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제스 논쟁에 대한 여러가지 쟁점들
1. 스콜스 관련 논쟁의 핵심 '칭찬도르'가 갖는 의미
사실 '칭찬도르'라는 어휘가 발생한 이후부터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조롱의 의미 때문에, '칭찬도르'가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용례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보통은 '원래 램제랑 비교도 안되는 선수인데, 칭찬도르로 비벼보려고 한다' 정도의 용례로 사용되고 있죠.
그리고 보통 덧붙이시는게 '램제도 그런 발언들 모아놓으면 많다' 인데요.
이러한 발언은 사실 '스콜스에 대한 선수들의 칭찬모음'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 아닙니다.
1.1. 스콜스 관련 논쟁의 양상
보통 스콜스 관련 논쟁이 점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은 이러합니다.
(1) 스콜스 관련글이 올라온다
(2) 스콜스는 PFA 올해의 팀 등 개인수상에서 램제와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램제>>스
(3) 스콜스를 칭찬한 감독, 선수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램제스 비교(소위 말해 칭찬도르)
(주로 사비가 자주 인용됩니다 "지난 15-20년간 내가 본 최고의 미드필더는 스콜스'")
(4) '램제도 그런 발언들 모아놓으면 많다' 라고 반박
소위 말하는 '칭찬도르'가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2)번과 같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입니다.
(2) 스콜스는 개인수상에서 램제와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램제>>스
와 같은 주장에는 '개인수상과 선수 기량과의 높은 상관관계(개인수상=선수기량)' 전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스콜스는 개인수상 경력이 딸리니 기량도 램제와 비교할 수 없다는 거죠.
그에 대한 반박으로써의 칭찬도르는 바로 이 기본 전제를 비판하기 위해 주로 활용됩니다.
"개인수상 = 선수기량이라면,
왜 사비는 스콜스를 지난 15년간 자신이 본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았지?
토니크로스는 왜 램제스 중에 스콜스를 꼽았지?"
이러한 반박의 의도는 뚜렷합니다. 개인수상 실적만으로 램제스 세 선수를 비교할 수 없다, 즉 '개인수상 차이= 선수기량 차이' 라는 전제를 부수기 위함이지요.
1.2. 램제가 받은 칭찬이 반박이 되지 못하는 이유
근데 여기서 많은 분들이
(4) '램제도 그런 발언들 모아놓으면 많다'
라고 반박을 하시는데, 이건 엄밀히 말하면 반박이 아닙니다. 램제는 당연히 많아야죠. 개인수상 기록도 뛰어나고, 2000년대에 PL을 대표했던 미드필더였으니까요.
(3)에서 말하는건 '개인수상만으로는' 램제와 비교가 안 되는 스콜스가 왜 선수들에게 칭찬을 받았을까?'라는 주장을 통해서 '개인수상=선수 기량 격차'라고 보기는 어려운 거 아닐까?'인데, 여기서 램제가 칭찬 많이 받은 게 무슨 상관인가요? 램제가 칭찬 많이 받으면 스콜스에 대한 칭찬이 없어지기라도 하나요?
개인수상 = 선수기량이면 당연히 칭찬도 개인수상 많은 선수에게 집중되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개인수상 적은 선수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니 '개인수상 = 선수기량'이라는 전제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가 칭찬도르의 핵심이죠.
2. 스콜스와 램파드, 제라드 사이의 시대가 미묘하게 엇갈리는 지점
1974년생 스콜스, 1978년생 램파드, 1980년생 제라드.
어떤 분들께선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실제 여러 커뮤니티에서 촉발되었던 다양한 양상의 램제스 논쟁을 오랜 기간 지켜본 바, 저는 스콜스와 램파드, 제라드 사이의 존재하는 미묘하게 시대적 간극이 비교를 조금 더 어렵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콜스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지 간에, 논쟁에 참여한 팬들이 언급되는 활약상이 주로 2000년대 중후반기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하거든요. (PL 중계가 국내 보급된 시점 이후의 활약상)
플레이스타일이 유니크하다, 나머지 선수들에 비해 후방에 배치되었다, 경기 조율에 더 능하다 같은 스콜스의 상대우위를 논할 때의 특징들은 거의 대부분 스콜스가 3선에 본격적으로 배치된 06/07시즌 이후부터의 특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편의상 이하 '스콜스 2기')
'스콜스 2기' 당시 스콜스는 한국나이 서른셋이었고, 이전 시즌 겪은 심각한 눈 부상으로 인해 신체능력도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20대 시절 보여주던 다이나믹한 맛이 떨어진 상태였고, 동시에 킨이나 베컴 등 기존의 빌드업을 도맡아 하던 선수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3선으로 내려서 플레이하도록 한 것이죠.
