것은 잉글랜드를 이기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일 것이다.

 

마라도나는 준 메시아적인 위치에 남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그의 선언들은 놀라운 경외들로 환영받았다. 나라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그의 견해들은 그를 페론과 비교되게끔 만들었다. 그는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다. 그것이 왜 그가 어떤 감독 경력을 보여준 바 없음에도 2010년 월드컵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것이 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그의 교회가 있는 이유이다. 그것이 왜 그의 가짜 성기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박물관에 마치 종교적인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는 이유이다 - 후에 전국 투어 도 중 그것은 도난된다.



그는 감량했다. 그는 피트니스를 얻었다. 그는 돌아왔다. 그는 94년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첫번째 골을 그리스를 상대로 득점한다. 나이지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 이후 그는 약물 검사를 받는다. 그는 실격한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비탄에 가까운 분위기가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페론의 서거 이후 그랬던 적이 없었다. 마치 그 둘 사이의 연결을 확인하는 것처럼, B 샘플 역시도 7월 1일, 페론 사망 20주년이 되는 날에 양성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복귀해서 큰 의미 없는 두어 시즌을 뛰었다. 그를 둘러싼 음모이론에 대해 분노했으며 또 다시 약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4년이 진정한 끝이었다. 단순히 위대한 축구 선수로서의 그가 끝났던 것이 아니라, 위대한 아르헨티나의 표상이 끝났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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