나이 먹고 신체능력 저하로 포변시키는거 흔한 일이고, 스콜스는 그냥 거기서 굉장히 잘했던 것일 뿐입니다.
스콜스가 이전엔 그저 그런 선수였다가 포변하고 성공했다거나, 나이 서른셋에 갑자기 축구에 눈을 떴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2004년 이전(편의상 이하 '스콜스 1기')
- 리그 우승 6회, 챔스 1회(트레블) 기록
- 국가대표팀 66경기 소화(30살 은퇴)
- 프리미어리그 10주년 기념 베스트11 선정(2002년)
정도의 커리어를 이미 쌓았습니다. '스콜스 1기' 시절 로이킨이나 베컴이 빌드업 리더의 역할을 하는 동안 스콜스는 중앙, 측면, 2선, 심지어 전방에 이르기까지 포지션과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활약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전천후 미드필더였습니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스콜스의 커리어를 전체적으로 둗고 보면, 스콜스의 커리어 후반기인 '스콜스 2기'는'킨, 베컴 없이도, 신체능력이 저하되어도,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도 잘하네' 같은 평가를 받는게 맞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램제스 논쟁에서 스콜스의 스콜스 1기(94년 프로 데뷔 이후 눈부상으로 장기결장한 05/06 이전 시즌까지)의 활약상은 논쟁에서 간략히 언급되고 마는 수준입니다.
"팀 사정상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나설때 득점력도 좋았던 선수" 정도 언급하고 지나가버리죠.
이건 과장 약간 보태서, 팀 동료인 긱스가 선수 말년에 중미로 포변한것만 떼놓고, 긱스의 플레이스타일이나 최고 활약상을 논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거든요. 엄연히 90년대 초반부터 활약한 선수인데요.
처음 한두번은 그냥 그렇다 했는데, 세 선수의 은퇴 후 수년간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위와 같은 양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 보고 느낀게 이건 시대가 미묘하게 어긋나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팬들이 세 선수를 동시에 접할 수 있었던, - 더군다나 국내의 경우 PL 중계가 보급된 시점인 - 2000년대 중후반 이후의 활약상이 주 비교 대상이다 보니, 스콜스는 '스콜스 2기'의 활약상만이 비교대상이 되고, 그 이전의 활약상은 경험적으로 언급이 안 되는 것이죠.
한준희 위원이 세 선수의 비교에 대해 코멘트할 때, 활약 시기가 약간 다르다라고 코멘트했던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보구요.
3. 팀 내 에이스였었는지 여부가 클래스를 판단한다?
램제스 논쟁에서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스콜스는 램파드, 제라드와 달리 팀 내 에이스였던 적이 없다'
는 명제이지요.
맞습니다. 스콜스가 실제 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팀에서 가장 주목도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90년대 맨유의 빌드업은 로이킨이나 데이비드 베컴이 책임졌고, 눈부상 이후 팀의 3선 자원으로 뛸때는 호날두와 루니라는 걸출한 공격자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으니까요.
그와 달리 제라드는 리버풀에서 어린 나이에 주장 완장 달고 커리어 내내 팀의 중심축이라 부를만 했으며, 램파드 역시 첼시의 최전성기를 중심으로서 오롯이 함께 했지요.
그러나 이게 램파드나 제라드보다 스콜스가 기량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라고 보기엔 논리가 매우 빈약합니다.
-> 스콜스, 제라드, 램파드가 정확히 같은 수준의 동료 10명과 뛰었는가? 아니오
스콜스는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PL 내에서는 지금 논쟁 중인 제라드나 램파드보다도 더 윗선에 꼽히는 로이 킨, 데이비드 베컴과 20대 커리어를 함께 했습니다.
너른 활동범위와 그에 걸맞은 전진성으로 빌드업 리더로써 활약했던 로이킨, 측면에서 개리 네빌과 파트너쉽을 보여주면서 다이렉트한 공격루트를 이끌었던 베컴이 있는 상황에서 스콜스는 굳이 빌드업에 힘을 뺄 필요가 없죠.
더군다나 스콜스는 빌드업 외에도 잘하는 게 아주 많은 선수였으니까요. 선수들, 감독들이 말하듯 축구지능이 아주 뛰어났던 선수였기 때문에 측면, 중앙, 2선, 전방에 이르기까지 어떤 포지션에 두어도 제몫을 충분히 해주던 선수였습니다.
그렇다고 스콜스가 킨, 베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선수냐 하면, 그 것도 아니죠. 두 선수 떠나니까 3선에 배치되어 빌드업 리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니까요. (스콜스 2기)
‘제라드나 램파드는 팀에서 에이스였고, 스콜스는 에이스가 아니었다’
라는 명제가 세 선수의 기량차이를 증명하는 논거로 쓰이기 위해서는, 결국 세 선수가 한 팀의 에이스가 되는 데에 있어 경쟁자인 동료 선수들의 수준이 동일했는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부동의 리그 1위 팀 에이스 자리에 대한 경쟁률과 리그 상위권팀 에이스 자리에 대한 경쟁률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요.
리그 11회, 챔스 2회 우승팀의 에이스
리그 0회, 챔스 1회 우승팀의 에이스
리그 3회, 챔스 1회 우승팀의 에이스
경쟁률이 애초부터가 다른데, 이게 어떻게 비교의 근거가 되나요.
00년대 후반, 10년대 초반 바르셀로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 부스케츠도 팀 내 위상을 따져보면 아무리 높게 잡아도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다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부스케츠 보고 ‘팀 내 에이스도 아니었던 선수’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엄밀히 말해서, 제라드가 팀 내 에이스로서 가지는 부담감을 나눠 가질만한 선수가 존재했다면, 제라드도 리그 우승 0회에 그치진 않았겠죠. 실제로 리그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즌을 생각해보면 토레스나 수아레즈가 있었으니까요.
그런 선수가 없었기에 압도적인 핵심 노릇할 수 있었고, 그런 선수가 없었기에 리그 우승도 못한 건데, 왜 두 개를 분리해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동료들과 뛰었던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을 수 있었던 점도 참작해야겠죠. 동료들이 못해서 리그 우승 못했다고 리그 우승기록 포장할거면, 그런 동료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점도 인정해야죠.
4. 개인 수상의 맹점 : 애슐리영과 다비드 실바
다비드 실바는 맨시티 합류 이후로 명실공히 맨시티의 에이스 중 하나였습니다. 야야투레, 아게로, 콤파니, 페르난지뉴, KDB, 스털링같은 선수들도 있지만 실바가 시티에서 미친 영향력은 이 선수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비드 실바의 PFA 올해의 팀 선정 횟수는 고작 2회입니다. 이 수치는 같은 2선 자원 중 하나인 애슐리영의 선정횟수와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애슐리영이 PL에서 다비드실바급 활약을 펼쳤다고 말할 순 없죠. 이 역시 위에 언급한 '개인수상=선수기량'이라는 전제에 대한 반박이 될 것입니다.
실바는 PL 커리어 내내 우승권 팀(시티 우승 4회)에서 뛰었고, 상술하였듯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플레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도를 나눠가졌습니다. 거기에 플레이스타일 자체도 득점이 많지 않고, 특출나게 화려하지 않은데다가 그라운드 내에서 주장과 같이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것이죠.
스콜스도 이와 유사한 케이스라고 봅니다. 한번도 팀의 에이스인적이 없지 않느냐?라는 비판은 가혹한게, 스콜스가 뛰던 맨유는 리그를 11번 우승(3연패 2번)했고, 챔피언스리그를 2번이나 우승한 팀이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실바보다 더 압도적인 팀에서 뛰었죠. 스콜스의 성격, 플레이스타일 모두 주목받기 어려운 점도 한몫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스가 팀에 미친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2년간 최악의 리그 성적을 기록하고, 주장 로이킨이 불미스런 사태로 방출된 상황이었던 맨유가 이듬해인 06/07 시즌, 리그 3연패에 도전한 첼시를 누르고 우승했던 데에는 눈부상 복귀한 스콜스의 활약이 절대적이었죠.
5. 소결 : 우리는 왜 비교하는가?
과거부터 이러한 논쟁을 지켜보고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 선수 중에서는 제라드를 가장 높게 보는 사람이지만, 이와 관련된 논의에 참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콜스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평가절하당하는걸 너무 자주 봤어요.
스콜스 초기 10년 커리어는 없는 셈치고, 후방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30대 중반 커리어만 떼놓고 비교를 하거나, 선수 비교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있으나 전부는 아닌 개인 수상 기록만 가지고, 스콜스를 한급간 낮은 선수로 매도해버리거나, ‘스콜스는 그러니 칭찬도르밖에 없는 선수’라고 폄하하거나 하는 식으로요.
‘칭찬도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결국은 스콜스에 대한 비하적인 언사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칭찬도르'가 나오게 된 배경 또한 '개인수상실적'만이 선수기량평가의 전부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인데, 계속'스콜스는 개인수상 없다'만 무의미하게 반복하면서 '팬덤빨'같은 소리로 발화자까지 공격하니 논쟁이 소모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램제스 논쟁은 사실 수년째 축구 커뮤니티에서 반복되는 논쟁인데, 저는 애초에 이 사실 자체가 세 선수가 비슷비슷한 클래스였음을 입증하는 실례라고 봅니다. (스콜스가 나머지 두 선수와는 조금 다른 플레이스타일을 갖고 있었음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수상실적만 가지고 비교 안된다는둥 칭찬도르 조롱만 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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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